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의 탄생친구가 이상한 자세를 하고 있는 남학생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책 표지를 보고 이게 무슨 그림이냐고 물었다. 100년 전 우리나라는 일본과 서구 열강의 침략에 노출되어 있었고 그 위기의식 때문에 근대화된 학교에서는 학생이 아니라 거의 군인을 양성했다. 건강한 체력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는 구호 아래 학교에서 가장 강조했던 것은 체조였고 표지의 그림은 체조를 하고 있는 그림이었던 것이다. 운동회는 군사훈련과 비슷했고 수학여행을 한번 가도 우리나라 국토를 밟으며 역사를 더듬는 것을 목적으로 했으며 건강한 젊은이가 되라고 조혼을 반대하며 성교육도 제대로 시켜주지 않았다. 새로운 학문을 하는 학생들도 자신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풍전등화의 조선을 구해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시간과 공간이 분할되어 인식되었고 새로운 서구문물이 쏟아져 들어왔다.우리나라에는 지금과 같은 학교가 언제 생겼을까? 아마 근대에 들어서 생겼을 것이라고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100년 전 학교의 풍경으로 본 근대의 일상 이라는 부제처럼 이 책은 지금과 같은 근대적인 학교의 면모를 갖추었던 100년 전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요즘 나오는 많은 근대 관련 서적들처럼 독립신문 등의 많은 텍스트를 바탕으로 그때의 학교 모습을 추적한다. 근대 한국의 중심에는 신학문을 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의 탄생을 더듬는 것은 곧 근대 한국의 일상을 더듬어보는 것과 같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시중에 나와 있는 많은 근대 서적들을 종합한 듯한 느낌이 든다. 입학부터 졸업까지 학생이 겪게 되는 과정들로 한 장 한 장을 구성했는데 2장 통학 길 에 나오는 기차 이야기는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 을, 5장 성교육 은 연애의 시대 를, 10장 학교의 안과 밖 은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 를 연상시켰다. 이미 근대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이 많을 수록 이 책에서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고 또 재미가 있을 것 같다.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EBS 책, 내게로 오다 라는 프로그램에서 진중권이 책 내용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을 때 나의 마음은 이미 인터넷에 들어가서 책을 주문하고 있었다. 사실 이 책은 10년 만에 미학오디세이 3권 을 내면서 미학오디세이를 완결하면서 그와 함께 냈던 미학오디세이 작가노트 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 소개를 보았던 그때 미학오디세이 작가노트 를 읽고 있었는데 참 통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밖에도 춤추는 죽음 , 앙겔루스노부스 같은 책을 읽었기 때문에 쉽게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었다. 진중권의 책들은 마치 연작소설 같다. 이 책을 쓰면서 그가 추구했듯이 그의 연구 성과들이 이리저리 꿰어 맞추어도 어딘가 상통하면서 발전해간다. 그의 글은 그저 글주변으로 순간적으로 내뱉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에게서 나온다는 것과, 그의 책은 곧 그라는 생각을 책을 읽는 내내 했다.책을 펼치고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끌었던 것은 빨주노초파남보 로 장이 나누어져 있던 것이었다. 진중권의 7가지 상상력 프로젝트이므로 색깔별로 각 주제를 나타내고 있다. 비선형, 순환성, 파편성, 중의성, 동감각, 형상문자, 단자론. 그리고 이 주제들에 따라 우연과 필연, 빛과 그림자, 숨바꼭질, 수수께끼, 사라짐의 미학, 순간에서 영원으로, 다이달로스의 꿈이라는 제목이 붙은 7개의 장들로 구성되어 있고, 각 주제에 맞는 놀이와 예술이 등장한다. 이미 미학오디세이 3권 및 작가노트 에서 익숙해진바 있는 주사위, 미로, 체스와 같은 놀이도 다시 만날 수 있다. 앞머리에서 상상력 혁명 이라는 글로 시작하여 마지막은 영원한 소년 이라는 글로 마무리하고 있다.창의력, 상상력이 중시되는 사회이다. 그것들이 고리타분한 상식을 깨고 허를 찌르곤 하는데 이 책도 그런 모습을 띠고 있다. 수록된 그림을 보다 보면 책을 돌려가면서 보아야할 때가 있다. 기차에서 책을 옆으로 돌리거나 뒤집으면서 그 부분을 읽고 있었는데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가 의아하게 쳐다보시는 것 같았다. 어렸을 때 생각했을 것 같은 흥미진진한 상상들이 예술작품이 되어 눈앞에 나타난다. 고대에는 신화적 상상력으로 그 후에는 자연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으로 근대에는 기계적 사고방식으로 현대에는 다시 상상력으로 돌아왔다. 그 상상력은 합리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기반으로 하는 것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상상력은 상상력일 뿐이었지만 지금은 상상력이 실현된다. 합리성의 결정체인 컴퓨터가 그것을 돕는다. 상상한 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던가. 지금 존재하는 것들은 언젠가 누군가가 상상했던 것이라고 했던가.
