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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조선시대 농민의 경제생활 평가A+최고예요
    목차1.양반지주의 생활2.조선 초.중반기의 농민의 경제생활① 조선 초기 토지제도②농민의 경제생활3.16세기 농민의 부담① 수취제도의 문란4.수취제도의 개편①수취 제도의 개편 배경②전세제도의 개편③공납제도의 개편④군역제도의 개편5.조선 후기 농업 생산 증대와 경영 변화①자본주의 맹아②양반 지주의 농장 경영 변화③농업 생산력의 증대6.농촌 사회의 분화①광작 농업의 등장②지대의 변화③농민의 계층 분화④19세기 농민들의 고달픈 삶7.결론1.양반지주의 생활양반 소유의 토지는 비옥한 토지가 많은 삼남지방, 경상, 전라, 충청도 지역에 집중되었고 규모가 커서 농장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양반들은 이런 자기 소유의 토지를 자기 소유의 노비를 시켜 직접 경작하였다. 농장이 거주지에 위치하여 노비를 직접 거느리는 경우는 생산량 전액을 거두고, 거주지에서 먼 농장이라면 외거노비에게서 생산량의 1/2에 해당하는 지대와 별도의 노비신공을, 노비의 노동력만으로 경작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농장이라면 병작반수의 형태로 주변 농민에게 소작을 시켰다. 이 경우 1/2의 지대를 거두고 이중에서 조세를 납부하였다. 양반들의 농장은 15C 후반에 더욱 증가되었으며, 16C의 직전제 폐지 이후에는 지주. 전호제가 일반화 되었다. 양반들은 지주로서 경제적 풍요를 누린 것에 비해 농민들은 소작인(전호)으로 전락하는 것이 농촌사회의 일반적 경향이었다. 자영농민이라 할지라도 자기 토지에서의 소출만으로는 부족해 소작을 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농민의 몰락은 상대적으로 지주의 지위와 발언권을 더욱 상승시켜 당연히 양반 지주가 부담해야 하는 조세마저 소작농에게 전가하는 일이 일반화되어갔다.2.조선 초.중반기의 농민의 경제생활① 조선 초기 토지제도조선의 토지제도는 과전법(科田法)을 토대로 하였다. 과전법에 의해 관료들은 등급에 따라 일정한 토지를 국가로부터 지급받았으며, 퇴직자들도 별도로 정해진 바에 따라 토지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 토지를 실제로 경작한 사람들은 농민들이었고, 관료들은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의 발달로 생산력은 늘어났지만 농민들의 살림살이는 쉽게 개선되지 않았다.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자연재해. 고리대. 세금부담 등으로 자기 토지를 팔고 소작인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늘어 지주세는 점차 확대되어 갔다. 이들은 지대로 수확량의 1/2을 납부하는 외에도 지주의 조세를 대신 부담했고 종자 및 농기구도 구입해야 했다.경제적으로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농민들은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니는 유망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한 국가의 대책은 농민들의 최소한의 생활 보호책을 마련하는 것으로 빈민 구휼 제도 및 의료 시설 마련 등의 정책이 시행되었다. 또 다른 국가의 대책은 오가작통법. 호패법을 시행함으로써 강압적으로 농민의 유망을 막는 것이었다.국가가 농민의 세금으로 유지되는 것처럼 양반층의 생활 역시 농민들의 지대로 유지가 되었으므로 양반들도 농민의 유망을 막아야만 했다. 이에 양반층은 향약을 실시해 농민을 통제하고, 사창을 통해 농민을 보호하는 양면책으로 농촌사회를 안정시키려 했다.3.16세기 농민의 부담훈구파의 집권기인 15세기에는 농민들의 살림살이가 고려시대에 비해 다소 나아졌지만, 16세기에 들어서면서 몰락하는 농민이 다시 늘어났다. 16세기 농민 몰락의 원인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수취제도가 문란해짐에 따라서 농민의 세금 부담이 늘어나는등 폐단이 심해졌다. 둘째, 직전법 폐지 이후에 증가된 양반층의 토지 소유욕은 지주. 전호제를 일반화 시켰으므로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처럼 두 요인이 상호 작용을 하며 농민의 몰락을 가져왔으나, 자영 농민마저 몰락하게 한 것은 수취 제도의 문란 현상이었다.① 수취제도의 문란지주. 전호제가 일반화 되면서 조세와는 관련이 없어야 정상인 소작인에게 지주의 조세가 전가되었으므로 실제적으로 농민의 부담을 증가시켰다.(대다수의 농민은 소작농 아니면 자영과 소작을 겸한 상태로 소작농에 전가된 조세의 부담을 피하기 어려웠다.)국가의 수취 내용 중 16세기에 농민의 최고 부담이 되었던 것은 공납이었다. 세 완전 다르게 이자가 법으로 정해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고리대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본래의 수취제도가 문란해지고 환곡제 또한 변질되어 농민을 괴롭히는 시기가 16세기였다. 자영 농민들도 몰락하여 지주. 전호제 체제의 소작농(전호)로 전락하고 소작농은 다시 양반에게 지대로 생산량의 1/2을, 국가에는 무거워진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 이리하여 수취제도의 개편이 요구되게 되었다.4.수취제도의 개편①수취 제도의 개편 배경16세기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농촌사회는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더욱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전쟁에 질병. 기근까지 겹쳐 농촌 생활의 어려움은 극에 달했지만 양반 지배층은 정치적 다툼에 몰두해 민생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잘못하면 농민들의 대거 토지 이탈로 국가의 존재마저 위태로워지는 상황으로 떨어질 상황이었다. 이에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이 두 갈래로 나뉘어 모색되었다. 하나는 국가의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는 것으로 나타나 비변사의 기능 강화와 5군영. 속오군의 군사제도 정비가 이루어졌다. 다른 하나는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으로 수취제도의 개편으로 나타났다.지주. 전호제를 개혁해 농민들에게 토지를 소유하게 해서 지대의 부담을 없애는 것이 근본적인 개혁이 될 것이지만 그것은 양반층의 기득권을 무너뜨리는 것이므로 양반층이 지배층인 상황에서는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임시방편적인 전세. 공물. 군역의 제도 개편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이 수취제도의 개편 또한 궁극적으로 양반 지배 체제의 유지를 목표로 실시된 것이다.②전세제도의 개편농민 부담 경감으로 위한 수취 제도 개혁 방안 중 가장 먼저 실시된 것이 영정법이었다.영정법이란 해마다 풍흉에 따라서 세액이 달라지던 이전과는 달리 풍흉에 관계없이 1결당 4두로 고정되었다. 15세기 제정된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은 매우 번잡스러워 당시 제대로 운용되지 못하였고 16세기에는 거의 무시된 채 최저율의 세액이 적용되고 있었기에 폐지되었다. 