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특히 한국문학의 달인들이 충실한 해설을 제시함으로써 근본적인 문학 감상을 위한 길잡이가 되어준다. 중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청소년들의 눈높이에 맞춰 쉽고 명쾌하게 설명했다. 제5권 『운수 좋은 날』에서는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의 비참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가 현진건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개요
현진건의 단편소설 『운수 좋은 날』은 일제강점기 하층민의 삶을 밀도 있게 그려낸 작품이다.
소설 속 주인공 김 첨지는 운수가 좋은 하루를 맞았지만, 그 하루의 끝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불행한 결말이었다. ‘운수’라는 단어에 담긴 아이러니, 그리고 한 인간의 생계와 가족을 향한 고단한 사랑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낯설지 않다.
본 독후감은 단순히 줄거리를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인간의 존엄, 사회적 모순, 그리고 운명에 대한 질문을 따라가며, 오늘을 사는 나 자신과의 연결 지점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주요 키워드
현진건, 운수 좋은 날, 단편소설, 식민지 조선, 하층민의 삶, 사회 모순, 생계, 가족 사랑, 아이러니,
서론
‘운이 좋다’는 말이 씁쓸했던 이유
『운수 좋은 날』이라는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는, 단순히 누군가에게 특별히 좋은 일이 생기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희망적인 메시지가 담긴 내용이 아닐까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막상 작품을 다 읽고 나니, 이 제목이 이렇게 아프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운이 좋았다’는 말이, 가장 비극적인 하루를 감싸는 역설이 될 줄은 몰랐다. 이 소설을 접하게 된 계기는 문학 수업의 과제 때문이었다. 현진건이라는 이름은 국어 교과서에서 익숙했지만, 당시엔 그저 ‘옛날 작가’ 중 한 명일 뿐이었다. 그렇게 큰 기대 없이 책장을 펼쳤지만,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묘하게 오래 마음에 남았다.
현진건의 단편 운수 좋은 날은 제목이 주는 은근한 희망과 달리 하루라는 시간에 압축된 가난과 비극이 엇갈리며 읽는 이의 마음을 깊숙이 파고드는 작품이다. 이야기는 1920 년대 경성의 음습한 새벽으로 시작된다. 인력거꾼 김 첨지는 병든 아내가 피를 토하며 누워 있는 방을 뒤로하고 거리로 나선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풍경 속에서 그는 어쩐지 기분이 좋다. 그 이유는 바로 돈이 되는 손님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자는 제목과 달리 이 운이 결국 김 첨지를 더 깊은 절망으로 끌어갈 것을 예감한다.
작품의 초반부는 인력거라는 생계 수단에 걸린 희로애락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김 첨지는 비가 오는 날에 부자 손님을 많이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다. 실제로 그는 손님을 연달아 태우며 큰돈을 번다. 그러나 이때부터 희극과 비극이 겹친 묘한 긴장이 생긴다. 그의 시선은 돈을 벌었다는 뿌듯함에 머물지만 작품 바깥에서는 병든 아내가 숨을 헐떡이며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 독자는 두 시공간의 대비로 인해 불안과 슬픔을 선연하게 느낀다.
김 첨지의 내면 독백은 인물의 이중성을 드러낸다. 그는 돈을 벌어 아내에게 따뜻한 설렁탕을 사주고 싶다고 반복해 다짐한다. 하지만 손님을 태우는 순간 아내의 이미지는 잠시 잊힌다.
현진건 작가의 '운수 좋은 날'은 읽을 때마다 마음을 저미는 소설입니다. 김첨지라는 인물을 통해 일제강점기 하층민의 비참한 삶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죠. 역설적인 제목처럼, 김첨지가 맞이한 '운수 좋은 날'은 결국 아내의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 소설은 삶의 아이러니와 인간의 무력감,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슬픔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어, 늘 제게 묵직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제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저희 집은 늘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김첨지처럼 당장의 끼니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초등학생 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시면서 집안 형편이 급격히 어려워진 적이 있었습니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은 가난한 인력거꾼인 김첨지가 운수 좋다고 생각한 하루 끝에 비극적인 결말을 맞은 내용이다.
김첨지는 평소에는 손님이 없어 힘들게 살았지만 어느 날 평소와 다르게 아침부터 손님이 많아서 돈을 많이 벌게 됩니다. 이날은 계속해서 손님이 끊이지 않아 기분이 매우 좋아집니다. 그래서 오늘은 정말 운수 좋은 날 이구나 하면서 아픈 아내에게 줄 설렁탕을 사서 집에 갔습니다.