진중권이라는 글쓴이의 이름을 보며 책을 고르다가 춤추는 죽음 이라는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죽음은 움직이지 않는 이미지인데 춤을 춘다니 죽음이 춤을 춘다는 말의 뉘앙스가 묘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참 오래도 붙들고 읽어왔다. 자극적인 것을 즐기지도 않고 오싹하자고 공포물을 보지도 않는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오로지 저자가 진중권이기 때문이었고, 미학오디세이에서 느꼈듯이 이것이 진리인지 알 수 없고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많지만 어딘가 명쾌하고 논리적이어 보이는 그의 글에 다시 한 번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 문체에 빠져있을 때 옆에 있던 친구가 자극적인 그림 들을 찾아가며 책장을 넘기던 것이 기억난다. 이 책에 등장하는 그림들은 이해를 돕게 위한 부수적인 것이 아니다. 글과 동등하게 이야기한다. 그림 없이 글을 이해할 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표제 그대로 서양 미술에 나타난 죽음의 미학 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죽음을 다룬 그림들을 다루고 있고 우리가 죽음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만큼 끔찍한 묘사로 이루어진 그림도 많은데 막상 그림은 두려움이나 공포를 안겨주지 않는다. 이는 죽음이 그림 안에 들어있다는 자각 때문에 대상화 되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는 달리 어떤 시대에는 죽음이 두려움을 주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중세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를 따라오면서 죽음이 사람에 의해 통제되기도 하고 반대로 죽음이 사람에게 두려움을 안겨주기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죽음은 아직도 우리에게 필연적인 것이지만 행복 과 마찬가지로 마음먹기에 따라 희망을 줄 수도 있고 두려움을 줄 수도 있는 존재로 여길 수 있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같은 죽음을 다루었어도 먼 옛날 중세의 죽음에 대한 그림보다 현대의 죽음에 대한 그림이 더 큰 두려움을 주는 것은 그림 속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크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옛날에 죽음은 춤을 추었다. 죽음의 춤 이라는 제재는 이후의 많은 화가들에 의해 다시 그려지곤 했다. 우리가 알 듯 중세는 신의 시대이다. 죽음이 우리 의 죽음이었다는 것은 신의 시대에는 아직 공동체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신을 믿는 우리 는 천국에 갈 소망을 가지고 열심히 신을 섬김으로써 죽음을 통제할 수 있었다. 죽음은 두려움을 주는 대상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신을 열심히 믿은 우리 는 죽으면 대규모의 공동체적 심판을 받고 천국에 가서 신과 함께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초기 죽음의 춤 그림들에서 역시 죽음은 그다지 두려움을 주는 존재가 아닌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죽음은 산자들과 손을 맞잡고 원을 그리며 춤추면서 납골당으로 향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곤 했다.하지만 영원히 신의 시대 중세가 계속되지는 않았다. 부패한 중세가 고발되면서 르네상스 시대는 다가오고 있었다. 그림에서 묘사되던 공동체적 심판 은 점점 그 규모가 작아지더니 개인적 심판 으로 바뀌게 된다. 우리의 죽음이 아닌 나의 죽음 의 시대가 된 것이다. 슬슬 죽음은 두려움을 주는 존재로 바뀌게 된다. 임종, 심판, 벌 그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우리 가 아닌 나 가 된 것이다. 지옥에서 형벌 받는 모습, 혹은 땅에서 썩어가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트란지나 시체를 묘사한 마카브르, 해골, 거품과 같은 죽음의 어트리뷰트가 그림을 가득 채우곤 하는 바니타스는 언젠가 올 죽음을 항상 기억하며 선하게 살겠다는 다짐이나, 죽음과 심판에 대한 종교적인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고 그 심판에서 나의 삶의 행적에 따라 천국으로 갈지 지옥으로 갈지 결정되는 것이다. 이제는 아예 임종 때 천사와 악마가 이 영혼을 누가 어디로 데려갈 것인지를 두고 발밑에서 싸운다. 이렇게 죽음이 두려운 존재가 되자 죽음의 춤 에서의 죽음 역시 두려운 존재로 묘사되게 된다. 죽음은 다짜고짜 나의 개인적인 삶의 영역에 나를 데려가려고 찾아오는 것이다.종교로서 죽음을 통제할 수 없는 시대에 죽음은 양면성을 갖는다. 멀고도 가까운 죽음 ,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맞닿고, 성녀나 성인이 느끼는 엑스터시와 오르가슴이 동일시 되어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 죽음의 양면성은 떳떳이 부각되지 못한다. 그밖에도 과학이 발전하고 합리적 이성을 중시하게 되면서 해부학이 발전한다.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은 없다는 믿음이 신에 대한 믿음을 넘어서게 된 것이다. 알 수 있다는 것은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려운 죽음을 지연시키기 위해 죽음을 가져다주는 병에 대해 알고 싶어 하게 되었고 이는 해부학 열풍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해부학을 묘사한 그림에서조차 알고자하는 욕망만으로는 볼 수 없는 에로티시즘적 쾌감을 발견할 수 있다는데, 어느 부인의 시체를 해부하던 남자들의 끈적끈적한 눈빛을 기억해보니 과연 그렇다. 이렇게 죽음은 점점 아름다운 것이 되어간다. 죽음조차도 아름다운 것이 되어가는 낭만주의 시대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너의 죽음 이다. 죽음이 양면성을 갖게 되는 것은 예술가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죽음은 두려움을 주는 대상이었던 동시에 예술적 영감을 제공하는 뮤즈이기도 했다. 