그러나 겉은 성공스러워 보이는 영정법은 사실 농민일어나 조선 후기에는 군역만이 수취제도의 하나로 남게 되었다. 16세기에 시작된 군포 징수제는 군역의 부담 방식을 몸으로 떼우는 것에서 군포를 내는 것으로 바꿔 놓았으며 조선후기 5군영이 용병제를 기반으로 성립되면서 더욱 확산되어 갔다. 군포 징수 행정이 엉망이어서 군역 대상자인 농민 장정 한사람에게 여러 관청에서 군포를 요구해 이중. 삼중으로 부담하는 경우가 많고 소속기관에 따라 요구하는 군포의 양도 1년에 2필 혹은 3필로 달랐다. 이렇듯 폐단이 날로 심해져 영정법과 대동법으로 전세와 공납제도를 개편한 이후에 관심은 군역의 폐단을 시정하는 것에 모아져 그 결과 나타난 것이 균역법이었다.균역법이란 군역의 부담을 균등히 한다는 의미로 농민들의 부담을 절반으로 줄여 1년에 1필의 군포만 납부하게 하였다. 정부는 줄어든 군포의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종래 군역이 면제되었던 일부 상류 신분층에게도 선무군관이라는 이름으로 군포 1필을 부담시켰다. 그리고 지주에게서 토지 1결마다 미곡 2두를 결작이라는 명목으로 받아들였다. 이로써 농민의 부담은 줄이고 지배층인 양반층의 부담을 늘리는 조선 후기 수취 제도 개편의 일반 원칙에 합당한 것이었으나 역시 영정법 대동법처럼 농민생활 안정에 기여했으나 한계를 지닌 법이었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5.조선 후기 농업 생산 증대와 경영 변화①자본주의 맹아양 난 이후의 조선 후기 사회는 새로운 양상들이 나타나는 시기로 근대 태동기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나타났던 근대 지향적 변화를 선도했던 분야가 경제 부문이었다.근대의 경제적 특성은 자본주의가 발달한다는 점이다. 즉 자본주의 맹아(싹)가 나타나는 시기이다. 이런 근대를 지향하는 조선 후기의 변화를 일으킨 주도자는 바로 피지배층이었다. 농민들은 농업 생산력을 높이고 생산 양식을 변화시켜 삶의 여건을 개선해 나갔으며, 상공업자들은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생산 활동을 전개했다.② 양반 지주의 농장 경영 변화양반들은 양난 이후에도 개간과 매입 등의 방법을 통해 소유한 농장을 확대로 온전히 소작인의 몫으로 할 수 있었다. 이앙법의 보급은 농촌 경제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나 그것은 수리 시설의 발달이 뒷받침이 되어야만 했다. 당시 정부는 저수지를 만들고 보수하기도 했으나 가뭄의 피해를 우려하여 가급적 이앙법을 억제시켰다. 이에 대해 농민들은 정부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수리 시설을 확충하면서 이앙법을 계속 확산시켜 갔다.농민들은 주로 작은 규모의 보를 스스로의 힘으로 쌓아서 물을 확보하였다. 그리하여 18세기 말에는 크고 작은 저수지가 수천 개소에 이르렀다.조선후기에는 농기구도 개량되었다. 생산력의 정도는 농기구에 의해서도 좌우되었다. 18세기 이후에 철제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여러 가지 농기구가 제작되었다. 쟁기. 써레. 쇠스랑. 호미 등이 널리 사용되었다. 논농사에서는 소를 이용한 쟁기의 사용이 보편화되어 생산력이 보다 증대되었다. 이외에도 시비법이 농업 생산력 증대에 큰 역할을 하였다.한편 18세기에는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곡물. 면화. 채소. 담배. 약초 등 상품 작물의 재배를 통해 가계 수입을 증가시키려 했다. 특히 쌀의 상품화가 활발하였다. 쌀은 조선 후기에 주곡으로 자리 잡으면서 수요가 크게 늘어 장시에서 대량으로 거래되었다. 그에 따라 쌀의 수요가 늘면서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이 활발하였다. 생산력 증대를 위한 농법의 개선과 상품 작물의 재배는 스스로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농민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다시 상품 화폐 경제를 더욱 자극해 자본주의의 맹아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다.6.농촌 사회의 분화①광작 농업의 등장영농기술의 발달, 특히 모내기(이앙법)의 보급은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농업 경영 방식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노동력이 절감되어 1인당 경작 가능 면적이 넓어져 부지런한 일부 농민들은 경작지의 규모를 크게 확대하여 이른바 광작을 할 수 있게 되었다.농가의 경작 면적이 늘어나는 광작 농업이 발달하면서 농가의 소득은 당연히 늘어났다. 자작농의 경우는 물론 일부 소작농(전호)도었다.
    인문/어학| 2009.02.27| 10페이지| 3,000원| 조회(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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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문요약과제_[시장세분화의 기준 고객 상황의 연결] 요약
    -시장세분화의 기준 고객 상황의 연결-논문요약과제1.서언시장세분화에 있어 “사용상황(Usage situation)”에 대한 변수는 지금까지 간과되어 왔다. 이 논문은 사용상황을 시장세분화에 이용할 수 있는 일반화된 틀을 제시하고, 제품의 포지셔닝을 사용상황 또는 고객- 사용상황에 맞추어 행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타당할 뿐 아니라 실무적으로도 매우 유용함을 입증하고 있다. 시장은 사용상황에 의해서 세분화 될 수 있고 시장세분화의 접근법에는 고객과 소비상황을 모두 포괄하는 방법이 요구되어 진다. 고객-상황에 의한 시장세분화란 시장을 다양한 사용상황에 놓여있는 고객들로 집단 분류하는 것이다.2.고객-상황 시장세분화의 분석틀과 이론적 근거성분세분화 기법-1)이원변량 분석모델: 고객이 제품에 대해 평가한 값의 변량을 고객(person)효과, 제품(Object)효과 및 양자의 상호작용 효과(P*O Effect)로 분리하여 준다.즉, 고객이 어떤 제품을 평가할 때 그 평가가 고객의 특성, 제품의 특성 또는 양자가 결합할 때의 3자 중 어느것에 따라 변화하는가를 알려준다. 만약 P 또는 P*O 효과가 크면 고객의 특성에 기초한 시장세분화가 가능해진다. 2)3원 변량분석-이원변량 분석모델이 확장된것. 위의 두가지 변인에 상황(Situation) 이 부가. 이렇게 될 경우 상호작용 효과는 S*O, P*S, P*S*O로 증가된다.상황의 대표성에 관한 실험-어떤 집단은 똑같은 상황에서 다른 집단에 비해 다른 반응을 보인다면 고객 특성에 기초한 시장세분화를 시도해야 할것임: P또는 P*O효과. 반대로 고객 특성별로 반응에 차이가 없는 반면 상황에 따라 제품에 대한 반응이 변화한다면(S 또는 S*O효과), 상황특성에 기초한 시장세분화를 시도하여야 할것임. 또한 특정제품에 대한 반응이 상황과 고객 모두에 따라 변화를 보인다면 (즉 P*S 또는 P*S*O 효과) 고객-상황에 기초한 시장세분화가 시도되어져야 할 것이다. 시장세분화가 유용성을 가지려면 P, P*O, P*S,P*S*O 효과에 의해 포착된 제품 반응의 차이가 어떤 속성의 차이에 근거하고 있는가를 밝혀야 한다.고객-상황 시장세분화는 Lewin의 장의 이론과 현대 상호작용론에 그 이론적 근거를 갖는다. 