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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감상문]장미의 이름 평가B괜찮아요
    장미의 이름을 감상한 후에...이 영화는 추리 소설을 보는 듯한 미스터리식 전개와 그 안에서 여러 가지 갈등 구조와 시대적 배경 등이 결합 되면서 영화를 보는 이에게 영화가 끝날 때 까지 지루함을 느끼지 않게 한다. 영화의 시작은 어두운 배경과 음침한 내레이션으로 그 시대의 어두운 사회상을 반영한다. 실제로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14세기의 중세 유럽은 기독교의 권력이 최고조로 달하던 전성기였고, 그 부패 또한 절정에 이르렀던 시대였다. 이 작품은 그런 시대에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이란 장소에서 연이어 발생하는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아간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종말과 최후의 심판에 대한 믿음이 지배적이었고 중세 교회가 베네딕트파와 프란치스코파로 나뉘어 각각의 진리를 주장하고 정통과 이단을 구분하던 이분법적 가치관의 시대였다. 즉, 이분법적인 흑백논리가 지배적이어서 기득권의 세력이 승인하는 신앙의 내용과 상치되는 사상이나 신앙이 모두 이단시되고 따라서 종교 재판, 이단 논쟁, 마녀 사냥 등 종교가 권력 행사와 기득권의 유지 도구로 사용됐다. 이는 근본적으로 종교가 인간을 위하여 긍정적으로 기능하고자 하는 점을 망각하여 종교를 위하여 인간이 존재하는 듯한 기현상을 창출해 내고 있다.이 영화의 주요사건은 수도사들의 연속적인 죽음이다. 그 죽음들의 원인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었다는 ‘시학’ 속에 포함된 ‘희극론‘이라는 책과 관련되어 나타난다. 이 수도원의 원로신부인 장서관장이 웃음이란 인간세상을 악으로 물들게 하는 요소라 하여 그 책을 읽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갔기 때문이다. 영화는 점점 진실에 접근해 가다가 장서관장의 요청으로 이단 재판관을 등장시킴으로써 전환의 국면을 맞는다. 장서관장은 자신의 논리를 모든 기독교인이 가져야 한다는 독단적 오류에 빠져 진정한 진리로 나아가려는 다른 모든 이에게 자신의 논리만을 강요한다. 이단 재판관은 위선적인 종교의 지배 계층을 상징하는 인물로 종교를 기득권 유지의 도구로 사용하는 데 사건 해결을 통한 진실의 규명보다는 지금까지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 종교재판을 이용해 사건을 덮어 버리려 한다. 결국 모든 사건은 원로신부인 장서관장이 자신의 사상을 고집하기 위해 금서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독약을 발라놓음으로써 발생했다는 것이 밝혀진다.이러한 사건들 속에는 이러한 사건들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갈등들이 존재한다. 그 첫 번째 갈등이 원로신부인 장서관장과 월리엄 신부 간에 나타는 웃음에 관한 논쟁이다. 신부는 웃음이야 말로 악의 근원이라고 했지만 월리엄은 이에 동의하지 않고 신부와 갈등하게 된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수도승들이 죽음을 맞게 되고 결국 많은 장서들이 보관되어있는 서고마저 불타게 된다. 두 번째 갈등은 수도원과 민중들과의 갈등, 크게는 민중들과 교회와의 갈등이다. 영화 중간과 결말 부분에 이러한 갈등들이 잘 드러난다. 월리엄 신부와 제자가 수도승의 죽음에 대하여 수도원 외부를 조사할 때 수도원에서 버리는 음식찌꺼기를 민중들이 주어먹는 모습, 불만석인 표정들로 수도원에 십일조를 내는 모습, 영화 마지막에 교황청에서 파견한 이단 심판관을 죽음으로 모는 모습을 통해 잘 드러난다. 수도원에는 꼬박 꼬박 십일조를 바치고 정작 본인들은 그 수도원이 버리는 쓰레기를 주워 먹는 모습과 마지막 장면에서 수도원에 항거하여 봉기하는 모습을 볼 때 민중들이 수도원에 얼마나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월리엄의 제자가 음식창고에서 우연히 만난 한 여인과의 정사 후에 겪는 내면적인 갈등이 있다. 그는 이 여인과의 정사 이후 많은 번민을 느낀다. 그는 많은 죄의식을 느끼지만 그의 스승인 윌리엄은 오히려 관대한 모습을 보인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적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러한 스승과 제자간의 대화 속에서 기존의 성직자와 지배층들이 가지고 있던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여성관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영화가 절정으로 치달을 때 나타나는 갈등이다. 그것은 기존의 가톨릭에 약간의 위협이 될 거라고 생각되는 것들은 모두 이단이라고 취급해버리는 마녀사냥 속에서 나타나는 갈등이다. 수도원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원인을 이성적인 면에서 찾으려는 노력과 그것을 단순히 마녀의 저주라고 치부해 버리는 이단 심판관 사이의 갈등 속에서 이 시대의 마녀사냥과 이단 심판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이율배반적인지를 찾아낼 수 있다.