그러나 집에 도착하자 아내는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였고 김첨지는 돈을 벌어 기뻤지만 정작 가족을 돌보지 못한 채 늦게 돌아온 자신을 한탄합니다.
그는 돈을 벌어 가족을 돕고 싶었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순간에 아내의 곁을 지키지 못하게 됩니다. 이처럼 운수 좋은 날은 인간이 돈을 좇으며 살아가지만, 그 과정에서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이 소설은 제목과는 반전인 내용이다. 김 첨지라는 사람이 인력거꾼인데 그는 아내와 아이 하나가 있다. 김 첨지는 인력거꾼으로 돈을 잘 벌지 못한다. 아내가 아픈데도 약 하나 사줄 돈이 없어 아내는 병에 걸려 항상 누워 있다. 그러던 어느날, 김첨지는 여느 때와 같이 인력거를 끌러 집을 나서는데 아내가 나가지 말고 집에 있어달라는 것이었다. 김첨지는 그럼 돈은 누가 버냐면서 밖으로 나갔다. 근데 김첨지는 오늘 따라 일이 잘 되어 나갔다. 인력거를 끌어 도착하는 곳에 탈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이 먼 곳으로 가서 돈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첨지는 평소 때와 달리 엄청 많은 돈을 벌었다.
이 책을 처음 읽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운수좋은날이라는 이 책의 제목을 처음 봤을 때 해피엔딩 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먼 비극적인 결말의 내용이다.
주인공인 김첨지는 일제강점기 때의 인력거꾼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기침으로 콜록거리며 누워 있는 아내와 젖먹이 아들이 있다. 그는 거의 열흘 동안 돈을 벌지 못했다. 김첨지는 어렵게 생계를 꾸려나가고, 무슨 병인지도 모르는 병에 걸린 아내를 무뚝뚝하고 차갑게 대하지만 속으로는 아내를 위해주고 사랑한다.
결국 취중에 설렁탕을 사들고 집으로 들어가 보지만 아내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르렁거리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젖을 빠는 아이의 소리만 들리는 무서운 정적. 김 첨지는 이미 짐작했지만 믿고 싶지 않은 현실에 아내를 발로 툭 차며 괜히 큰소리를 쳐보지만 독자들의 가슴만 더 미어질 뿐이다.
김 첨지의 심리변화에 따라 사실 비극적인 결말을 추측할 수는 있었다. 예상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 첨지가 하루 동안 염려했던 일이 현실로 다가오니 너무나 안타깝기만 하고 슬프단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모두의 마음이 시큰거렸을 명대사이다.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결국 아내는 그토록 먹고 싶어 하던 설렁탕 한번 먹어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운수 좋은날인줄 알았던 그날은 김 첨지에게 가장 불행한 날이 되어버렸다.
다시 읽어도 가슴이 시린 작품이다. 짧지만 강렬한 단편소설이다. 국어 시간에 배울 때는 표현, 소설의 작풍 이런 것만 염두에 두고 읽었지만 다시 읽어보니 묘사력 이런 것도 매우 뛰어났다. 김첨지는 분명히 좋은 사람이다. 좋은 가장인데 표현이 너무 서툴렀다. 운 좋게 손님을 많이 받은 날이었다.
중학교 1학년 국어시간에 선생님께서 한국문학작품을 패러디 한 자료를 보여주셨다. 그때 현진건 선생님의 작품 ‘운수 좋은 날’도 보여주셨는데 책으로 꼭 보고 싶었다. 살짝 줄거리만 들었을 때도 슬펐는데 직접 읽으니 더 슬프고 안타까웠다. 아마 끝에 김 첨지의 아내가 죽은 것을 모르고 봤더라면 더욱더 조마조마하면서 몰입했을 것이다.
김 첨지가 아내에게 성을 내며 ‘오라질 년’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한 달이 넘도록 아픈 아내에게 계속 험한 말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 하면서 아내생각을 하고 취중에도 설렁탕을 사 가지고 가는 것이 아내를 무척 걱정하고 있는 것 같다.
고등학교 때도 국어 문학 시간에 읽었지만 다시 읽어보아도 정말 우울하기 짝이 없다. 김첨지는 인력거 장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삼십전, 오십 전 돈이 계속 쌓였다. 한 마디로 운수 억세게 좋은 날이었다. 그런데 김첨지는 아내가 아팠다. 김첨지는 나쁜 구석이 있었는데 약을 먹이지 않았다.
제정신이라면 돈을 벌어서 바로 약을 사 먹여야 할텐데 한 번 약을 먹이면 약 내성이 생겨서 더 큰 병에 걸린다는 말 같지도 않은 논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