이 이론들의 접근법은 인간의 동기, 의도, 행동은 상황과의 상호작용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 즉 인간의 반응은 인간과 상황의 함수 B=F(P*S)이다. 이 이론은 각 개인은 각각의 물리적이고 사회적인 환경을 다르게 받아들인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환경에 대한 개인의 주관적인 이해 방식이 소위 각자의 “생활공간(Life Space)”으로 불리며 각각의 생활공간이 갖는 상이성은 제품에 대한 효용함수를 다르게 하여 소비행동 또한 달라지게 한다.고객이 인식하고 있는 사용상황이 각자의 소비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미시경제학의 관점에서 본 표준수요 곡선은 개별 수요곡선의 총합으로 본다. 결과적으로 전체수요 Q는 각 개개인의 수요의 총합이며, 개개인의 수요는 각 상황에서 발생하는 수요의 총합인 셈이다. 따라서 개인의 수요는 고객-상황 수요함수인 Qij=Fij(X1,X2,x3,...,Xn)으로 표시되어 질 수 있으며 이때 I는 i번째 고객, j는 j번째 사용상황을 나타낸다.고객-상황을 기준으로 한 시장세분화는 사용상황이 변화함에 따라 각 집단이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일 때 가능한 것이며, 이때의 수용함수는 Qij=Fij(X1,X2,X3)세분화되는 것은 수요곡선(수요확률)이며 이것은 고객이 특정 상황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발생하는 구매욕구를 반영한다는 사실이다.3. 시장세분화의 조건- 측정성, 접근성, 충분성①측정성-각 상황들에 대한 발생빈도는 적절한 관찰법과 회상에 기초한 질문법으로 측정되어 질 수 있다. 소비자들은 자신들의 소비행위를 기억할 때 특정상황과 결부된 소비를 더 잘 회상한다는 사실이 발견되고 있다. 시장세분화를 위해 사용될 수 있는 가장 실무적인 측정의 접근법은 아마도 사용상황을 온도, 특정한 사람들의 존재 유무, 또는 전형적인 배경을 위주로 객관적이고 가시적인 특성을 기술하는 방법일 것이다.대부분의 상황은 보이고, 듣고, 냄새 맡고 느낄 수 있어 오관으로 직접 확인이 가능하다.②접근성-상황이나 기회는 두가지 방법으로 접근이 가능하다.첫째, 많은 제품의 경우 특정의 사용상황에 있는 소비자에게 직접적으로 접근이 가능하다.두 번째, 목표로 하는 사용상황에 있는 고객들을 향해 판촉이나 판매활동을 벌일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타겟 상황에 자주 놓여지는 소비자의 특성을 파악하여 이들이 자주 접촉하는 매체나 매체의 채널을 확인하는 것이다. 광고를 통해 목표집단과 목표상황을 결합하여 형상화시킬 경우 광고노출이 효과적일 뿐만 아니라 메시지에 대한 주의, 관여, 학습, 기억등 광고에 대한 효과를 극대화 시킬 것이다.③충분성-시장세분화의 충분성은 표적으로 하는 사용상황의 발생빈도와 그 상황에서 추구되는 소비자의 목표와 욕구의 중요성에 의해 좌우된다. 특정제품의 특정상황을 타겟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이 제품이 사용될 수 있는 유사한 상황들이 모여질 때 시장의 크기가 충분해 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충분성은 중복상황에 만들어질 때 쉽게 확보된다.4.사회심리학적 변인과 사용상황사회심리학적 변인은 주로 어디에 살며, 어떻게 시간을 보내며, 자신과 주변환경을 어떻게 보며, 주위환경에서 중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등으로 대표된다. 몇몇 연구자들은 이외에 매체와 소비습관, 기본적인 성격특성, 가치와 신념, 제품의 편익추구점 등을 측정한다. 또한 사회심리학적 접근은 개인적인 특성에서 지속성을 보이는 몇몇 속성들도 사용된다. 이 때문에 사회심리학적 변인을 사용하여 상황에 따라 행동반응이 달라지도록 하는 영향요인으로써 개인에 내재한 기본적 “신념과 태도”를 측정할 수 있다고 주장되어 왔다.이 접근법이 갖는 또 다른 잇점은 서로 다른 라이프스타일을 따라 고객이 만들어 내거나 자주 접하는 사용상황(휴가, 스포츠등)이 어떻게 다른가를 측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사회심리학적 접근법의 적당한 표현은 “고객의 세계, 생활공간을 들여다 본다”라는 말일 것이다. 연구자들은 고객의 성격에서 유래하는 행동특성의 차이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달리 연구에 참여한 피험자들은 종종 “자신들의 행동반응은 성격특성 보다는 상황 때문에 달라진다”고 보고한다.시장세분화를 하기 위한 기본적인 개념은 3가지로서 상황, 고객, 상황속의 고객등이다. 사회심리학적인 변인은 그 특성상 고객의 특성, 상황요인 및 이 양자의 상호작용에서 나타나는 가치, 태도, 욕구 등에 포함되어 진다. 그림에 의하면 3가지의 기본적인 개념(사용상황, 지속성 있는 고객의 속성, 양자의 상호작용 효과)을 토대로 편익이 세분화된다. 그 다음단계로 추구하는 편익이 각 상표의 효용가치에 대한 지각을 좌우한다. 이에 따라 제품의 각 속성들에 대한 가중치도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효용구조는 사용상황의 발생빈도와 함께 최종단계인 행동의 세분화를 결정짓는다.이를 부언하면 고객- 상황 세분화는 수없이 파생되는 고객-상황 조합이 여러 단계를 거치는 동안 유사성에 의해 적절히 분류, 통합되어지는 과정이며, 유사성은 추구되어 지는 편익, 제품 및 제품속성에 대한 지각, 마케팅 제요소에 대한 행동반응 등에 의해 만들어진다.과거 Harley는 편익에 의한 시장세분화 체계(틀)를 소개하고 이것을 기존의 시장세분화 방법(지역, 인구통계학적 변인, 사용량 등에 의한)에 대치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그의 방법은 각 편익점들에 대한 상대적인 중요도(가중치)의 측정에 의해 고객을 분류하는 것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상황특성은 측정되지 않았다.Wind는 한 시장 세분화 연구에서 소비상황 변수가 이미 형성된 세분시장의 토대를 흔들어 버리는 매우 큰 영향요인 이라는 사실에 관심을 표명하였는데 이 사실로 볼때 그는 이미 상황요인의 영향력을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오랫동안 편익에 기초한 시장세분화 연구를 하는 중에 가족들이 자주 다른 집단으로 재분류 되어지곤 하는 사실을 발견하였는데 이에 대한 하나의 설명으로 그들은 제품의 속성에 대한 가중치(중요시 하는 정도)가 상황에 따라 변화하며 소비상황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을 제시한 것이다. 즉 소비자가 지각하는 중요도가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이다.소비상황이 효용구조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실증하기 위한 간단한 예증이 있는데 이는 40명의 학생을 통해 세가지 다른 소비상황 별로 여덟가지의 과일에 대한 선호도를 측정한 것이다. 그 결과는 순위. 상대적인 효용치, 분포가 상황에 따라 매우 달리 나타나고 있다.5.고객-상황 시장세분화의 실무적 절차마케팅 의사결정자는 사전에 소비상황 선택(또는 분류)에 필요한 결정적인 특성이 무엇인가를 파악해 두어야 하며, 그래야 만이 다음 단계의 본격적인 시장세분화 연구를 진행시킬 수 있다. 고객-상황 세분화의 매트릭스 구조는 특정상황에서 특정 집단의 태도와 행동을 구분 짓는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방법으로 추천할 만하다.
