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족보에도 가짜가 있나요? *족보란 특정 성씨의 시조부터 편찬당대인에 이르기까지의 계보를 기록한 것으로, 세보라고도 하였다. 족보를 보면 흔히들 신라 왕실이나 고려시대 유명한 인물의 후손이거나 중국인을 시조로 둔 가문임을 발견한다. 그러나 족보를 있는 그대로 다 믿을 수는 없다. 족보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하게 꾸며진 것일 수도 있거니와 정작 족보상의 시조와 자신은 혈연적인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족보가 본격적으로 출현한 것은 조선시대로, 먼저 왕실의 위계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족보를 편찬하기 시작했으며 이어 양반 사대부가로 퍼져갔다. 족보는 조상을 숭배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으며 혈연적인 결속력을 강화하는 한편, 하층민과의 차별성을 과시할 수 있었다.또한 족보는 철저히 남성중심의 기록물이다. 조선시대의 여자들은 이름이 없었을 뿐더러 딸의 이름은 사위의 이름으로, 주인의 경우에는 친정의 성관과 부친 및 가문의 이름난 조상이 기록될 뿐이었다. 조선전기의 사회는 유교의 종법적인 가족제도가 정착되지 않아 족보상에 아들과 딸, 친손과 외손이 동일하게 수록되어 온갖 성씨가 망라되었다. 그러나 17세기를 전후하여 아버지의 혈통을 중심으로 하는 친족제도가 확립되어 오늘날의 족보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상민과 천민들은 그들 자신의 족보를 갖지 못했다. 이들은 시조로 삼을 만한 인물은 물론이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들은 또 족보를 만들 수 있는 경제적인 기반도, 동족의 혈연적인 기반도 갖추지 못하였다. 더욱이 이들이 족보를 가지려고 하는 것은 양반이 되기 위한 것이지 그들의 진정한 뿌리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정에서 이들이 가질 수 있는 족보란 혈연적으로 무관한 남의 족보, 즉 가짜 족보일 수밖에 없었다. 족보는 양반의 소유물이었고 족보를 가진다는 것은 곧 양반이 됨을 의미하였다. 상민들이 군역을 면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다름 사람으로 바꾸어 버리거나 족보를 위장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되었다.가짜 족보를 필요로 하였던 것은 하층민만이 아니었다. 더 훌륭한 가문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싶었던 양반의 경우에도 가짜 족보는 필요하였다. 양반에도 격이 있었다. 따라서 낮은 양반은 높은 양반을, 높은 양반은 더 높은 문벌가문이 되길 원했고 조상의 계보를 조작, 윤색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양반이 아니고는, 문벌이 아니고서는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는 사회, 개인의 능력이 아닌 가문의 높낮이가 우선시되는 사회에서 가짜 족보란 필연적인 소산물이었다.감상오늘날은 가문이나 혈통이 그리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회는 아니지만 자신의 본관을 밝히고 말해야하는 상황이 많이 발생한다. 그럴 때마다 소위 좋은 성씨는 자신 있게 밝히곤 하지만 그것이 대부분 위조 족보라고 하니 흥미롭다. 오늘날 김, 이, 박 등의 흔한 성씨들이 혈통이 좋아 자손을 많이 낳은 게 아니라 조선시대 인구의 40%에 달하던 성씨 없는 사람들이 성씨를 갖게 되면서 유명가문의 족보에 편입을 시켜버린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자신의 조상 (뿌리)을 바꿔버리면서 까지 번듯한 족보가 필요 했는지, 다소 비굴하고 비도덕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한 신분사회 속에서 자신이 겪었던 천대와 핏줄, 신분의 차이로 인해 벗어날 수 없었던 인생의 굴레를 자신들의 후손에게 만큼은 물려주지 않으려던 조상들의 마지막 바람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심지에 현대사회에서도 소위 '천방지축마골피'라고 하면서 혈통의 천함을 이야기 하고, 또 은연중에 우리들 생각 속에 뼈대 있는 집안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는 것들이 전 근대적 발상이자 왜곡되었을지 알 수 없는 종이 한 장에 기인한 착각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조선시대 형벌제도는 어떠하였나 *조선시대에도 나름대로 엄격한 법집행과 형벌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형법은 주로 중국 명나라의 대명률을 이용하였다. 