    독후감/창작| 2006.01.01| 3페이지| 1,000원| 조회(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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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소설 검은 꽃 감상문 평가A+최고예요
    소설 ‘검은 꽃’을 읽고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난 소설가 김영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그 사람의 출생도 그 사람의 또 다른 소설제목도 모르고 있었다. 이 소설은 제목부터가, 아니 책 앞뒤에 나와 있는 해설만 읽어보아도 무거운 느낌이었다. 워낙에 역사 소설류의 무거운 이야기를 싫어하는 터라 다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걱정되었다. 게다가 멕시코 이주 노동자인 ‘애니깽’에 관한 이야기라니, 얼마나 우울하고 암울할까. 그래서 책을 펼칠 엄두가 나질 않았다. 하지만 김영하 표 애니깽은 달랐다. 수많은 인물들을 등장시키면서도 그들의 인생이 어떻게 뒤바뀌는지를 꼼꼼하게 추적하고 있다. 더불어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의식도 결코 만만치 않다. 1905년 4월 4일 1033명의 조선인들이 멕시코로 떠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를 한 마디로 줄여 말하면, 땅이 없어서다. 나라가 더 이상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보살피지 못할 때, 또는 그 나라에서 더 이상 희망을 찾지 못할 때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게 마련이다. 애니깽의 슬픈 이야기도 여기서 비롯됐다.대한제국 말기 1905년, 해외 이주가 한창이던 때, 하와이 이주민들이 이미 정착하기 시작한 시기, 러시아와 일본이 국운을 걸고 전쟁을 벌이던 시기, 이미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본에게로 넘어 갔고, 대한제국이라는 나라가 서서히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던 시대, 영국 기선 일포드 호는 조선인 1,033명을 싣고 멕시코로 떠난다. 그들은 멕시코 전역에 널려있는 에네켄 농장의 노동자로 4년간의 계약을 맺고 팔린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 영국 배를 타고 그 먼 멕시코까지 간 이민 노동자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충분히 놀라웠고 그 당시 노동자들의 이주 경로로 짐작되는 곳을 모두 찾아가 보았다는 작가의 말에서 뛰어난 상상력뿐만 아니라 그 상상력을 뒷받침하는 철저한 준비와 끈기 있는 노력을 느꼈다. 제물포 항을 출발하여 멕시코로 향하는 영국기선 일포드 호에는 네덜란드계 선장과 독일인 선원들, 일본인 요리사들과 1033명의 조선인들이 타고 있었다. 게다가 조선인들은 모두 신분이 다양했다. 이름도 없이 보부상에게 끌려 다니다 도망쳐 나온 고아 김이정, 이 사람은 내가 끝까지 안타까워하던 인물 중 한 사람이다. 러일전쟁이 터지자마자 군복을 벗은 신식군인 조장윤, 처음에는 참 멋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마지막에 그가 김이정을 버려두고 간 부분에서는 화가 났다. 왕조의 멸망에 통한의 눈물을 삼키는 고종황제의 사촌 이종도와 그의 가족, 이들은 누구보다도 불쌍한 사람들이다. 적어도 조선 땅에서라면 그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 외에도 일포드 호에는 주교의 명을 받고 마야인 교화에 나서는 박광수 바오로 신부, 그를 도둑질 하는 최선길 등의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는 그 당시로서는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직도 조국에는 황제가 있고, 양반이 있고, 그들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상놈이 있는데 일포드 호에는 없었다. 이로서 이미 조선 왕조 오백년의 역사는 끝이 나고 있었던 것이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양반이든 상놈이든 모두 한 곳에 앉아 밥을 먹고, 잠을 자는 모습을 어찌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거창하게 말해서 평등사회의 실현, 민주사회의 도래를 의미한다. 그 당시 조선에서는 서양 문물의 전래와 함께 새로운 가치가 유입되어 기존 가치들과 적잖은 마찰이 빚어지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백성들은 물 흐르듯 흘러오는 새로움에 대해 놀라고 있었고 서서히 그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왕족을 비롯한 일부 특권 계층들은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전히 옛것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이러한 묘한 관계를 일포드 호는 적절히 반죽하여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결국 일포드 호의 사람들은 하나 둘 똑같아지기 시작했다. 