    경영/경제| 2009.02.26| 5페이지| 1,000원| 조회(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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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품의 시장정의에 대한 소비자 지향적 접근 요약
    논문요약과제-제품의 시장정의에 대한 소비자 지향적 접근-상호 경쟁하는 제품들에 대한 시장정의는 마케팅 의사결정의 모든 과정에 걸쳐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시장정의에 따라 좌우되는 시장 점유율은 그동안의 성과를 평가하는 중요한 판단기준이며, 지역광고, 영업력 강화여부 그리고 기타 예산배정의 지침마련에도 중요한 지표가 된다.1.시장에 대한 더 나은 통찰이 요구되어지는 배경궁극적으로 모든 제품시장의 경계에 대한 정의는 인위적이다. 시장구조를 파악하여 복잡한 시장 환경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필요성이 반복해서 제기된다. 전술적 의사결정을 위한 시장정의는 협소하여 판매에 대한 단기적인 관심사만을 반영 하는데, 이것은 시장을 원하기만 하면 자원들로 채워 넣을 수 있는 수요의 집합으로 보는 판매 도는 제품관리자의 관점이다. 전략적 기획의 관점을 반영하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면 현재보다 더 광범위한 시장을 개발할 수 있으며, 다음과 같은 사항을 밝혀 낼 수 있다.(1)현재는 충족되지 못하고 있는 잠재적인 시장(2)잠재적인 대체제품으로 까지 시장을 확장 시킬 수 있는 기술, 가격, 경쟁력, 공급 상황에 대한 변화(3)현재 그리고 미래의 소비자들이 이러한 변화에 반응하는데 걸리는 시간현실적으로 특정시장에 대한 정의는 장기적 관점과 단기적인 관점의 절충안이 된다. 그러나 이 절충은 대개 소비자의 관점과는 맞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로 다른 목적의 시장에 맞는 다양한 시장정의 방법이 개발되었다. 현재 각 SBU는 다른 제조 공정으로 만들어졌지만, 동일한 세분시장에서 소비되고 있는 제품군들에 마케팅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제품시장의 경계구분이 어쩔 수 없이 인위적일 수 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누구나 일치할 수 있는-쉽게 확인되고 수용될 수 있는-자연적인 구분선이 좀처럼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이다. 한편, 시장정의가 전술적 이용에 집착되어 너무 폭이 좁게 정의되거나 잠재시장의 본질과 규모가 과소평가될 경우 시장기회를 놓칠 수 있다.2.경쟁제품 시장에 대한 소비자 지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이 중 어느 것도 전략적 개념을 분명히 하고 제품시장 정의의 여러 가지 방법론을 평가하기에는 부적합한 것이다. 좀 더 나은 접근법은 다음과 같은 가정에서 도출될 수 있다.◆사람들은 제품 자체가 아니라 제품이 주는 효용을 원한다. 특정 제품이나 브랜드는 비용 대 효용의 측면에서 여러 가지 선택 가능한 조합을 형성한다.◆고객은 이러한 선택 대안을 과거에 경험했던 사용상황이나 차후 사용하려고 하는 용도의 관점에서 고려한다. 고객이 원하는 편익은 용도에서 나오는 것이다.위의 두 가지 전제에서 출발하게 되면 제품시장은 제품군과 소비자군으로 정의 될 수 있다. 전자는 비슷한 효용이 추구되는 사용상황에서 서로 대체되는 제품 집합을 의미하며, 후자는 이러한 사용상황을 원하는 소비자 집단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의는 소비자들의 욕구에 중점을 둔 수요지향 또는 소비자 지향적인 것이다. 한편, 다른 대안은 공급자 지향적 관점으로써 제품들을 생산, 공정, 원재료, 물리적 외형, 기능 등의 유사성에 따른 판단기준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 시장정의 방법은 응용하기 쉬우므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데 중요한 점은 제조업체가 쉽게 통제할 수 있는 요인들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소비자 지향적 기준은 소비자의 욕구와 취향이 계속 변화하므로 소비자 욕구의 변화상황을 계속 추적해야 하는 어려움이 따른다.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공급자 지향적 시장접근방법이 적용상의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업계에 널리 수용되어진다.◇제품의 위계(Hierachy of Products)소비자의 어떤 기본적인 욕구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총칭적인 제품 분류 내에 제품의 위계가 있고 위계별로 각각의 수준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제품유형: 이는 기본적이거나 총체적인 관점에서는 같은 욕구를 충족시키지만 그 내부에는 상당히 다른 유형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제품 범주이다.◆제품변형: 하나의 제품유형 내에 다양한 변형들이 존재할 수 있다.◆브랜드: 제품변형 내에 다양한 브랜드가 존재하간에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대체가 일어난다. 하나의 위계 내에는 수준이 많거나 적을 수 있는데, 이는 기본적인 욕구의 폭과 복잡성, 그리고 이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대안이 얼마나 다양한가에 따라 달라진다.◇하위시장과 전략적 세분시장하위시장은 제품구매와 사용행동이 동일하고 기업의 마케팅 활동에 동일한 반응을 보이는 소비자들로 구성된 세분시장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상 이러한 하위시장을 전략적으로 세분시장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 하위시장의 선택은 포지셔닝의 결정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인이지만, 하위시장간의 차별점이 곧 경쟁자가 극복해야할 전략적 장애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상의 요인과 다른 요인이 결합되어 규정된 세분시장은 다른 세분시장과 차별화된 마케팅 믹스 정책이 필요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전략적 가치를 판별할 수 있다.3.