기본적으로 오형(五刑)이 있었는데 태형은 가장 가벼운 형벌이고 10대에서 50대까지 5등급이 있으며 장형은 태형보다 중한 벌로서 60대에서 100대까관아에 구금하여 두고 일정한 노역에 종사시키는 자유형의 일종이었다. 유형은 중죄를 범한 자에 대하여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어 죽을 때까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었다. 사형은 극형에 해당하는 것으로 신체를 온전한 상태로 두고 목을 졸라 죽이는 교형과 신체에서 머리를 잘라 죽이는 참형으로 나뉘며 참형 집행 후 위협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 죄수의 머리나 시체를 매달아 공중에게 전시하기도 하였다(효수).조선시대 정식 사법기구로는 중앙에 삼법사(형조- 일반 사법행정 및 상급심, 한성부, 사헌부), 의금부가 있었고 지방에서는 관찰사, 수령 등이 사법권을 가졌다. 또한 범죄자에 대한 판결이 나면 곧바로 형을 집행하였으므로 감옥은 단지 미결수들이 머무는 곳이었다.중죄인의 심문에 고문이 허용되었다. 형구로는 신장을 사용하였고 난장형이나 주리형 등의 고문을 당한 사람은 평생 불구가 되기도 한다. 신체형과 고문은 모든 신분에 적용된 것은 아니며 유교적 가치관과 신분제가 강력한 영향 미쳤다.18C 영·정조대에 이르러 형벌제도에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다. 신체에 대한 가혹한 고문이 금지되고 백성들을 불법적으로 처벌하는 것 통제하였으며 법전의 형법관련 내용을 정비하고 법률서적의 간행과 보급이 이루어졌다. 암행어사 임무 중 지방관의 형장사용과 법률 집행이 공정한가에 대한 사안을 중요시하게 여기게 되었고 세력 있는 자는 쇠가 무거워도 법망에서 빠져나가고 세력이 없는 자들은 비록 죄가 가벼워도 무거운 처벌을 받는 현상을 비판하기도 하였다.귀양살이로 잘 알고 있는 유배형은 해당 죄인을 비롯하여 그 친족으로 연좌된 경우나 공경대부,탐관오리 등에 다양하게 적용 되었다. 또한 학문, 사상적으로 주목되던 인물들이 정치적 대립 속에서 세력을 잃고 유배되어 그 곳에 독특한 유배문화를 남기기도 했다. 유배형에는 왕족이나 고위 관료들에 한해 유배지역 내의 일정한 장소를 지정하고 그곳에 유폐시키는 '안치'와 주위에 탱자나무를 심어 출입을 제한하는 '위리안치'가 있었다. 주요 유배지는 함경도, 평안유배자의 생활은 그 사람이나 귀양 간 지역에 따라 달랐으며 주로 고을 백성들이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에 유배자가 많은 곳은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감상법과 형벌은 인간이 문명을 가지고 계급적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 필수 불가결한 것처럼 여겨져 왔다. 그래서 그런지 사극이나 전근대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도 형벌장면이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되거나 귀양 가는 모습 등을 흔히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비록 조선시대는 근대로 접어드는 시기여서 형벌제도와 그 집행에 있어서도 체계를 갖추고 노력하였으나 우리가 현재 갖추고 있는 체제와는 많은 차이를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 이 일제 식민 지배를 겪는 등의 너무나 급격한 사회변동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발표를 준비하면서 나름대로 자료도 많이 찾아보았지만 개인적으로 고문에 대한 내용이 비민주적 정권이 집권하던 당시 빈번했던 고문사건들을 생각 하게 만들었다. 고문이라는 것이 죄를 범한 사람에게 처벌로 주어지는 죄 값이 아니라 죄를 지었을 것 같은 사람으로부터 자백을 받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만약 책에 나온 내용들처럼 지금도 고문이 법적으로 허용 된다면 우리는 언제 누명을 써 불구가 될지 모르는 위태롭고 무력한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돈 한 냥, 쌀 한 말, 베 한 필의 가치 *산업사회가 도래하기 전까지 농업은 경제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기본 산업이었다. 