양반이나 도둑이나 군인이나 중이나 모두들 양반, 상놈이 아닌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양반이나 상놈이나 모두 뒤엉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어찌 보면 지저분하고 불결하게 비춰지기도 하지만 참 다행스럽고,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갑자기 불어 닥친 변화에 놀라서 모두들 황당해하고 있지만 자연스럽게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삶이 아니라 스스로 개척하는 삶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노력여하에 상관없이 삶이 결정되어버리는 것은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이렇게라도 해서 옛것을 버리고 근대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가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전혀 외교 관계도 없었던 불모의 나라 멕시코, 그 곳으로 떠난 1,033명의 조선인은 전혀 낯선 문명, 처음 보는 세상에 발을 들여놓고 곧 그 곳에 적응하기 위해 발버둥치기 시작한다. 그 중 고종황제의 사촌인 이종도는 너무 오래 황제를 의식했고, 고리타분한 옛것을 버리지 못했다. 그가 조선 땅에 있었다면 이토록 변화에 무심해도 조금은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그대로 낙오자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끝까지 고수하던 그의 이상은 무관심한 아들에 의해 불태워지면서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김이정, 그는 보부상의 잔심부름꾼으로 지내다가 멕시코로 떠난 인물이다. 어린 시절 이정도의 딸인 이연수와 멕시코로 떠나는 배 안에서 만나 사랑을 키워왔지만 결국 둘은 헤어지고 만다. 어머니에게서 한번 떠나야 했고 조국에서 떠나야 했으며 사랑하는 연인에게서도 떠나야만 했던 그는 멕시코 내전에 이어 과테말라 내전에도 휩싸인다. 거기서 그는 수십 명 무리들을 이끌고 밀림 오지에 '신대한'이라는 나라를 세운다. 그들이 아는 세상은 대한제국이 전부였기에 근대를 향한 그들의 몸부림도 결국은 나라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신대한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도 결국은 과테말라 정부군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뜨거운 피와 열정을 가지고 살았던 남자,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머나먼 이국에서 살다가 죽은 사람, 마치 근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새로운 문명을 접하고 자아와 정체성을 상실한 당시 조선인들을 대변하는 듯하다. 그에 비해 조장윤과 그 무리들, 과거 러시아식 훈련을 받던 대한제국의 군인 출신들이었던 그들은 멕시코에 설립된 한인회의 지도자로 여생을 편안히 보낸다. 농장에서 폭동을 일으켰을 때도, 한인회를 설립했을 때도, 과테말라 반군에게 군사 지원을 해주기 위해 수십 명을 데리고 밀림으로 떠날 때에도, 그들은 항상 앞장서서 일을 지휘했지만 위급할 때는 가장 먼저 사라졌었다. 대단한 협상가, 지도자처럼 굴었지만 결국은 아주 약삭빠른 기회주의자였을 뿐이다. 당시 사람들 눈에는 그런 그들이 어떻게 보였을까? 그들은 근대 자본주의에 빠르게 적응해버린 인간들이었다.책을 읽다 보면 한참 집중하고 있는데 끊어지고 다른 이야기로 이어지는 부분이 더러 있다. 많은 인물을 다루다 보니 이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끊어버리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이 소설의 매력인 것 같다. 주인공이 이 책에는 없다. 모든 등장인물이 주인공이며 하나하나의 사건 중 중요하지 않은 것이 어느 것 하나 없다. 그 모든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것이다. 소설은 한 사람도 그냥 버려두지 않는다. 일포드 호에 함께 탔던, 그리고 그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가던 사람들을 끝까지 쫓아 기록하고 있다. 멕시코의 에케넨 농장에서 그토록 치열하고 잔혹한 삶을 산 그들. 1910년 4년간의 계약을 끝내고 그 삶에서 해방되었음에도 돌아갈 조국이 없어 돌아오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돌다 유유히 사라지는 그들의 이야기는 전부다 사실이 아니라고 하여도 충분히 있을 법한, 그래서 더 슬픈 이야기이다.
    독후감/창작| 2005.12.28| 4페이지| 1,000원| 조회(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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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크로드]실크로드, 길 위의 노래를 읽고...
    1. 서 론실크로드가 포함하고 있는 바는 단지 비단 교류의 길로서 무역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서의 문화 및 문명 교류의 역동적인 소통이다. 실크로드에 놓여 진 지역들에서 일어난 종교와 예술은 그로 인하여 활발한 동서 문명의 교류를 일구어 내게 되었다. 한국과 실크로드의 연관에 있어서 선사시대의 토기나 고조선 시대의 북방기원 문화는 삼국시대 이전에 이미 한국과 서역의 관계를 입증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의 음악 연구는 주로 역사적인 연구 및 동아시아 음악과의 연관성에 집중 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음악에 대한 역사적, 지역적 연구는 필연적으로 동양음악 전체에 대한 연구와 논의를 필요로 하였고 이 과정에서 실크로드에 있는 동양의 많은 지역들의 음악 간의 상관성이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실크로드 길 위의 노래’는 실제 답사 및 음악적 경험을 통해 실크로드의 음악을 저술하였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이 책은 서양음악학자들에 의해서 주로 연구되어왔던 동양음악 전반에 대하여 저자가 실제 답사 및 연구를 전문적인 지식과 기행문체로 서술한 책이다. 