소비자 지향적 제품시장정의를 위한 분석방법1) 구입 혹은 사용행동분석A1. 수요의 교차 탄력성다른 접근법보다 표준적이고 논리성은 뛰어나지만 몇가지 이유 때문에 잘 사용되지 않는다.이 문제는 다음 두가지로 해결할 수 있다. 첫째, 측정의 타당성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실험적 연구 방법. 둘째는 수요에 영향을 미치는 제반요인을 광범위하게 추출하고 이들 요인들이 미치는 영향의 범위를 통제하는 계량경제학적 방법. 만약, 보든 교차 탄력성에 대한 동시측정이 시도된다면, 모든 잠재적 경쟁브랜드에 대한 가격변화나 기타 시장자료를 고려하기 위해 제품시장의 한계에 대한 사전적 결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A2. 소비자 사용행동의 유사성을 이용한 방법이 접근법은 제약시장 연구에서 성공적으로 사용되었다. 서로 다른 화학물질로 만들어졌지만 유사한 치료효과를 갖는 제품이 상호 어느 정도 유효한 대체물이 되는가가 연구과제였다. 결과는 분류된 제품시장 내의 약품들은 속해있는 시장내의 약품들과 모든 용도에서 경쟁적이지 않았으며, 이 결과의 자료는 각 약품들의 대체성을 잘 밝혀내었다. 결과적으로 이 접근법은 중복되는 용도를 갖는 히 조건 확률-가장 최근 구입한 브랜드가 B인 경우에 다음 A를 구입할 확률-로 이해되고 있다. 확률의 측정은 전형적으로 패널 자료를 통해 추정된다. 이 접근법의 전제는 응답자들은 서로 거리가 있는 대체제보다 가까이 있는 대체제로 전환하는 경향이 있으며 대체확률은 브랜드 전환 비율에 의해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표 전환율이 여러 브랜드간의 일련의 구입순서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상표들의 구입순서에 어떠한 상표들을 포함시켜야 할 것인지 논리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Hendry 모델: 이 접근법은 브랜드 전환자료를 시장구조 결정에 이용한다. 본질적으로 이 모델은 입력된 자료에 최대한 일치하는 배후의 브랜드 전환구조를 밝혀내려는 것이다. 이 모델은 소비자들의 의사 결정 과정에 위계가 있다고 가정한다. 소비자들은 한 개 이상의 하위시장에서 여러 브랜드를 구매할 수 있지만 하나의 하위시장 내에서는 모든 소비자들이 각 브랜드의 잠재고객으로 간주되며 안정된 구매확률은 갖는 것으로 가정된다. 각각의 하위시장 내에서 또는 하위시장들 간에서 제품/상품의 전환율을 예측하기 위해 Hendry 모델이 적용된다. 보다 정교한 계서적 분류과정이 최근 Urban과 Hauser에 의해 논의되고 있다. 여기서도 Hendry 모델에서와 같이 계서적 분류구조를 설정한다. 나뭇가지 사이에서 보다는 나뭇가지 내에서 더 많은 전환이 일어난다. 소비자 개인의 전환확률은 인터뷰에 의해 측정된 제품선호도와 구매관찰 또는 기록자료를 비교하여 추정하며 이때 조건부 Logit model이 활용된다. Hedry모델은 선호도, 시장점유율, 태도 그리고 다른 모든 주요한 요인들은 안정되어 있고 학습은 무시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이러한 전제는 Hedry모델이 제품수명주기상 성숙기에 도달한 제품에서만 적용가능함을 암시한다.*요약행동 측정은 미래보다 현재나 과거에 영향을 더 받는 자체적인 약점을 갖는다. 실제적인 상표전환 행동은 현재의 마케팅 요인들 즉 현존하는 브랜드의 집합, 브랜드의 이용가능성, 현재의사회규범 등에 영향을 받는다. 만약 자료가 매우 오래 기간에 걸쳐 수립되어지거나 환경이 다른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통해서 얻어진다면 대체에 영향을 주는 요인들이 다양해진다. 한편 특정한 행동측정이 필요하다면 실험적 조작을 활용할 수 있다.2)소비자 판단에 근거한 분석B1. 의사결정 순서이 방법은 소비자 의사결정 순서의 기술서를 이용하는 것으로 소비자가 최종선택에 이르기까지 사용하는 각 단계별 판단기준이 어떤 순서로 채택되는가에 초점을 둔다. 이 방법의 일반적인 절차는 소비자에게 쇼핑시 구매결정 과정에서 마음속에 일어나는 일을 말로 표현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구전상의 기록이 기술서(Protocol)이라 불린다. 이 자료를 이용하여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모형이 개발된다. 각 개인들은 의사결정의 유사성을 기초로 몇 개의 그룹으로 분류될 수가 있다. 브랜드간의 경쟁정도는 기술서를 이용하여 측정되고, 이때 일차적으로 선택된 대안들 중에서 의사결정 과정이 진행되어짐에 따라 어떠한 기준에 의해 이들이 제거되어지는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 접근법의 실제적인 이점은 제품유형이나 일반 제품군 내의 변형제품에 대해 계서적 질서를 파악할 수 있도록 통찰력을 제공해준다는데 있다. 선택의 계서적 질서에 관한 기술서를 수집하는데에는 수많은 경험적 문제들을 고려해야 한다.B2.지각도 작성법이 방법은 사전에 정의된 제품시장을 전제로 하여 제품 또는 상표들에 대한 경쟁적인 소비자의 인식을 도형상의 경쟁 공간으로 표현해내는 기법으로써 현재 많은 유사한 기법들이 개발되었다. 각 제품/브랜드는 상호관계에 따라 공간상에 위치 지워지며, 공간배열 상태는 제품의 효용이나 비용의 속성이 소비자들에게 어떻게 지워지고 있는가를 나타낸다. 제품 대안들간의 상대적 거리는 대안 상호간의 대체성의 정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소비자에게 어떻게 인식되어지고 있는가를 측정하는 척도가 된다. 지각도 작성법이 갖는 주요한 장점은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응용성이다. 지각지도는 주요한 사용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구성될 수 있 있다.