따라서 토지 생산성을 경제 발전의 지표가 될 수 있다. 조선시대의 토지 생산성 15세기 중엽 논 1결당 연 240말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당시는 정부 통제력 한계, 기술적 문제, 상인과 관리의 농간, 시장의 미성숙 등의 이유로 지방 사이에 되나 말의 용량차가 심했다. 20세기 초기의 토지생산성은 15세기 중엽의 두 배정도가 되었고 그 후로도 계속 상승하였다.오늘날 각 가정에서 소비하는 물자 중 스스로 만들어 직접 소비하는 경우는 극히 제한되어있어 심지어 농가도 소비 물자의 대부분을 시장에서 조달지만 전근대사회에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은 대부분 자급자족라, 교역이 확대되고 시장이 성장하였다. 그로 인하여 농가경영의 시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그 자급자족하는 몫은 줄어들었다.시장에서 교역이 확대됨에 따라 교환을 매개하는 수단이자 가치를 재는 척도의 기능을 담당하는 화폐가 출현 하였다. 우리나라는 전근대에 높은 수준의 문명에 도달하였으나 그에 비해 금속화폐의 보급은 늦은 편이었다. 이미 쌀과 삼베, 추포 등이 상품화폐로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 고려와 조선은 국가적으로 화폐 주조권을 장악하여 그에 따른 이익도 챙기고 부세의 체계적 징수를 도모하고자 금속화폐의 통용을 추진했었는데 실패로 돌아갔다. 그 이유는 물품화폐는 화폐이외에도 다양한 용도가 있었으나 금속화폐는 그렇지 못했으며 국가가 그 구매력을 보장하지 못해 민간이 불신했기 때문이다. 또한 시장경제의 기반이 취약했으며 동전의 원료인 동 생산의 부진도 그 저해 요인이었다. 조선전기 은화가 '돈'으로 인식되고는 있었으나 고액화폐였으므로 서민경제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다 17세기 이후 농업생산력과 인구의 증가, 시장의 성장 등을 배경으로 금속화폐가 널리 보급될 수 있었다.물가를 살펴보면 18세기 서울에서 쌀값의 평균적인 시세는 1섬에 5냥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농촌지역은 그보다 쌌다. 당시 5냥이면 오늘날의 10만원쯤에 해당한다. 1냥의 구매력은 현재 화폐로 2만원 정도 되는 셈이다. 동전이 많이 주조되던 시기에는 쌀값이 올라갔고, 주조가 중지되거나 충분히 주조되지 못하던 시기에는 쌀값이 내려갔다. 대체로 18세기에는 동전이 충분히 주조되지 못하여 전황현상이 지속되었는데, 19세기 후반 당백전과 당오전의 주조는 물가의 폭등을 낳아서 도시 서민의 경제생활을 악화시키고 국가 재정의 혼란을 초래하였다. 당시 쌀값의 장기적 변동은 주로 화폐 상황에 의하여 크게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인구와 소득의 변동, 생산조건의 변화 등도 물가에 영향을 주었을 터인데, 그 정확한 실상은 파악하기 어렵다. 당시 소득, 생산 등의 경제적 조건은 지금과 달리 완만히 변화하였으었다.
< 한국사의 이해 - 유적 답사 >>마지막 왕조, 그 기운이 서린경복궁과 덕수궁을 다녀와서한동안 화창한 가을 날씨의 연속인가 싶더니 답사 일정을 잡아놓은 주말이 가까워지자 하늘이 예사롭지 않았다. 전날 늦게까지 쏟아지던 비는 토요일 아침, 감사하게도 멎어 주었다. 하지만 잔뜩 찌푸린 하늘은 언제 비를 쏟을지 모르는 가운데 서울 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지하철 경복궁역에 도착하니 벽부터가 예사롭지 않게 꾸며져 있었다. 출구는 바로 경복궁과 연결되어 있어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토요일 오후라 경복궁은 사람들로 붐비는 듯 했다. 때마침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에서는 조선전기 수문장 교대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수문장 교대식이란 궁성문을 경비하는 부대와 궁성의 외곽을 경비하는 부대 간의 교대로, 외곽을 경비하는 부대가 도착하면 교대식이 실시되며 교대식의 신호는 구령, 깃발, 악기를 복합적으로 사용했다. 경비임무를 수행하고 교대군이 도착하면 임무를 인수인계 했다. 또한 정해진 절차와 신호에 따라 이뤄지며 부대 간 교대시 상호 예의를 갖춰 군례를 행했다. 