이 책에서는 이제까지 한국 내에서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로 주로 제한되어왔던 동양음악의 연구 범위를 폭넓게 제시하였다고 불 수 있다. 이 책은 저자가 실크로드를 따라 경험한 음악 전문 여행기이다. 그는 중국, 일본, 인도, 네팔, 파키스탄, 중앙아시아, 몽골 등의 음악과 문화에 대한 여행담을 나라별로 나누어서 기술하고 있는데, 실크로드 위에 놓인 이들 나라들의 음악과 풍습 등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2. 본 론1) 중국과 일본우선 중국 편에서는 경극, 초나라의 편종, 리장, 장안, 돈황, 광시, 티베트, 광둥 지역에서 체험한 음악 여행과 관련된 음악사적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데, 경극을 설명하면서는 간단한 전문적 설명과 더불어 영화 패왕별희를 소개하여 일반인들의 관심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점이 돋보였다. 그리고 실크로드의 전성시대를 대표하는 당나라의 수도 장안의 음악을 비파와 그 음악을 중심으로 서술하여 중앙아시아의 교류를 짐작할 수 있도록 설명하였다. 곡경 혹은 직경, 또는 4현 혹은 5현 등으로 구분되는 비파의 종류는 실크로드 루트에 의한 음악 교류를 제시하는 사실들 중 하나인데, 이러한 내용을 이 책에서는 너무 전문적이지 않으면서도 진지한 관심을 일반인들로부터 일으킬 수 있게 설명한 것이 적절했다고 본다. 또한 중국의 음악 뿐 아니라 위생습관이라든지 귀신을 쫓아내는 동고춤 등을 소개하면서 음악을 이루는 전통?문화적 특성을 함께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비교적 짧게 서술된 일본 편에서는 노와가부키를 그 내용으로 하여 이들 장르에 관한 설명 뿐 아니라 연주자와 나눈 솔직한 대화를 통해서 일본 전통음악에 대한 저자의 생각과 한국음악과의 대비를 간단히 서술하였다.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일본의 음악이 음악적 차이가 크다는 게 매우 특이하였다. 그 차이점으로는 즉흥 음악이 주를 이루는 한국과 달리 일본은 모방을 최고의 덕목으로 치며, 한국은 음을 흔드는 농현을 좋아하지만 일본에서는 농현이 드물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2) 인도, 파키스탄, 네팔중국과 일본 편에 이어서 인도, 파키스탄, 그리고 네팔에 대한 음악 기행이 나타난다. 인도 편에서는 인도인들의 종교와 음악을 대하는 태도를 소개하면서 북인도와 남인도의 구분을 음악적 비교보다는 북인도 대표악기인 시타르와 남인도 대표 악기인 비나를 대비하여 설명하였고 벵골지방의 음유시인인 바울 또한 소개하고 있다. 무수한 인도 음악 악기 중에서 고대 현악기인 비나와 수입?개량 현악기인 시타르를 대비하여서 논의한 것은 매우 적절하였으며, 저자의 답사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음악과의 상관 가능성 등을 제기한 것은 한국음악학자 입장에서 인도음악을 바라보는 적극적 시각을 나타낸 것으로 의미 있게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모헨조다로 유적지가 있는 파키스탄 편은 주로 여행담을 중심으로 사회, 문화적인 측면에서 주로 서술되어있으며 음악에 관하여서는 수피음악인 크발리 만을 언급하였는데, 현재 파키스탄 음악문화에 대한 정보를 좀 더 서술해야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파키스탄은 다른 회교권 국가와는 달리 오랜 역사를 인도문화와 연관을 맺어왔던 나라로서 예전에는 인도대륙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예전의 파키스탄 음악은 인도 음악과 동일한 흐름이었지만, 현재에는 이슬람 법도에 충실하게 임하려는 음악?문화적 분위기로 인하여 표면적으로 드러난 대표적 음악은 크발리 일런지 모르지만, 내부적으로는 인도의 전통 음악 및 대중음악을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3) 중앙아시아그리고 중앙아시아 편에서는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의 화려한 도시였던 우즈베크스탄의 사마르칸트, 그리고 부하라, 타슈겐트를 여행하면서 접한 문화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현재 중앙아시아에 있는 고려인(카레이스키)에 대한 언급이라든지 당나라에서 유학생활을 한 최치원의 ‘향악잡영오수’에서 등장하는 ‘속독’이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활동한 이란계 민족인 소그드인의 춤을 묘사한 것이라고 삼국사기를 인용한 점 등은 한국의 과거와 현재를 실크로드 소통로의 선상에 놓는 중요한 서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실크로드 전역에 걸쳐서 발견할 수 있는 류트류의 악기를 중앙아시아의 크이약에 관한 설명과 사진을 통해 생각해 보는 것과 오카리나, 노래극인 ‘마나쉬스’등에 대한 설명은 다양한 지역 간의 연계성을 폭넓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한국 농악의 장단이 중앙아시아에서도 발견된다는 점과 양 지역의 놀이 형태가 매우 비슷한 점을 들면서 좀 더 밀접한 관계를 엮어보고자 하였다. 몽고 편에서 또한 야탁과 산조 가야금의 비슷한 점을 제시하고 이 악기들이 몽고에서 먼저 기원했을 가능성과 한국에서 먼저 기원했을 가능성에 대한 가설을 각각 세우고 설명하면서 학문적인 의문에 대한 후속 연구 필요성을 나타내고 있다.3. 