낭만주의 시대에는 그 예술적 영감이 두려움을 넘어섰다고 할 수 있겠다. 연인을 따라 죽는 장면을 보며 우리나라 근대의 신문을 장식하곤 했던 정사(情死) 를 떠올리게 된다. 사랑을 위해 죽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이 없는 시대, 로미오와 줄리엣을 떠올리면 이해가 될 것이다.죽음은 중세 초기에서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거치면서 공동체적인 성격에서 개인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죽음의 두려움은 개인이 감당해야하는 것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하지만 혁명과 1, 2차대전을 거치면서 그와 관련되어 묘사되는 죽음의 모습은 오히려 집단적인 것이 되어간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죽음의 모습은 전쟁과 관련된 것들이다. 혁명 때는 권력을 잡은 쪽이 옳은 쪽이 되었다. 권력을 잡으면 당한만큼 되갚아주었다. 어제는 죽이던 사람이 오늘은 죽게 되었다. 그들의 죽음을 통해 진리를 찾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진리를 찾으려는 노력이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와 닿았던 그림은 피카소가 그린 한국에서 일어난 학살 이다. 알몸으로 서있는 희생자들에게 강철을 두른 학살자들이 총구를 겨눈다. 우리나라 어디에선가 일어났을 사건이기 때문에 충격을 더해줄 것이다. 전쟁터에서의 죽음도 그렇지만 유태인 강제수용소에서 볼 수 있는 죽음이 집단적 죽음의 대표 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빼빼 마른 사람들이 피폐한 표정으로 죽어가는 곳, 죽었다고 인정된 사람들을 쌓아둔 곳에서는 탁 , 탁 하고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는 곳이다. 현대의 죽음은 이렇게도 절망적인 모습인데 저자는 이제는 죽음에 대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한다. 어쩌면 그 말이 가장 절망적인 것으로 다가와서, 정말이냐고 반문하고 싶어진다.
『무정』(한국문학- 이광수)장장 123장으로 이루어진 이광수의 첫 장편소설인 이 작품은 《매일신보》에 연재되어 당시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어떤 작가는 어렸을 때 ‘무정’을 보려고 매일 먼 곳까지 신문을 읽으러 갔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이제는 친일파 작가로 기억되는 이광수의 작품 『무정』이 지금도 읽히는 것은 비단 그 시대 사람들의 공감만 이끌어낸 것이 아니라 현대에도 어떤 시사점을 던져주기 때문일 것이다.소설의 제목 ‘무정(無情)’은 정이 없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이 단어는 영채에 대한 형식의 태도를 포괄하며 중요한 순간에 등장하곤 한다. 그러나 정작 이 작품의 키워드는 ‘깬 사람’이다. 이제는 고전으로 기억되는 작품답게 이 소설에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엿보인다. 문명, 개화된 사람들과 아직 비문명, 미개한 사람들이다. 그러한 사고방식은 이광수 개인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근대화되어야하는 시점, 특히 일제 강점기였던 그 시대에 힘으로 일본을 이길 수 없다면 실력을 쌓아서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여러 가지 형태로 지식인으로부터 민중에게까지 퍼져가고 있었다. 문명화는 시대적 요구였고 나름의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그 목적을 어디에 두느냐가 관건이었다. 주인공 형식은 '먼저 깬 사람’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리고 아직 깨지 못한 사람들을 보며 안타까워한다. 어린 상태를 벗어나고 싶어 하며 아직 어린 상태에 있는 사람을 어른으로 만들어주고 싶어 한다. 등장인물들이 마지막을 장식하는 다짐은 한 사회의 지식인으로서 아직 미개한 민중이 깨는 것을 돕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소설의 약점이 있다면 형식은 ‘모든 사람이 형제이며 평등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직 ‘깨지 못한 사람’을 자신의 아래에 두고 가르치고자 했다는 점이다.등장인물들 간의 관계를 보면 작가가 어떤 생각으로 이 소설을 썼는지 알 수 있다. 소설 전반에 걸쳐 가르치고 배우는 일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형식 자신의 직업이 교사이며, 선형과 순애의 가정교사를 하고 있다. 또 자신도 어렸을 때 박선생에게 배우며 도움을 받은 기억이 있다. 영채는 계월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뒷부분을 보면 영채는 병욱에게 배우게 된다.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가 시대적 구분으로 볼 때 근대를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는 아직 고전소설의 형태가 드러난다. 곳곳에 등장하는 ‘편집자적 논평’이나, 독자에게 직접 가르치듯 도덕적으로 이야기하는 문체는 판소리계 소설이 주축을 이루었던 고전소설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무정』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과도기에 발표된 소설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역시 작품 전체를 통해 이야기하고자하는 한 가지, 문명과 개화의 중요성을 작가가 작품을 통해 직접 실천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여기서 작가와 독자는 또 하나의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를 성립하게 된다.