조선시대 의복과 왕궁 수비의 모습을 볼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처음 가는 곳이고 생각보다 많은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어서 안내하는 분의 도움을 받았다. 흥례문에서 근정문으로 가는 길에 있는 금천위에 놓인 다리인 영재교의 다리발은 아치를 이루고 있었다. 지금은 흐르지 않는 금천은 명당수로서 그곳을 지나면서 속세의 나쁜 기운과 사사로움을 씻으라는 뜻이 담겨있고 해치와 현무조각상 또한 벽사의 기능을 담당한다고 했다. 근정문을 들어서자 웅장한 근정정이 눈앞에 나타났다. 근정전까지 이르는 길바닥은 가운데는 조금 높고 양가는 낮았다. 가운데의 길은 왕만이 지나 다녔으며 신하들은 양쪽의 낮은 길로 다녔다. 위계질서가 길에도 차이를 둘 정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길 양쪽에는 작은 돌조각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품계석이라고 했다.근정전은 문무백관의 조하(朝賀)를 비롯한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법전으로 태조 3년(1394년)에 창건하였다. 그후 임진왜란때 불탄것을 고종 4년(1867년)에 재건하였다.근정전을 돌아 들어가면 왕이 집무를 보던 사정전과 만춘전, 천추전이 나오는데 왕이 일상적인 업무를 보던 사무실 같은 것이고 신하가 함께 공부하면서 국정을 의논하는 것도 사정전에서 하였다. 특이한 점이라면 만춘전에는 굴뚝이 있지만 사정전에는 굴뚝이 없다. 만춘전과 천추전, 이 두 건물은 중심 편전인 사정전을 보좌하는 보조 편전들이다. 사정전과 달리 이들 건물에는 난방 시설이 되어 있었는데, 날씨가 추운 겨울이면 왕은 만춘전과 천추전에서 업무를 보았다.다음으로는 왕과 왕비의 거처를 살펴보았다. 먼저 강녕전은 왕의 침전이고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이다. 왕비의 침전(교태전)은 왕의 침전 바로 뒤에 있고 경복궁의 남북 중심축의 끝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경복궁 내에서 가장 여성스럽고 아름답게 지어졌다고 한다. 교태전은 1920년 일본인들에 의해 철거된 후 1995년 다시 복원된 건물이다. 다른 건물과 달리 강녕전과 교태전은 용마루가 없다. 왕이 용이기 때문에 강녕전이나 교태전은 다음 대를 이을 용(왕자)을 생산하는 곳이므로 용이 위에서 이 를 내리 누르면 안 되기 때문에 용마루를 설치하지 않았다고 한다.아미산은 교태전의 후원이다. 경회루 연못을 파낸 흙으로 쌓았다는 인조산을 계단식으로 꾸며낸 것으로 여러 가지 꽃과 괴석 등을 배치해 궁중여인들의 아기자기한 성품을 한눈에 느낄 수 있다. 아미산은 중국 유명한 산 이름인데 이산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교태전 후원의 이름을 아미산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또한 아미산에는 붉은 벽돌로 장식된 굴뚝 네 개가 배치되어 있는데 이 육각형 굴뚝들은 화단 앞에 있었던 교태전의 굴뚝이다. 연기가 땅을 지나 멀리 있는 굴뚝으로 나간다는 것이 신기했다.자선당은 세자의 침전으로, 자선이라는 뜻은 착한 품성을 기르라는 뜻으로써 세자가 어진 임금이 되기를 바라는 맘을 담아서 지은 이름이다. 자선당은 동궁 건물의 일부로서 세자의 공식 활동공간이며, 세자와 세자빈이 살던 집이다. 비현각은 그 부속건물이며 세자가 공부를 하던 곳이다. 안타깝게도 자선당은 이른바 "시정오년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열면서 다른 대부분의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동궁 일곽의 건물들과 함께 모두 헐어서 일본인들에게 팔아넘겨졌다고 한다. 이때 자선당은 일본인 오쿠라의 집 후원에 '조선관'이라는 이름을 달고 사설 박물관으로 있다가 관동대지진 때 무너지고 자선당의 주춧돌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 기단은 제대로 구실을 할 수없을 만큼 망가져 현재 건청궁터에 덩그러니 남겨져있었다.수정전은 왕이 책을 읽는 서재로 사용했다. 세종 때는 집현전으로 사용되어 이곳에서 훈민정음이 만들어졌다. 온돌방으로 되어 있으며 긴급회의를 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고종 때 세워졌다. 