결 론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아시아 음악에 있어서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인도 악기 다마루는 우리나라의 장구로 변화했고 세종대왕이 작곡 했다는 ‘여민락’은 우즈베키스탄의 작은 오아시스 국가의 음악을 바탕으로 작곡됐다. 인도의 전통음악인 라가와 ‘영산회상’이 여러 면에서 닮은꼴이며 인도의 비나라는 악기가 우리나라로 건너온 뒤 왕산악의 개량으로 거문고가 만들어졌다. 또한 우리나라의 해금과 비슷한 악기가 네팔에서 사용되고 있다. 몽골의 ‘야탁’은 우리나라의 산조가야금과 대동소이하다. 저자는 몽골이 고려 침략기에 이 악기를 수입해갔을 것으로 봤다. 이러한 주장들에 대한 타당성 연구는 좀 더 깊이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지만 이 부분 또한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 간의 역사적?문화적 관계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
    독후감/창작| 2005.12.25| 4페이지| 1,000원| 조회(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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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축의 이해] 건축 구조
    보 구조기둥-보 구조는 가장 오래된 구조 방식이다. 요즘에는 전형적인 플랫폼 구조와 혼용되기도 한다. 기둥-보 구조의 장점은 큰 단면의 부재 사용으로 지간 사이를 늘릴 수 있어서 자재 및 인력을 절감할 수 있다. 또 기둥사이는 비내력벽이므로 대규모의 개구부나 외부로의 조망을 위한 대형 창을 만들 수 있어 작업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기둥-보 구조의 단점은 배관, 배선 등 설비 라인이 노출되는 경우가 생기고 수직 설비를 위한 샤프트가 요구된다. 기둥-보 방식의 구조는 부재의 연결 부위의 설계와 시공에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하중의 전달이 결합부위로 전달되므로 세부 사항에 대한 구조적 안전성을 고려해서 만들어져야 한다.아치구조볼록한 곡선재를 이용하여 부재에 수직으로 작용하는 하중에 대하여 대부분의 응력을 부재의 축방향의 압축응력으로 대응하도록 하는 구조를 아치구조라 한다. 아치의 이론은 간단히 말하면, 상부에서 오는 수직압력이 아치의 축선에 따라 좌우로 나누어져 밑으로?직압력만으로 전달하게 한 것이고, 부재의 하부에 인장력이 생기지 않게 구조화한 것이다. 따라서 벽돌은 이 축선에 수직방향으로 줄눈을 맞추어 쌓아야 하고, 주요한 줄눈의 방향은 모두 그 중심에 모이게 한다.?구조적으로는 상부하중을 각 굄돌의 접촉면에 수직인 방향의 압축력으로서 하부에 전하고, 아치 하단에 있어서는 바깥쪽으로 벌어지려고 하는 힘이 생기지만 벽을 두껍게 만들어서 안정을 유지한다. 목조건축에 있어서는 보와 같은 수평재에 의해서 상부하중을 지지하는 데 대해, 아치는 압축력에 강한 석재나 벽돌의 특성을 살린 조적조의 본질적인 구조방법이라 할 수 있다. 아치 구조는 매우 오래 전부터 이용된 구조형식의 하나로, 건축물에 있어서는 극장, 공연장 등 건축물의 지붕구조로 이용되고 있으며, 교량에 있어서는 부재의 단면을 줄일 수 있다는 점과, 독특한 곡선의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많이 사용되고 있다. 벽돌이나 돌을 가공한 블록으로 구성된 아치가 보형식보다 큰 공간을 걸칠 수 있는 것은 벽돌이나 돌은 자중도 무거우므로 아치에 작용하는 힘은 아치축에 따라 지반에 전달되어 아치를 구성하는 각 블록에는 서로 미는 법밖에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년에는 차량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져서 그 이동에 의해 아치의 일부에 인장력도 작용하게 되었으므로 한편에서는 될 수 있으면 인장력이 생기지 않는 아치축을 연구함과 동시에 19세기경부터는 새로이 개발된 주철, 연철 등의 재료를 사용하게 되었다. 근년에는 철근콘크리트구조나 강구조의 아치가 석조, 벽돌조에 대신하여 주체를 이루게 되었다. 모양에 따라 평아치, 반원아치, 결원아치, 타원아치, 말굽아치 등이 있다.?트러스 구조보 형식에서는 하중이 걸리면 보의 윗부분은 서로 밀고 아랫부분은 서로 당겨서 보가 휜다. 이때 보를 구부리는 힘은 상?하단이 가장 크고 중간은 작다. 즉, 보의 중간에는 아직 여력 또는 낭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낭비 부분을 빼는 것이 좋다. 또 보에 기둥을 세우고 선을 치서 보를 보강해서 커다란 지간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보를 보강해서 낭비를 없애려는 것이 트러스의 시초이다. 곧은 막대를 조합해서 만든 삼각형은 안정된 형태이지만, 사각형은 변형하기 쉬우므로 보의 중간을 도려내어 생긴 형태인 삼각형이 좋다. 즉, 트러스란 곧은 강재나 목재를 삼각형을 기본으로 그물 모양으로 짜서 하중을 지탱하는 구조방법으로, 부재의 결합점은 사람의 관절처럼 자유롭게 회전할 수 있고, 또 하중도 절점에 작용하도록 공작되어 있으므로 트러스의 부재는 인장력이 작용하는 것과 미는 힘이 작용하는 것뿐이며 휘는 경우는 없으므로 재료의 낭비가 적다. 또 짧은 막대를 조합해서 지간이 큰 공간을 걸치는 이점도 있다. 트러스를 용도별로 구분하면 교량트러스·지붕트러스·마루귀틀트러스·지주트러스 등이 있다. 입체적으로 조립된 것과 평면적으로 조립된 것으로 구분되어 각기 입체트러스·평면트러스라 한다. 그러나 설계하기 편리하다는 면에서 입체트러스를 몇 개의 평면트러스로 나누어서 생각하는 경우도 많으며, 트러스교도 보통 이와 같이 생각해서 설계하고 있다. 평면트러스에는 그 부재를 조립하는 방법에 따라 프랫 트러스, 워런 트러스, 하우 트러스 등이 있으며, 공장 건축 구조물 등의 지붕뼈대 구조로서는 킹 포스트 트러스, 핑크 트러스 등이 자주 쓰인다. 