    경영/경제| 2009.02.26| 6페이지| 1,000원| 조회(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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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사]춘추전국 시대의 춘추오패와 전국칠웅
    목차서론본론1.춘추시대의 개막과 패자의 의미2.춘추오패1)제환공(齊桓公)2)진문공(晉文公)3)초장왕(楚莊王)4)오왕(吳王) 합려(闔廬)5)월왕(越王) 구천(句踐)3.전국칠웅1)위魏나라와 위문후(魏文侯)2)제(齊)나라와 제위왕(齊威王)3)연소왕(燕昭王)4)초회왕(楚懷王)5)한(韓)나라6)조나라와 조무령왕(趙武靈王)7)진시황(秦始皇)결론서론춘추전국시대는 수많은 인재(人才)들이 쏟아져 나와 서로 천하를 다투던 시기로 이를 춘추(春秋)시대와 전국(戰國)시대로 나뉜다.춘추시대에는 주(周)왕실의 힘이 약해져 이를 대신해서 천하를 호령하던 다섯 패자가 있었는데 이를 춘추오패(春秋五覇)라하고 전국시대에 서로 패권을 다투던 7개의 국가를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한다. 본 레포트에서는 춘추오패와 전국칠웅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본론1.춘추시대의 개막과 패자의 의미각 지방의 제후국들을 거느리고 천자(天子)의 국가임을 자부했던 주나라도 유왕(幽王)에 이르러 국력이 크게 쇠퇴했다. 기원전 782년에 유왕은 포사(褒?)라는 미모의 애첩에게 홀딱 반하여 국정을 살피지 않고 오직 사치와 향락만을 즐겼다. 그러다가 전왕후였던 신후가 서방의 견융(犬戎)과 연합하여 호경을 공격하여 유왕은 살해되고 만다. 호경이 견융의 군대에 유린을 당하자 천하의 주인 행세를 했던 주나라 왕실의 권위는 하루가 다르게 땅에 떨어졌고 신나라 노(魯)나라, 허(許)나라 등의 제후국들은 서둘러 의구를 주나라 왕으로 옹립했다. 이 의구가 곧 주평왕(周平王)이다. 그는 수도를 낙읍(洛邑)으로 천도했다. 이 일은 중국 역사상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무왕이 주나라를 건국한 이래 유왕이 살해된 시점까지를 역사적으로 서주(西周)시대라고 한다. 드리고 주평왕이 낙양으로 천도한 시점부터 동주(東周)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아울러 춘추 시대의 개막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춘추 시대는 기원전 770년부터 시작된 것이다. 춘추 시대에는 주나라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제후국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주나라 천자는 소금은 제나라에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다.또한 국도(國都)와 지방에 각각 5호(戶)를 기본단위로 하는 행정조직을 만들고 그것을 병제(兵制)와 결합시켜 3군(軍)의 조직을 확립하였다. 또한 토지의 비척에 따라 조세에 등급을 설정하여 백성의 부담을 평균화하고 물자의 유통, 물가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따라서 주나라는 부강해졌다.관중은 군사력을 은밀하게 길러서 다른 나라에서 눈치를 채지 못하게 하였고 민간조직에 군대 편제를 숨기는 방법을 썼다. 관중의 이러한 부국강병 정책이 성공하자 제환공은 신하의 예를 갖추고 주나라 천자인 희왕에게 ‘존왕양이(尊王攘夷)’의 기치를 내걸고 주나라 왕실을 지키겠다는 충성을 맹세하였다. 희왕은 중원의 제후들을 통제할 힘이 없었고 날로 세력을 키운 제환공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이를 매우 기뻐했고 제후들을 소집하라고 명령했다. 제환공과 송(宋),노(魯),진(陳)의 네 나라의 군주는 북행에서 회의를 개최하고 이때 제환공이 맹주(盟主)로 선출되었고 맹약을 맺었다. 제환공이 겨우 네 나라 제후들의 지지를 맏고 맹주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중원의 제후들을 호령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제환공은 힘이 약한 제후국들을 도와주고 보살핌으로써 자신의 세력과 위상을 한층 더 높였다. 기원전 656년 제환공은 노나라, 송나라 ,진(陳)나라, 위나라, 정나라, 허(許)나라, 조(曹)나라의 일곱 나라와 초나라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고 규구(葵丘)에서의 회맹(會盟)을 주도하였다. 제환공은 기원전 685년에 제나라의 군주로 등극한 이후 43년 동안 제후들을 도합 아홉 차례 소집하여 동맹을 맺었다. 중국 역사상 이를 제환공의 ‘구합제후(九合諸侯)’라고 칭한다. 원래 주나라 천자만이 제후들을 소집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그러나 주평왕 이후 주나라 천자들은 실권을 상실하여 제후들을 마음대로 소집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제환공은 제후들을 아홉 차례나 소집하여 자신의 뜻대로 그들을 다스렸다. 사실상 그가 천자의 권력을 휘둘렀던 것이다. 기원전 645년 관중이내란을 진압하여 양왕이 낙읍에 돌아올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공로(功勞)로 남양(南陽)을 하사 받아 중원으로 통하는 요충지를 확보하였다. 진문공은 이때 처음으로 각국의 제후들에게 주나라 왕실을 바로잡은 능력과 위세를 과시했다.진문공은 북진하려던 초(楚)나라에 대항하여 제(齊),진(秦),송(宋)과 함께 성복(城?)에서 일전을 겨루게 되었다. 진나라 군대의 병거는 7백승이었고 병거에 탄 병사들은 모두 갑옷으로 무장하고 일사불란하게 행동했다. 이 성복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게 된 진문공은 포로 1천명과 노획한 수레 1백승(乘)을 주나라 천자인 주양왕에게 바쳤다. 주양왕은 답례로 대형 수레 1승, 붉은 색 화살 1백개, 검은 색 화살 1천개 등 진귀한 물건들을 진문공에게 하사하였다. 진문공은 천자에게 완전히 복종하는 태도를 취했지만 사실 천자가 그에게 화살을 하사한 것은 중대한 의미가 있었다. 즉 천자는 그에게 자기 뜻대로 다른 제후국들을 정벌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원래 제후는 천자의 윤허 없이 다른 제후를 토벌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진문공은 실제로 천자를 능가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까닭에, 천자도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마침내 그에게 제후를 토벌할 수 있는 권한을 준것이다. 기원전 632년 성복의 싸움이 끝난 후 진문공은 정나라의 천토(踐土)에서 제단을 쌓고 송나라, 제나라, 노나라, 정나라, 진(陳)나라, 채나라, 주나라, 여(呂)나라의 군주들을 소집하여 동맹을 맺었다. 이때 주양왕은 왕자 호(虎)를 파견하여 진문공을 제후의 우두머리라는 뜻의 ‘후백(侯伯)’에 봉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중원의 패자로 인정했다. 같은 해 겨울 진문공은 진(晉)나라 땅인 하양(河陽)에서 또 각국의 제후들을 소집하여 동맹을 맺었다. 그는 자신의 위엄과 세력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주양왕도 회맹에 참가하도록 암암리에 종용했다. 사실 제후의 신분으로서 천자를 부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주양왕은 아무런 실권도 없는 명목상의 천자였기 때문에 진도를 바꿔 진나라 편을 들곤 하였다. 정나라의 미덥지 못한 태도에 화가 난 초장왕은 정나라를 다시 공격하여 3개월 동안 도성을 포위한 후 마침내 항복을 받아냈다.초장왕은 같은 패자이면서도 제환공이나 진문공이 주왕실을 드높이며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대의명분은 외쳤던 것과는 달리 주왕실의 존재를 부정하려고 하였다.그러나 진(陳)과 정(鄭)등 오랜 전통을 지닌 나라들에게 압박을 가하였으나 멸망시키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를 오패의 한 사람으로 부르는 것이다.초장왕은 소국을 힘으로만 지배하지 않고 가능하면 동맹 관계를 통해 자신의 영향력 아래 놓았다. 송나라가 초나라에 복종한 이후 중원의 주요 소국들은 대부분 초장왕을 패자로 인정했다. 그는 진(晉)나라 등의 강대국들을 복종시키지 못했지만 진나라의 세력을 황하 이북으로 몰아내고 중원 소국들의 패권을 장악하여 명실상부한 패자가 된 것이다.4)오왕(吳王) 합려(闔廬)오왕의 이름은 광(光)이다. 