조선 후기에는 근대 개혁을 실시한 군국기무처 건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자경전은 교태전 동쪽 자미당 터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조대비(신정왕후)를 위하여 지은 것으로 준공 후 불이 나 고종 25년(1888)에 다시 완성한 것이 지금 남아 있는 일곽이다. 조대비가 머무르며 수렴청정을 한 역사적인 곳이며 경복궁에 존재하는 침전 건물로는 유일하게 그대로 남아 있는 건물이다. 또한 후원 원장에는 일부분을 굴뚝으로 만들어 십장생 무늬와 사군자 무늬 등을 배열하고 회를 발라 화면을 구성하고 있어 특이하다. 굴뚝 제일 아래 부분에는 좌우에 각각 해치(불을 먹어 화재예방을 의미함)를 전으로 만들어 배치하고 그 위에 장방형 공간에 십장생 문양과 연꽃, 국화, 난초, 포도, 대나무, 토끼 등을 조각 전으로 배열하여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거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자경전 담장 또한 붉은 벽돌로 길상문자와 고리무늬 등 갖가지 문양을 짜 맞추어 장식했으며 중간 중간에 꽃무늬 그림들을 넣었다. 담장에 새겨진 글자들은 만수무강이나 수복강녕을 기원하는 덕담을 새긴 것이고 석쇠처럼 싸여진 고리무늬는 온갖 악귀가 이곳에 걸려서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는 벽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경복궁에서 연회장소로 쓰이던 경회루는 국가 중요 연회나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곳이다. 태종때 지금과 같이 크게 준공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린 후 고종 대에 이르러 다시 재건되었다. 가장자리에 있는 기둥은 네모난 돌기둥이고 안쪽의 기둥은 둥근 기둥이다. 이것은 하늘과 땅, 음양의 기운을 상징한다고 한다. 전체의 넓이는 약 2백 81평가량이다. 이는 엄청나게 큰 규모로서 다락집 건축물로는 국내 최대 규모라고 한다.왕과 왕비가 휴식을 취하던 후원인 향정원은 향원정은 취로정이라 불리던 정자를 1873년 건청궁을 지을 때 수리 및 증축을 한 것이다. 보통 2층의 정자라고 알려져 있지만 누마루 밑의 구조까지 치면 3층의 건물이다. 향원정은 정육각형으로 지어졌고 아래, 윗층의 크기가 같다. 받침이 되는 바닥돌 기단 위에 육각형의 주춧돌이 있고, 그 위에 1,2층을 꿰뚫는 여섯 기둥을 세웠다. 향원정은 각 칸마다 예쁜 나무살 창들을 달아 멋을 냈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육각형의 지붕으로 올라가서 가운데 꼭대기에 추녀마루들이 모이는 곳에 절병통을 얹어 치장하였다. 수원(水原)은 북쪽 언덕 밑에서 솟아나는 지하수와 '열상진원(冽上眞源)'이란 샘물에서 유입된다. 열상진원의 특징은 먼저 조그만 수조에 물을 담았다가 휘돌아 나가도록 되어 있는데 이는 북악산의 차가운 물이 향원정으로 그대로 흘러 들어가서 물고기들이 놀라는 것을 막고 풍수지리에 따라 명당수가 서명당수가 서쪽에서 흘러 들어와 동쪽으로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그 지혜에 놀랐다.향원정 뒤에 있는 건청궁터는 건청궁은 고종이 거처하던 곳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발전기가 설치되기도 했으며 일본 폭도들이 왕비인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른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당시 시해 장소에 있던 전각이 헐려 없어지고 다만 '명성황후 조난지' 비석이 남아있다.경복궁을 나와 조선시대 이궁이자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때부터 경복궁 재건 전까지 약 270년 간 정궁의 역할을 대신했던 곳이기도 했던 창덕궁으로 향했다. 그러나 서울지리가 낯선 탓으로 한참을 가다가 보니 오히려 덕수궁으로 가까이 가고 있음을 알게 됐다. 본의 아니게 잘못 접어든 길이지만 덕수궁도 우리의 근현대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일단 먼저 들르기로 했다. 시청 앞 거리에서는 노동자시위가 있던 터라 길거리의 분위기가 다소 어수선 해 발길을 재촉했다.마침 하늘은 맑게 개고 늦가을 석양빛이 덕수궁 중화전의 용마루에 걸터앉았다. 덕수궁은 경복궁의 규모엔 미치지 못하지만은 파란만장하였던 한말 역사의 현장으로서 우리들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궁궐이라고 할 수 있다. 경복궁을 보고 바로 온 터라 관리가 많이 소홀해 보인다는 것과 왕이 거처하기엔 너무 협소해 보이는, 그래서 당시 우리나라의 처지가 느껴지는 듯 했다.