또 지간이 짧은 트러스교는 그 높이가 낮아도 되므로 위쪽이 개방된 교량이 된다.워런 트러스하우 트러스프렛 트러스(직현)프렛 트러스(곡현)핑크 트러스K 트러스수직재가 있는 워런 트러스지붕 트러스여러 가지 형식의 트러스현수구조현수구조는 수직하중을 지반에 전달하는 기둥과 로프, 와이어와 같은 케이블로 구성되는데, 프리스트레스되고 3차원적으로 만곡된 편평한 하중을 가진 구조물들과는 달리 현수 지붕은 보통 한 방향으로만 만곡된 구조로서 프리스트레스 없이 자중으로서 안정된다. 이 지붕면 곡선은 우세한 조건으로 자체적 질서를 따라 형성된다. 현수구조는 지붕면의 경사로 인한 충분한 자중이나 프리스트레스 인장력으로 안정될 수 있다. 이러한 현수구조는 현대에 와서 현실화된 구조시스템이 아니다. 기원 전 8000년 무렵부터 유목민에 의해 텐트구조와 함께 사용되었다. 그들은 유랑생활을 했기 때문에 조립식 주거공간이 필요했고 자신들의 주거공간을 빠른 기간 내에 설치하고 철거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중심 폴을 지반에 정착시키고 대나무나 로프에 의해 동물가죽으로 된 천막을 지지했다. 이렇게 시작된 현수구조는 돛을 가진 배에 이용되었고, 특히 교량에서는 현수구조를 채택함으로써 최고 2000m에 가까운 장스팬의 시대를 맞고 있다. 현수구조가 장스팬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케이블이 전단력과 휨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 인장력만을 부담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자연스럽게 터득한 것으로 나무가지를 꺾을 때 끌어당겨서 뽑지 않고 구부려서 꺾게 된다. 잡아당겨 뜯는 데는 꺾을 때보다 수십 배, 수백 배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1톤의 중량을 원형단면 길이 10m의 단순보의 중앙에 작용시킨다면, 그것을 매다는 데에 필요한 원형봉의 약 40배의 단면적을 필요로 하게 된다. 따라서 강도 면에서 현수구조는 상당히 이상적인 구조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가장 간단한 케이블 지붕은 휨에 저항할 수 있는 기둥과 케이블로 구성되며 케이블은 보나 건물과 같은 구조 요소를 지지하기 위한 인장기둥이나 현수부재로 사용된다. 케이블 지지구조에서 바닥은 풍하중과 출렁임에 의해 발생되는 상승력에 저항하기 위해 최소한의 자중이 필요하고 케이블의 수평력은 지붕보에 압축력으로 전달되고 자중으로 발생하는 높은 휨모멘트를 지지한다. 현수구조를 적용하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탑 모양의 기둥을 세워서 플랫에 조립된 평행현 트러스의 지붕을 사장교와 같이 케이블로 매다는 방식이다. 이때의 케이블은 보조적인 역할을 하고 트러스 보나 기둥이 주요 구조부재가 된다. 그리고 케이블 자체를 지붕의 주요 구조부재로 하여 막이나 패널로 피복하는 방식이 있다. 이 때 막재료에 강도를 분담시키지 않는 것 때문에 막구조와는 구별된다.공기막 구조공기압을 이용하여 막면의 장력을 안정화시켜 눈이나 바람 등의 외력에 견딜 수 있도록 한 구조이다. 공기막 구조에서는 외기압보다 조금 높은 기압(1/1,000~1/100기압 정도)을 막내에 줌으로서 막은 자립하고, 각종의 외부하중에 잘 견딘다. 공기는 막내에 지속적으로 소량을 보내든지 또는 단속적으로 보내든지 한다. 이 경우 막 자체는 인장을 받을 뿐이다. 단위 평면막의 자중을 g라 할 때, 그것과 동일한 반대방향의 힘, 즉 양력이 있으면, 단위 평면막은 공중에서 정지하게 된다. 이것이 공기막 구조의 원리이다. 공기막 구조는 공기를 폐쇄시키는 방법에 따라 단일막 구조와 이중막 구조로 분류된다. 단일막 구조는 바닥에 막을 펴고 바닥과 막 사이에 공기를 넣은 것으로, 돔 모양의 것을 에어돔이라 한다. 이 방법은 가장 일반적이며, 대규모의 구조물을 가능하게 한다. 단일막 구조에서는 건물 내외의 기압차를 유지해야 되기 때문에 큰 개구부를 설치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폐쇄형의 내부공간이 되며, 온실·전시장·홀 등의 지붕으로 이용된다. 입구는 출입에 의해서 내압이 약간 내려가므로 에어로크, 이중문, 회전문 등을 사용해야 한다. 또한 내부공간에서 사람이 활동하게 되므로 고압이면 안된다. 이중막 구조는 막으로 공기를 싸 넣은 방식이며, 공기의 기밀성은 막으로 유지된다. 따라서 막구조가 구조물의 부품의 성격을 띠며, 용도에 따라 형태를 택할 수 있다. 이중막 구조는 개방적인 공간을 필요로 하는 구조체에 이용되며, 창고·공장·차고 등의 용도에 쓰인다. 이중으로 친 막 사이에 공기를 보내서, 공기베게처럼 만드는 것으로 막의 사이에는 일중막 구조보다 조금 높은 압력을 가할 수 있다. 이것에 의해서 강성 높은 판넬과 같은 막을 얻을 수 있고, 전체로서 휨에도 저항할 수 있다. 또한, 일중막 구조처럼 입구에 어떤 제한이 가해지는 것과 달리 오픈 시스템으로 할 수 있다. 그러나 막을 지지하는 기둥은 필요하다. 이러한 공기압에 의한 구조물의 시도는 18세기 후반 열기구의 연구에서 비롯되었으며, 비행선도 이중막 구조의 이용이다. 본격적인 건물에의 적용은 1957년 풀장용의 에어돔이 시초이다. 막은 인장력을 전하며, 압축력을 받으면 오므라들어 힘의 전달능력을 잃는다. 즉, 막면에는 인장응력은 존재하나 압축응력
    공학/기술| 2005.05.12| 4페이지| 1,000원| 조회(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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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왕망의 개혁정치와 그 의의