공자 광은 저택에서 연회를 열어 오왕 요를 초대했다. 그는 사전에 무장한 병사들을 지하실에 숨겨놓았다. 오왕 요는 사촌형 광의 호의를 특별한 이유없이 거절하기가 곤란했다. 그렇지만 혹시 있을지 모르는 암살 음모에 대비하기 위해 무장한 병사들을 사방에 배치하고 난 뒤, 호위병들을 거느리고 공자 광의 저택으로 갔다. 연회가 시작되자 하인들이 음식을 분주히 날랐는데, 그들은 연회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다른 의복을 갈아입고 연회장 안에서는 칼을 찬 호위병들의 감시를 받으며 무릎으로 걸어다녀야 했다. 만에 하나 발생할지 모르는 변고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연회가 무르익을 무렵 광은 다리에 병이 난 척하고 지하실로 슬며시 내려가 전제에게 암살 명령을 내렸다. 오왕 요의 호위병들이 연회장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칼을 몸에 숨기고 들어가기란 불가능했다. 공자 광은 생각 끝에 전제에게 비수를 요리로 나온 생선 뱃속에 숨기고 들어가게 했다. 전제가 오왕 요에게 생선 요리를 진상할 때, 어느 호위병도 생선 요리 속에 비수가 있을것이라곤 상상도 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고는 진찰하는 척을 하였다.부차는 구천이 정말로 자신에게 성심으로 충성을 다하기 위해 더러운 대변까지 맛보았다고 생각하여 감복하고는 구천을 월나라로 돌려보내주었다. 오나라에서 3년 동안 온갖 치욕을 당하고 돌아온 구천은 유능한 인재를 발탁하여 중임을 맡겼고 백성과 함께 먹고 일하고 자면서 피폐해진 월나라의 산업을 다시 일으켰다.구천은 백성들에게 지극정성을 다하여 군주와 나라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이곳 저곳에서 나타나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부차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해마다 오나라에 막대한 양의 공물을 바쳤으며 수시로 사자를 보내 신하로서의 충성을 맹세했다. 그는 또 서시(西施)라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을 부차에게 보내서 미인계를 사용하여 부차와 오나라가 서서히 망조를 걷게 했다.구천이 이렇게 부차의 환심을 사며 비밀리에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을 때 부차는 중원 정벌을 단행했다. 기원전 482년 부차는 오나라 정예 병사들을 이끌고 중원으로 진격했다. 그는 황지(黃池)에서 노나라 애공, 진(晉)나라 정공을 소집하여 회맹을 열었다. 이때 부차의 위세가 주나라 천자를 능가했기에 주나라 왕실에서도 단평공(單平公)을 왕실 대표로 이 회맹에 참석케 했다. 부차는 이 회맹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사실상 맹주 역할을 했다. 드디어 중원의 제후들을 굴복시키고 꿈에 그리던 패자가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기쁨도 잠시, 그가 황지에서 한없는 승리감에 젖어있을 때, 월나라 군대가 도성을 기습하고 태자를 죽인 것이다. 오나라는 위기에서 예물을 가지고 월나라로 가서 강화를 요청하자 구천도 아직은 오나라를 멸망시킬 힘이 없다고 판단, 부차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두 나라는 강화를 맺었지만 이때부터 두 나라는 다시 원수가 되었다. 기원전 478년 구천은 다시 오나라를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고 부차는 가까스로 탈출했다. 기원전 175년 구천은 또다시 오나라를 공격하여 3년동안 도성을 포위했다. 결국 부차는 자결을 하고 오나라는 멸망하여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이어.
    인문/어학| 2008.11.06| 14페이지| 2,000원| 조회(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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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사]헬레니즘시기 레포트
    목차서론본론1.알렉산드로스 대왕1)알렉산드로스의 위업2)알렉산드로스의 유산과 후계자들2.헬레니즘의 3대 강국(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과 정치1)그리스와 마케도니아(안티고노스 왕국)(1)그리스(2)연방국가(3)마케도니아2)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국3)시리아: 셀레우코스 왕국3.헬레니즘 시대의 사회4.헬레니즘 시대의 경제5.헬레니즘 시대의 문화6.헬레니즘 시대의 철학 사상1)에피쿠로스학파2)회의학파3)스토아학파4)키니코스 학파7.헬레니즘 시대의 과학 기술8.헬레니즘 시대의 미술결론서론헬레니즘의 정치사를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갑자기 사망했다. 10년 동안 그가 이룬 업적은 위대했지만 제국은 그만 분열하게 된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측근 장군등이 바로 후계자 전쟁을 일으킨다. 이 전쟁은 50년 이상 계속되었고, 결국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은 3 개의 세력권으로 분열되었다. 구(舊) 페르시아 제국과 겹치는 아시아의 대부분을 이어받은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에 세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그리고 격렬한 권력 투쟁 끝에 새롭게 마케도니아에 확립된 안티고노스 왕조가 그들이다.헬레니즘이란 그리스의 다른 이름 헤라스에서 유래하고, ‘그리스풍’ 이라는 의미이다. 헬레니즘 시대는 대략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에서 시작되어, 로마 제국에 의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멸망(기원전 30년)까지 300년간이라 말할 수 있는데 혹자는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한 기원전 323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한 기원전 30년 까지라고 보기도 하고 더 길게 본다면 15세기 중엽까지 지속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헬레니즘 시대가 정확히 언제 시작되었는지도 학자들마다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난다. 본 레포트에서는 이 헬레니즘 시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본론1.알렉산드로스 대왕1)알렉산드로스의 위업부계 쪽으로 헤라클레스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하는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부왕인 필리포스가 결혼한 지 얼마 후에 왕비의 몸에 사자의 형상이 다. 아버지는 전사했고, 간신히 전쟁터를 빠져나온 아들의 수중에 남은 것은 여기저기 흩어진 몇 개의 도시들뿐이었다. 안티고노스의 아시아 영지는 공동전선을 폈던 셀레우코스(Seleuchos)와 리시마코스(Lysimachos)에 의해 분할되었다.(전자는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를 후자는 소아시아를 차지했다.) 그러나 안티고노스 가문의 운은 그것으로 다한 것이 아니었다. 데메트리오스는 마케도니아 통치권의 분열을 틈타 그 권좌를 찬탈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다시 세력을 확장했고 다른 장군들이 공동전선을 형성해야 할만큼 위협적이었다. 그 공동전선 앞에 그는 다시 패배했고 아시아의 피신처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그의 아들 안티고노스에게 가문의 위신을 다시 일으킬 기회를 주었다. 리시마코스를 견제하려는 셀레우코스의 도움을 받아, 그는 발칸 반도에 거점을 마련한 뒤 마침내 마케도니아를 탈환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276년). 100여년 뒤 로마에 의해 해체될 때까지 마케도니아 왕국에 군림한 안티고노스 왕조는 그런 반전을 거듭하는 우여곡절 끝에 성립되었던 것이다.