덕수궁은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궁이 없어서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집에 임시 행궁을 마련했던 곳이다. 그 뒤 광해군은 창덕궁 복구공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이 곳에 머물다가 광해군 3년(1611) 10월에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광해군은 그 해 12월에 다시 경운궁으로 옮겨 창덕궁으로 이어하기까지 이 곳에 머물렀는데 이 시기에 경운궁은 처음으로 궁다운 체모를 갖추게 되었다. 고종이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아관으로 파천했다가 경복궁으로 가지 못하고 이곳으로 왔다.
* 교실이야기 1·2 내용 요약 *1. 학원폭력에 대한 연구학생과 교사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지도 모른다는 의견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를 교실에 설치해야했던 이유는 학원폭력이 은밀하게 행해지므로 이를 자세히 연구하기 위해서는 비디오 카메라로 그 현장을 포착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또한 무기명일지라도 자신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해 사실대로 진술하는 일이 쉽지 않으므로 설문조사가 신빙성이 낮은 것도 그 이유이다.2. 왕따와 학교폭력"집단따돌림이란 집단이 약한 학생을 놀리거나. 신체적으로 공격하는 행동, 그 중에서도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고 은밀히 가하는 수동적 폭력"이다. 왕따의 원래 정의는 집단에서 소외시키는 것, 조롱하고 언어적으로 공격을 가하는 수동적 공격으로 심한 신체적인 공격은 제외한다. 그러나 우리의 학교현장을 살펴보면 따돌림과 함께 신체적인 폭력이 가해진다. 여기서는 왕따란 집단 내에서 왕따로 지목되는 과정(명명화)과 그후에 이루어지는 괴롭힘 및 폭력의 피해로, 단순한 물리적 언어적 폭력은 직접적 폭력으로 나누어 연구하였다.3. 우리 사회의 왕따 문제우리 사회에서 왕따는 그 자신이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왕따는 사교성이 부족하고 모난 행동을 하거나 튀는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친구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람직하지 못한 몇 가지 행동 때문에 사실상 급우 전체가 그를 괴롭힌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 건전한 도덕관을 성숙시켜야 할 연령의 학생들이 불의에 수수방관하는 자세는 우리 사회를 삭막하게 만들고 우리의 미래가 절망적임을 시사한다. 따돌림에 대해서 방관하는 것은 일종의 책임회피이며 폭력을 조장하는 길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똑같은 범죄자라는 인식을 가져야 하며 왕따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잘못된 사회적 인식을 우리 사회에서 추방해야 한다. 왕따 가해자 또한 문제아이고 특히 왕따 가해를 방관하고 있는 친구들도 동조자이며 왕따 가해자는 물론 그에 동조하거나 수수방관하는 나머지 사람도 가해자다.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 철이를 못살해자 6명, 일반 가해자 15명을 구분해 내어 심층 면접하고 심리검사를 실시해서 이들의 성격 구조와 욕구구조를 알아보았다.1) 왕따 가해자9명의 왕따 가해자를 조사한 결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가 있었는데 그 첫째 유형은 '버림받은 아이들'이다. 이들은 부모가 없는 고아이거나 부모가 생존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사정상 이들을 보육원에 맡긴 경우이다. '버림받은 아이들'의 심리는 붐에 대한 강한 분노와 더불어 연민이 교차되는 양가감정이다. 물론 보호자가 없다는 데서 오는 불안과 버림받은 데서 오는 슬픔으로 인한 우울증도 이들에게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정서이다. 이는 수용시설아의 심리적 문제를 도와주는 사회 각계의 노력이 필요한데 자원봉사자들이 결성되어 이들을 보살펴 줄 필요가 있음을 말해 준다.