    왕망의 개혁정치와 그 의의Ⅰ. 서 론A.D 8년 漢의 외척이었던 왕망(王莽)은 왕위를 찬탈,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新을 건국하였다. 신의 건국을 기점으로 인해 한은 전한과 후한으로 나누어 불리게 되었다.왕망이 등극하였을 당시의 한은 왕조 말기적 현상을 노출하여 경제는 호족과 대상인 등에 집중되어 정체상태에 빠지고 일반 백성들은 빈곤과 고통 속에 있었으므로 사회의 불안은 극도에 달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왕망은 그의 유교적 이상국가상을 바탕으로 정치, 사회, 경제 각 분야에서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왕망은 유교적 이상국가란 이미 주나라 때 실시되었던 것이라 믿었고 모든 것을 주나라의 제도로 복귀시킴으로써 기존 문제들이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그에 따라 관제가 바뀌고, 관명, 지명 등이 변경되었다. 뒤를 이어 왕망은 전국의 토지를 왕전(王田)이라 하고 토지매매를 허용하지 않았으며, 노비 매매를 금지하였다. 또한 물가를 안정시키고 화폐제도를 개혁하고자 하였다.물론 왕망의 개혁정책은 실패로 끝나고, 新나라도 15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지만 그의 개혁정책은 중국사에 있어서 중요한 시도로 평가받고 있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왕망의 사회경제정책에 대해 일부 학자는 사회주의사상으로 파악하려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왕망의 개혁정책에 대해서, 그것의 내용과 한계, 그리고 의의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Ⅱ. 본 론한 무제 통치시기 사회ㆍ경제의 발전이 높은 수준에 달하였지만 한편으로는 호족의 토지겸병과 재산축적은 농민들을 압박하였다. 또한 무제의 대원정은 풍부했던 국가의 재정을 소진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무제 전기 도처에서 농민폭동이 발생하고, 이후 농민봉기가 자주 발생하면서 유민의 수는 늘어만 갔다.무제는 처음에는 농민봉기에 무력을 동원해 강경하게 진압했으나 농민이 점차 강력하게 나오자 진압만으로는 무리라고 느끼고 세금을 줄이고 농업생산을 장려하는 정책을 펼쳤다. 무제의 뒤를 이은 선제때도 이를 계속 실시하여 통치가 상대적으로 안정되었다. 하지만 이미은 심하였고, 원제, 성제를 거치며 한은 점차 붕괴과정으로 나아갔다. 경제적 문제와 더불어 정치면에서도 조정의 권력은 점차 외척과 환관에 의해 좌우되었다.외척 중용은 원래 한조의 일관된 전통으로 유방의 집권 때부터 외척세력은 크게 성장하였다. 왕망은 실권을 잡자 한실의 종족 및 공신의 후예에 대하여 작위를 수여하고, 연로하여 관직에서 물러난 관리에게는 종신토록 봉록을 주었다. 또한 토지를 빈민에게 나누어주는 태도로 민심을 수습하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각지에서 왕망의 공덕을 칭송하는 상서를 올리고 한은 천명을 다했으니 왕망이 천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후 그는 평제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신(新)이라 하였다.(1) 토지국유화기존 한대의 토지는 소유권에 따라 황제 또는 정부에 직속되는 공전과 일반민의 소유에 귀속되는 사전으로 구분될 수 있다. 그런데 사전은 서로 대여하는 것이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자유로이 매매하는 것도 허용되었다. 따라서 사전매매에 의한 호족세력과 대상인들의 대토지 소유가 점차 증가하였으며 이것은 점차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었다. 토지집중이 확대되면 될수록 대토지 소유자의 장원경영은 일반화된 반면 많은 농민은 토지를 잃고 장원에 예속된 노비로 전락하여 갔으며 국가의 조세수입도 감소되어 갔던 것이다.이에 따라 왕망은 천하의 토지를 고쳐 왕전이라 하고 매매를 금지하였다. 이른바 왕전제란 주의 정전제를 모범으로 삼아 모든 토지를 왕전, 즉 국가의 소유로 하여 매매를 금지하고, 백성들에게 토지를 고르게 분배하는 것이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이를 두고 토지국유제에 근거한 사회주의 실현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다. 왕망의 왕전은 사실 일반민을 위한, 인심수렴을 위한 토지개혁으로서의 목적과 함께 국가재정수입확충의 목적도 강했다. 왕망이 세력가들의 반발 등 위험을 감수하고서까지 고대의 정전제 개념을 끌어와 토지개혁을 실시한 것 이면에는 이러한 국가의 빈약한 재정수입의 확충이라는 현실적 요구가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이미 호족출신의 자료로서 그 기반을 확고히 하고 있었고 지방에 확대된 호족의 세력도 확고하였기에 단순히 중앙의 명령과 법령만으로는 토지개혁이 제대로 추진될 수 없었다. 따라서 정전제를 모델로 한 토지개혁은 그 시행령이 내린 지 3년 만에 폐지되고 말았다.(2) 사속제(私屬制)한대의 노비에는 관노비와 사노비의 두 종류가 있었다. 관노비는 정부에 소속된 것이고 이와 달리 사노비는 가사노역에 사용되거나 농경노비로서 생산에 종사하였다. 왕망은 토지겸병문제와 마찬가지로 사노비매매도 빈부격차를 야기 시키는 사회적인 문제라 여기고 이를 개혁하고자 하였다.왕망이 문제삼은 것은 바로 사유노비로서 관노비에 관한 언급이 없었고 또 왕망이 유교교리를 인용하여 오직 노비는 정부만을 위해서 법제화될 수 있으며 정부의 형벌노비를 제외하고는 노비란 있을 수 없다 고 한 것으로 보아 사속은 곧 사노비를 고쳐 부르게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왕망의 사속은 신분자체의 해방을 뜻하는 게 아니라 그의 토지국유화정책과 연계된 것으로 사유노비를 사속으로 개칭함으로써 주인과의 신분적 예속관계에서 고용관계로 전환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했다.