이제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3개의 강대국과 나머지 군소 왕국들로 나누어졌다. 이 세 왕국은 각각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였다. 셀레우코스가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었던 시리아는 이집트와 일부 영토를 제외하고는 예전의 페르시아 제국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이집트에 자신의 왕조를 건설했고, 예전의 이집트 문명을 상당 부분 받아들이면서 파라오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집트의 마지막 지배자는 그의 마지막 후손인 클레오파트라 7세였다. 이 3대 강국이 서로를 견제하면서 헬레니즘 시대의 상당 기간을 소위 ‘세력 균형의 시대’로 만들었다. 즉, 어느 한 왕국이 강해지면 다른 두 왕국이 연합하여 저지하는 것이 일반적인 외교 전략이었던 것이다. 후일, 이 3대 강국과 함께 주로 셀레우코스 왕국에서 분리된 군소 왕국들이 나타난다. 이 군소 왕국들 중에는 기원전 3세기 초 아탈로스(Attalos)왕가에 .(3)마케도니아마케도니아 왕국은 헬레니즘 3대 강국 중에서 세습적인 군주정의 성립이 가장 늦게 이루어졌다. 안티고노스 왕조는 기원전 276년이 되어서야 마케도니아에서 자리를 잡았으니,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지 47년 만의 일이었다. 마케도니아는 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의 아들인 안티고노스 고나타스에게 돌아갔고, 이후 안티고노스 왕조는 기원전 168년 로마에 의해 해체될 때까지 마케도니아에서 확고하게 뿌리내렸다. 마케도니아는 같은 헬레니즘 3대 강국에 속해있긴 하지만, 이집트와 시리아와는 다른 점이 많았다. 우선 이집트나 시리아는 예전에 페르시아 왕국의 지배를 받던 곳이었고, 동방적인 전제군주정이 3,000여 년간 자리를 잡고 있던 곳이었다. 그러나 원래 마케도니아는 군주정이긴 했어도, 절대군주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마케도니아의 귀족의 세력은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원래부터 상당히 강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케도니아의 국가적 성격은 점차 다른 헬레니즘 왕국들과 상당히 비슷해졌다. 우선 안티고노스 왕조 시대에 마케도니아는 상당한 도시화를 이루었다. 예전의 마케도니아 지역에는 도시가 그다지 많이 존재하지 않았고, 있었다고 해도 그 규모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여러 곳에서 도시들이 나타났고, 예전부터 있던 도시들도 그 규모가 커짐과 동시에 그리스의 폴리스 같은 행정단위와 기구, 직제들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3세기의 경제적 변화에 대한 자료는 그다지 많지 않지만, 이미 필리포스 2세가 그리스식으로 변화시켜 놓았던 마케도니아의 경제분야의 발전이 안티고노스 왕조 시대에서도 계속 발전했음은 분명하다. 필리포스는 주로 목축에 종사했던 반야만적인 마케도니아인을 농부와 도시민으로 변모시켜 놓았고, 여러 곳에 금광과 은광을 개발하여 국고의 재원을 확충했다. 뒷날 안티고노스 고나타스나 필리포스 5세가 다량의 화폐를 발행했던 것으로 보아, 이 광산들이 계속 유지되었거나, 적어도 동방에서 유입된 금은으로 국고가 충실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케도니을 건설하였다.사실 셀레우코스의 업적은 알렉산드로스에게만 약간 못 미칠 뿐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알렉산드로스의 제국 중에서 아시아의 영토는 그가 거의 모두 통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셀레우코스 왕국은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포괄하는 매우 이질적인 영역이었기 때문에 왕국의 존속에 지속적인 위협이 되었다.셀레우코스 1세 이후, 어느 정도 정체 내지 퇴조했던 시리아의 판도는 안티오코스(Antiochos)3세(기원전 223~187년)때에 다시 중흥을 맞이하였다. 그는 셀레우코스 왕국을 강화하기 위한 시도를 실천에 옮겼고, 이를 성공적으로 끝냈다. 기원전 200년, 결국 그는 시리아 남부와 팔레스타인을 이집트로부터 빼앗았다. 그러나 그리스를 정복하려는 그의 야심으로 인해 셀레우코스 왕국은 로마와 전쟁(기원전 191~188년)을 치러야 했고, 그 결과 테르모필라이(Thermophylai)와 마그네시아(Magnesia)에서 참담한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기원전 188년, 그는 소아시아를 로마의 동맹국인 페르가몬 왕국에 넘겨야 했고, 15,000탈란타나 되는 거액의 배상금을 치러야 했다. 그후, 셀레우코스 왕국의 판도는 점차 줄어들어 갔다.안티오코스 4세의 사망 이후 셀레우코스 왕국은 계속되었던 왕위 계승 투쟁으로 급속하게 약화되었다. 기원전 129년, 시리아는 많은 영토를 상실하고 북부 시리아의 좁은 지역만을 다스리게 되었고, 메소포타미아 대부분은 파르티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시기가 되면, 셀레우코스 왕국은 오늘날의 시리아를 겨우 포괄하는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기원전 64년, 로마는 셀레우코스 왕국을 통합하고, 이 지역을 시리아 속주로 개편하였다. 결국 셀레우코스 왕국의 절정기는 창건자인 셀레우코스 1세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다.셀레우코스 왕조 치하의 시리아의 특징은 주민들과 문화의 다양성이다. 이 왕국의 영토 안에는 여러 문명과 주민들이 공존하고 있어서, 서부 소아시아 해안 지역의 그리스계 주민들, 동부 지역의 이란계 주민들,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적인 성장에 비해 농업과 제조업의 취약성은 결국 헬레니즘 문명의 붕괴로 이어지게 했다.5.헬레니즘 시대의 문화헬레니즘의 문화란 그리스문화와 동방문화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통일사업은 세계주의와 개인주의를 만들어 내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한 각지에 만든 새로운 폴리스와, 그 뒤 셀레우코스왕들이 영내에 많이 만든 새로운 폴리스가 중심이 되어 그리스문화는 오리엔트의 오지에까지 침투하였다. 정책적으로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간소화한 그리스어가 공통어(코이네)로서 사용되었다. 또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오리엔트적인 전제군주풍의 의례를 채용하고, 페르시아 왕녀와의 결혼하고 페르시아 귀족을 친위대로 채용하는 등 이민족 통치의 수단으로서 그리스문화와 오리엔트문화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이 같은 헬레니즘은 로마로 이전되어 로마 말기 기독교가 체계화되어 이른바 기독교 문화권이 형성되어 이를 대체할 때까지 약 500여 년간 지속된다.혹자는 헬레니즘을 동. 서양 문화의 융합이라기 보다는 그리스인의 언어, 사고방식, 생활방식 들이 다른곳(먼저 동방, 이어서 지중해 연안 지역)으로 확산되고, 또 모방되는 현상이라고 하기도 했다. 헬레니즘 문화의 발달은 아시아로 이주한 그리스 인들의 도시생활의 전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헬레니즘 문화의 평준화, 보편화의 경향은 바로 그런 이민(移民) 문화적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도시들은 본토에서 온 그리스인들의 출신과 문화의 차별이 하나로 용해되는 용광로였으며, 또한 활발한 도시간 교류에 의해 한층 더 보편적인-즉, 국제적인-문화를 창출했던 것이다. ‘공통의 그리스어’는 헬레니즘 문화의 그런 평준화와 국제화 경향의 상징물이었다.헬레니즘 문화의 통속화 혹은 대중화의 추세는 ‘공통의 그리스어’로 쓰여진 다양한 장르의 문학 작품들에서도 확인된다. 신(新)희극, 시, 그리고 다양한 산문들은, 고전기 작품들의 창조적 열의나 신화와 종교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수사 및 운율 같은 기교와 아울러 세속적 .
    인문/어학| 2008.11.06| 19페이지| 3,000원| 조회(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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