표면적인 주인공은 형식인 듯 보이지만 또 하나의 등장인물 영채에게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소설 전반을 통해 가장 큰 의식적 성장을 보인 사람이 영채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구하려고 기생이 된 자신 때문에 죽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형식을 지아비로 섬기리라고 맹목적으로 다짐한다. 그러나 영채가 순결을 잃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자살을 하러 가게 되는 기차 안에서 병욱을 만나게 된다. 병욱의 이야기를 들으며 영채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형식에 대한 자신의 마음에는 사랑이 없는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아버지의 뜻이라는 명목은 있었지만 결국 형식에게 기대 사는 삶을 꿈꾸었던 것이다. 병욱은 여성도 남성에게 순종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포함한 자신의 생각을 주장할 권리가 있음을 알려준다. 영채는 병욱을 만나 여성이 아닌 한명의 사람으로서 ‘깨게’ 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왕』(서양문학- 소포클레스)고대 희랍 비극의 대표적인 작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더욱 대중이 가까이 느낄 수 있도록 해 준 사람은 프로이트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정신분석학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서 고전 『오이디푸스 왕』을 끌어와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 내용은 작품의 내용에 부합한다. 작품에서 그랬던 것처럼 보통 어린 남자아이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어머니를 사랑하면서도 자신보다 힘이 센 아버지를 경쟁자로 생각한다. 그러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면 신경증이 발생한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이론이다. 이 작품이 고대부터 상연되면서 사람들에게 운명의 존재를 인식시켜 주었다면,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필두로 하는 무의식을 발견함으로써 근대 철학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이었던 ‘주체’를 해체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이 작품의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운명을 타고난다. 그의 아버지는 오이디푸스를 죽일 것을 명령하지만 불쌍히 여긴 하인은 그를 살려준다. 왕자로 성장하여 그 운명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지금의 아버지가 친아버지인 줄 알고 운명을 피하기 위해 성을 떠나 거리에서 한 노인을 만나 시비 끝에 죽이게 된다. 죽임을 당한 그 노인이 바로 오이디푸스의 친아버지였다. 테베에서 왕이 된 오이디푸스는 결국 자신의 친어머니 이오카스테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모든 사실이 밝혀지자 이오카스테는 자살하고 오이디푸스는 두 눈을 뽑는 등 이야기는 비극으로 치닫는다.운명이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가 두 눈을 뽑는 행위에는 분명히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의지대로 운명을 바꾸어보려 했지만 피하려하면 할수록 오이디푸스는 점점 더 운명으로 가까이 갔다. 오이디푸스가 운명을 알고도 성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친아버지를 죽이고 친어머니와 결혼을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운명을 피하려던 오이디푸스에게 그가 한 행위는 최선이었다. 인간에게는 운명을 바꾸고 싶은 의지가 있어도 바꿀만한 힘이 없다. 이러한 메시지를 담은 『오이디푸스 왕』이 오래도록 살아남아 고전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것은 그러한 사실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공감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극을 보고 있으면 하늘은 항상 인간에게 가혹한 운명만을 내리는 것 같아 보인다. 동양 철학에서는 ‘자연(自然)’이라는 말이 있다.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로서 ‘도(道)’내지는 ‘본체(本體)’ 등의 개념이 있는데 스스로 그러한 도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자연이고,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동양 철학을 신봉했더라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상상해본다. 일이 그렇게까지 비극으로 치닫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머리를 깎고 산 속으로 수행을 하러 들어갔을지도 모르겠다. 운명에 순응하는 심정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면 오히려 운명을 바꿀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인생을 어떻게 아는가? 인간에게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존재하는 것은 모르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삶에 대해 모르고 죽음에 대해 모른다. 끝없이 치달은 비극을 보고 싶지 않아 눈을 뽑는 것밖에는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이 가장 절망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