두 번째 유형은 '학대받은 아이들'인데 이들은 부모가 생존해 있지만 부모간의 불화 또는 부모의 성격 탓으로 충분한 물질적 심리적 보호를 받지 못한 학생들이다.'학대받은 아이들'의 경우는 부모에 대한 강한 적개심과 더불어 친한 사람과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는 대인기피증이 특징적으로 타나난다. 아울러 이들은 타인에게 강한 공격성을 나타낸다.그와 반대로 나타나는 왕따 가해자의 세 번째 유형은 정상 가정 즉 중상류층 그리고 부모의 학력이 높은 가정에서 양육되었으나 본인의 성격 때문에 반사회적 성격으로 성장한 학생이다. 또한 그들의 이기적인 성격이 친구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그리고 종국에는 왕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친구를 가해하는 문제아로 성장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마지막 유형은 왕따의 신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타인을 왕따시키는 즉'피해자 겸 가해자'라고 명명할 수 있는 특이한 유형이다. 즉 그 자신 왕따가 불쌍하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지만 자기가 살기 위해서 철이를 주도적으로 왕따시키는 ,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유형이다. 이 마지막 유형을 통해 우리는 왕따가 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왕따 가해자들는 이기적이고 잘난 척하고 모난 행동을 하기 쉽다. 또는 아동의 내성적 성격과 맞물려 친구로부터 얻어맞아도 반항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 친구들이 이러한 약점을 악용할 수도 있다.두 번째로 왕따는 영원하다는 것이다. 한번 왕따가 되면 그 꼬리표를 달고 성장하게 된다.셋째로 가정 불화는 왕따 가해자에게 많이 나타났지만 어떤 경우에는 반대로 아동을 왕따로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자녀와 부모와의 갈등이 왕따를 만들 수가 있는데 부모에 대한 분노, 적개심을 자기 내면에서 소화해야 하는 문제 때문에 위축되어있고 우울하기 때문에 친구들이 얕잡아 볼 수 있다.또 다른 공통점은 이들이 어떤 이유에서든지 반항을 하지 않고 폭력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로 이들이 체력적으로 열등하거나 학업성적도 불량해서 친구들로부터 멸시 당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왕따의 심리검사 결과를 보면 대부분이 우울하고 불안과 공포심이 많다. 이것은 친구들로부터 외면당하고 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3) 폭력적인 아이들이들은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었는데 네가지 유형 중 두 가지는 앞의 왕따 가해자와 같은 유형이다. 즉'버림받은 아이들'과 '학대받은 아이들'이 그것이다. 나머지 두 유형은 왕따 가해자 유형과는 다른 것으로,'훈육 부재'와 '체력 과시'이다.또한 이들은 왕따 가해자와 비슷한 점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왕따 가해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버림받은 아이들'과 '학대받은 아이들'에 속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따라서 버림받고 학대받은 아이들은 왕따 가해자가 되거나 일반 폭력학생이 될 소지가 높다. 왜 어떤 학생은 왕따 가해자가 되고 어떤 학생은 일반 폭력자로 변신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은 뚜렸한 원인을 찾을 수 가 없지만, 아마 이들은 왕따 가해도 하고 폭력도 병행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왕따 가해 학생이 아닌 일반 폭력 학생들에서만 특별하게 나타나는 가정적 특징이 있는데 부모로부터 신체적인 학대를 받는 것이다. 아울러 훈육 부재형에서 특히 불량한 형을 둔 경우들을 조사하고 폭력과 이들의 심리적 특성과의 관계를 분석한 양적 연구를 하였다.1) 왕따와 폭력의 유형별 성격차이각 유형에 따라 어떤 성격적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왕따의 네 유형과 폭력의 네 유형을 각각 독립변인으로 하고 상태불안, 특성불안, 충동성, 자존감, 자기 효능감, 문제해결능력, 도덕적 이탈을 종속변인으로 하는 일원변량 분석하였다. 