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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태일의 생애와 조영래 변호사
1.1. 전태일의 어린 시절과 가정 환경
전태일은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 환경은 매우 불우했다. 부모님이 운영하던 작은 비누공장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가세가 기울어 가난했기 때문이다. 전태일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가난의 어려움을 겪었는데, 일찍부터 가출을 하여 구두닦이나 신문팔이 등 온갖 일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가난으로 인해 초등교육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 현실과 맞서 싸워야만 했던 것이다.
그나마 잠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외가에서 재봉틀을 배우며 공민학교에 다닐 때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집안 사정으로 인해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다시 서울로 가출하여 판자촌에서 신문팔이와 구두닦이로 근근이 살아가게 되었다. 이처럼 전태일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고단함 속에서 보냈으며, 이는 그의 삶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1.2. 조영래 변호사의 성장과 법률 활동
조영래 변호사의 성장과 법률 활동이다. 조영래는 1947년 3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겪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으나, 그는 천재성을 발휘하여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반독재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965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수석 입학하였고, 대학 재학 중에도 한일회담 반대, 삼성재벌 밀수 규탄, 6·7 부정선거 규탄 등의 활발한 시위 활동을 전개하였다.
졸업 후 사법시험 준비 중이던 1970년, 전태일의 분신 사건을 접하게 되면서 조영래의 인생에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전태일 분신 사건은 조영래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고, 이후 전태일의 삶과 죽음을 조명하는 '전태일 평전' 집필에 몰두하게 되었다.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으나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가 만기 출소하게 된다. 1980년 수배가 해제되자 이화여대 강당에서 부인 이옥경씨와 결혼식을 올리고 사법연수원에 재입학하여 1982년 2월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변호사가 된 조영래는 인권변호사로서의 명성을 높여갔다. 주로 노동자, 여성, 빈민들을 위한 무료 변론에 주력하였고, 소비자, 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시민들의 권익 보호에 앞장섰다. 그는 "한국의 랄프 네이더"라고 불릴 정도로 탁월한 변호사로 인정받았다. 1980년대 말 민주화 운동 시기에는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을 창설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조영래 변호사는 단순한 법률 실무가가 아니라 사회 정의와 인권을 위해 헌신한 변혁적 지식인이었다. 그의 활동은 전태일의 삶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으며, 전태일 평전의 저자로서 전태일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1.3. 전태일 사건과 조영래 변호사의 역할
전태일은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기준법을 안고 분신하여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분신 투쟁은 단순한 개인의 행위가 아니라 그 당시 만연했던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고자 하는 사회운동이었다. 전태일의 분신 사건은 기존 권력을 향한 직접적인 저항이자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서 조영래 변호사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조영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학생운동을 이끌며 반독재 운동에 참여했던 인물이었다. 전태일의 분신 소식을 접하면서 그는 깊은 충격을 받았고, 이 사건이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조영래는 전태일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서울대학교 법대에서 계획을 세웠지만, 경찰의 방해로 실패했다. 그러나 이 시도는 학생들의 격렬한 시위로 이어졌고, 전태일의 죽음이 던진 메시지는 더욱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영래는 "제2의 전태일"처럼 살고자 했고, 이후 3년간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전태일 평전"을 집필하게 된다.
전태일 평전의 집필 과정에서 조영래는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증언을 토대로 하여 전태일의 삶과 투쟁을 생생하게 복원해냈다. 그는 전태일이 남긴 수기와 일기, 편지 등을 인용하여 전태일의 정신과 사상을 드러냈다. 이를 통해 전태일이라는 한 개인의 비극적인 죽음이 단순한 사건이 아닌, 당시 열악한 노동환경과 정부의 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