그러나 일단 노비문제는 주로 지주가 무제한으로 토지를 소유함으로써 관련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토지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노비매매를 완전히 금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또한 노비의 자유로운 매매가 이미 오랜 습관이 되어왔기 때문에 일반민은 관념상 노비제도의 부당함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왕망이 엄형으로 이를 강제하여 했지만 왕전의 매매를 허락할 때 함께 금령을 철회하고 말았다.(3) 육관(六 ) 설치왕망이 왕전, 사속정책과 함께 그 후속으로 실시한 또 하나의 사회ㆍ경제혁명 정책의 하나가 이른바 육관정책이다. 육관정책은 소금, 철, 술 등을 국가가 관리하고 통제하는 국영사업이었다. 이들은모두 서민생활에 필수적인 것이지만 민간의 단독사업이 불가능한 것으로 본질적으로 육관정책은 서민생활을 보호하는데 목적이 있었다.하지만 실제 운영은 그렇지 못하여 결과적으로 상공업의 이윤을 국가가 독차한 육관의 시행과정에서 인위적인 통제수단의 하나로 경제에 능통한 상인출신의 관리를 채용하였고, 그들이 쉽게 왕망의 정치세력으로 연결되어 이를 사리사욕 추구의 기회로 역용하는데 이용되었다.결국 육관정책은 결과적으로는 인심수렴을 표방한 실리정책 즉 재정확보의 의도였으나 실리를 얻지 못하였다.(4) 화폐개혁왕망의 화폐개혁은 토지개혁이 있기 전에 시작되었다. 1차 화폐개혁에서 왕망은 한대 유통화폐인 오수전 외에 대전, 착도, 계도 등 3종의 화폐를 더 주조하여 병용토록 하였다. 이는 주대의 화폐 단위 명이 하나가 아닌 두 가지였음을 표방한 것이고, 또 한대는 여행자의 편익을 위해서 크기가 큰 동전일수록 가치가 떨어진 점을 이용하였다. 또한 화폐개혁을 통해 황금의 국외유출을 막고, 당시 사회, 경제상의 문제들을 해결하려 하였다. 즉 무제 이후 서방교역이 성하게 되면서 동전에 대한 보조화폐 역할을 한 황금이 크게 유출되어 통화부족에 의한 불황이 계속되어 왔는데, 왕망은 각종 새로운 화폐들을 발행함으로써 이를 극복하고 호경기를 일으키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험은 성공하기가 어려웠다. 구전을 완전히 거두어들이지 않고 대전을 발행하면서 각 물품의 중량과 실재가치를 서로 같은 비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왕망의 제2차 화폐개혁은 앞의 착도, 계도와 함께 오수전까지 폐지하였고 새로운 소전을 오수전으로 대신하려고 하였다. 또 3차 개혁에서는 금, 은, 귀갑, 패, 동 등 5가지를 재료로 한 6가지 형식에 28종의 화폐를 대전, 소전과 함께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많은 종류의 화폐는 화폐제도를 혼란케 하여 대단히 불편하였으며 통화팽창을 조장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번잡하고 가치가 없는 신화폐 대신에 여전히 오수전을 사용하여 교역하였다. 하지만 왕망은 이러한 상황을 화폐제도 자체의 모순에서 개선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백성들에게 강박하여 그의 화폐정책을 강행하려 하였다. 또한 4차 개혁에서는 왕망은 구 화폐를 모두 폐지하고 화포, 화천 2가지를 사용하게 하는 등 화폐백성의 파산을 가속화하였고 이에 백성의 고통과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었던 것이다.왕망의 현실과 유리된 과도한 개혁정책은 결과적으로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키게 되었다. 이들 정책의 실패는 모든 계층의 반발을 초래했기 때문에 민심이 등을 돌리고 마침내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이미 왕망이 섭정하던 A.D 7년에 이미 수도 부근에서 조명, 곽홍이 반란을 일으켰다. 또한 A.D 14년 여모가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반란의 소용돌이 속에 신왕조에 결정적 타격을 입힌 것은 녹림·적미의 난이었다. 녹림의 난은 A.D 17년 양자강 중류의 형주지역에서 계속 재해가 일어나자 왕광과 왕봉을 수령으로 추대하여 수백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수개월 사이에 7∼8천명으로 확대되어 녹림산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에 녹림군이라 하였다. 또한 이듬해 18년에는 산동 낭야에서 기아에 굶주린 농민들이 번숭을 수령으로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눈썹을 붉게 칠했기 때문에 적미군이라 하였다. 이처럼 전국각지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나자 각 지방호족이나 지주들도 각자 자위를 위해 무장하였는데 그들 중 일부는 반란군과 협력하여 왕망 정권을 타도하고자 거병한 세력도 있었다. 이들 중 특히 유인·유수 형제가 중심이 된 남양의 유씨 일족은 한왕조와 혈연관계를 강조하면서 녹림군과 연합하여 10만여명의 세력으로 확대되자 지도권을 장악하고 일족 중 유현을 옹립하였다. 유현은 유수를 하북평정을 위해 파견하고, 장안을 공격하였다. 장안성내의 시민들도 반란군에 호응하여 신(新)왕조는 15년 간의 단명으로 23년 10월에 멸망하였다. 그러나 이후 반란군 내부에서 농민군과 호족세력간에 세력다툼이 일어나 한때 유현집단에 복속되었던 적미군이 다시 독립된 세력으로 성장하여 장안으로 진격하여 유현을 죽이고 정권을 탈취하였다. 이때 하북일대를 석권하던 유수는 25년 6월 장수들에게 추대되어 황위에 올라 연호를 건무(建武)라 정하고 적미군을 괴멸시키고(27년), 최후까지 남아있던 공손술 정권을 평정하여 36년 드디어 다.
    인문/어학| 2003.12.25| 6페이지| 1,000원| 조회(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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