그결과 상태불안은 왕따 피해자집단에서 높게 나왔고 특성불안은 폭력 가해 및 피해자 집단이 다른 집단보다 높았다. 자존감의 경우 왕따 피해자 집단이 가해자에 비해 자존심이 낮았으며 자아 효능감은 폭력 가해자 집단이 가장 낮았다. 문제해결 능력은 왕따 피해자와 폭력 가해자가 낮았으며 충동성과 도덕적 이탈에서는 폭력가해집단이 가장 높았다.2) 왕따와 폭력의 유형별 정서차이정서의 차이를 알아보기 위하여 불안 우울, 분노, 피로, 활력, 혼란, 정서적 고통을 변인으로 분석한 결과 왕따에서는 피해자가 가해자 및 일반집단보다는 자존감과 문제해결 능력이 낮고 화를 품고 있으며, 피로·우울하고 불안과 정서적 고통을 많이 느끼고 있다. 이 연구에서 폭력의 가해자는 왕따의 피해자가 가지고 있는 성격적·정서적 문제를 가진 것으로 나타나, 두 폭력 집단의 심리적 구조가 전혀 다름을 알 수 있다.3) 가해자와 피해자의 차이점왕따와 폭력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만을 추출하여 이를 종속변인으로, 성격·정서를 독립변인으로 하여 판별분석을 실시, 왕따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판별하기 위한 주요 예측 변인으로 나타난 것은 자존감(가↑), 특성불안(피↑), 상태불안(피↑), 피로(피↑), 불안(피↑), 자기 효능감(가↑), 우울(피↑)이며, 폭력에 있어서는 자기 효능감(피↑)과 충동성(가↑)만이 중요 예측변인으로 나타났다.4) 왕따 가해와 폭력 가해의 예측요인왕따와 폭력의 가해 정도가장 중요한 예측요인을 알아보기 위해 중다회귀분석을 실시한 결과 어머니의 학력(↑), 아버지의 학력(↓), 가정에서 폭행을 당한 정도(↑), 문제 친구의 수(↓)의 순서로 나타났다. 나타나 왕따 및 교실폭력이 동조에서 비롯됨을 보여준다.7. 응집력과 교실 폭력왕따 행위가 전혀 발견되지 않은 학급에서 응집력이 가장 높았으며, 왕따가 심한 학급에서는 응집력이 가장 낮게 나타나 두 변인이 부적 상관을 가진다.8. 학원 폭력의 예방학원폭력예방을 위해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캠페인 활동, 폭력예방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왕따 가해 및 피해집단을 대상으로 집단상담을 실시하면서, 심각한 학생은 따로 개인상담을 실시하였다.피해자는 왕따 당한 거에 대해 수치심을 갖는데, 집단상담을 통해 피해자가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 안도감을 갖는다. 또한 자기 문제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등 가해자 프로그램에 비해 더 성공적이었다. 가해자는 자신을 가해자로 인정하기 싫어하고 자존심이 부족하지 않으며 스스로도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러나 "분노" 성격차원과 "공격성"성격차원에서 프로그램을 받은 후에 의미 있게 상담참가자들의 분노와 공격성의 수준이 저하됨을 보여주었다.한편 학교폭력의 법적 중대성을 일깨워 주는 것도 학생들의 인식 변화에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철이를 왕따시킨 학생들에게 그들이 평소에 했던 행위를 비디오로 찍어서 재방영하여 철이와 가해자 집단을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대면시키는 것도 효과가 있었다.비밀리에 피해자를 도와주는 '엔젤'의 활동도 효과를 보였는데, 엔젤은 우선 학교성적이 우수하고 신체적으로 강건하며 급우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기가 있어야 하며 한 반에 한 명이 있기보다는 3명이 있었던 것이 더 효과적이었다. 폭력 피해자는 엔젤로부터 심리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급우들은 이들이 지속적으로 피해자를 돕는 것을 보고 더 이상 피해자를 괴롭히지 않았다.8. 학원 폭력의 해결 방안왕따 행위는 수면 이하로 잠적하고 왕따 피해자는 자신이 창피해서 부모나 교사에게 그 사실을 고백하지 않기 때문에 필요한 도움을 구할 수가 없고 따라서 그가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어렵다. 따라서 부모나 교사의 세심한 관찰이 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