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슬림 난민, 이슬람에 대한 ‘올바른’ 이해부터최근 한국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를 하나 꼽자면 바로 제주도 예멘 난민 문제일 것이다. 7월 13일 마감된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의 난민 수용 반대 청원에 동의한 국민 수가 70만 명을 넘어섰다. 난민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심각한 논란거리로 자리 잡은 것이다. 난민 수용 반대 청원의 요지는 이렇다. 예멘 난민 문제보다 자국민의 치안과 안전, 불법체류 등 다른 사회문제가 먼저이기에 난민 수용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국민들이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무슬림으로 대변되는 이슬람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라 생각한다.『이슬람 문명』의 저자 정수일은 레바논, 튀니지, 말레이시아 등 해외에서 이슬람 직접 겪고 공부한, 한마디로 이슬람 ‘통’이다. 그런 정수일은 이 책을 통해 이슬람을 향한 편협한 시각을 지적하며 이슬람의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함을 역설한다. 이 책이 출판될 당시에도 9.11테러로 반이슬람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팽배해졌을 때다. 지금 우리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오해 중 하나는 이슬람을 하나의 폭력·테러 집단으로 여기는 것이다. ‘한 손에는 코란, 다른 손에는 검’이라는 것이 마치 이슬람의 징표인 것처럼 말이다. 저자는 이것은 잘못된 고정관념이며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슬람이란 아랍어는 본래 ‘순종’과 ‘평화’의 뜻을 담고 있으며, 이 어의가 말해주듯, 이슬람은 평화를 추구하는 종교로서 애당초 신앙을 ‘검’으로 강요하지 않으며 관용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왔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슬람과 폭력은 본질적으로 병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손에는 코란, 다른 손에는 검’이라는 말 역시 이슬람의 경전 꾸르안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13세기 중엽 십자군이 이슬람 원정에서 패배를 당하던 시기에 활동한 이탈리아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한 말이라고 바로잡아준다.이슬람에 대한 또 다른 오해는 바로 이슬람의 여성관이다. 무슬림들은 여성을 하나의 물건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우리의 편견일 뿐이다. 이슬람에서 여성은 남성과 함께 하나의 영혼에서 창조된 동종의 인류로서 동등하게 존재하며, 남녀는 서로 보호자요 관리자요 협력자임을 자임케 한다. 경전 꾸르안은 이러한 동격체적인 상부상조 관계를 “여성은 남성의 옷이고, 남성은 여성의 옷”이란 간결한 말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여성의 재산권과 더불어 상속권, 의무의 부여와 수행에서도 남성의 그것들과 동격시한다. 이렇게 이슬람의 교리와 여성의 권리, 의무를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가 알고 있던 이슬람의 여성관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작가는 일깨워준다.
1. 성장과정 : 본질을 찾아서자전거 체인을 만드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회사 사장님께서 매번 하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자신은 자전거의 ‘본질’을 만들고 있고, 세상에는 아직 텅 비어진 것들이 많다고. 그 말을 듣고 난 후부터 세상을 볼 때 현상이 아닌 본질을 보려 노력했습니다. 이 같은 노력으로 저는 세상을 좀 더 깊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나타나는 현상에 매몰되지 않고 본질을 보려하는 능력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항상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능력을 바탕으로 법의 진정한 목적, 본질을 고민하는 올바른 예비 법조인이 될 것입니다.2. 성격의 장·단점 : 무엇이든 확실하게제가 행하는 모든 선택에는 확신이 있습니다. 이 확신의 바탕은 자신감과 자존감입니다. 누구보다 제 자신을 믿고 아끼기에 확신이 선 선택을 할 수 있고, 혹여나 그 선택으로 제가 손해를 보더라도 후회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선택을 하는 과정에도 단점이 존재합니다. 바로 지나친 신중함입니다. 지나치게 신중하여 선택에 확신이 서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지나친 신중함이 오히려 조금 더 완벽한 선택을 할 수 있게 해줍니다. 신중하게 오랜 시간을 들여 행한 선택은 보다 확신이 찰 것이고, 선택에 자신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은 반드시 지켜질 것이고, 쉽게 바뀌지도 않을 것입니다.3. 학창시절 경력 : 좀 더 나아진 내 모습대학을 다니는 동안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대외활동, 해외봉사활동, 교환학생이 그것들입니다. 이들 세 가지 중에 두 가지는 행동으로 옮기는데 성공했습니다. SK SUNNY 대학생 자원봉사단을 통해 대외활동을, 경북대 인도네시아 가자마다대학 해외봉사활동을 통해 해외봉사활동을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좀 더 나아진 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교환학생입니다. 내년 2학기에 캐나다로 교환학생을 가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준비할 것입니다. 교환학생을 갔다 온 뒤, 좀 더 나아진 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2.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원동력(1). 우리나라 경제발전과정해방 후 우리나라 경제는 파탄 그 자체였다. 일본 자본의 철수로 산업활동이 위축되었고, 해외동포의 귀국으로 인구가 증가해 식량이 부족하였으며 물가가 폭등하였다. 경제 회복을 위해 이승만 정부는 농지개혁과 귀속재산처리와 같은 경제정책을 실행하고 한국은행을 설립한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회복을 위한 노력 중에 6.25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전쟁 후 우리나라는 원조경제로 미국의 원조물자에 의존한 삼백산업이 주 산업을 이루게 된다. 이후 박정희 시대에는 정부주도, 외자도입, 수출지향적인 경제개발계획을 실시한다. 60년대 제 1, 2차 경제개발계획은 생활필수품 자급자족, 경공업제품 수출을 목표로, 70년대 제3, 4차 경제개발계획은 중화학 공업 육성 및 기술발전을 통한 전자산업 육성을 목표로 실시하여 우리나라 경제는 차츰차츰 성장해 나간다. 석유파동으로 인한 위기도 겪지만 70년 후반기 중동건설 붐으로 그 위기를 극복한다. 그 결과 78년에는 처음으로 경상수지 흑자를 달성하게 된다. 전두환 정부에 이르러서는 70년대 투자결실과 3저현상이 맞물러 한국경제는 더욱 더 발전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경제가 단기간 이토록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2). 박정희의 지도력우리나라의 경제성장하면 항상 빠지지 않는 인물이 있다.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다. 경제성장과정중에서 박정희의 업적은 무시할 수 없다. 당시 우리나라는 지금의 아프리카 소말리아만큼 가난한 나라였다. 이런 나라에서 경제개발계획을 계획할 수는 있어도 이를 실행에 옮겨 큰 성공을 거두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박정희는 뛰어난 지도력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적으로 실행에 옮긴다.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은 화폐개혁, 한일국교정상화, 월남파병, 인력수출, 외자도입을 통해 확보한다. 그리고 정부주도, 수출지향적인 경제개발정책을 펼쳐 우리나라를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현재가 아닌 미래를 보고 실행한 정책도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식목, 경지정리 사업은 빈곤한 상황임에도 눈앞의 이익이 아닌 먼 미래를 내다보고 실행한 훌륭한 정책들이었다. 이러한 박정희의 지도력과 더불어 국제적 상황도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도움을 주었다.(3). 국제적 상황1960~70년대 우리나라는 냉전체제 속에서 전략적 요충지대였기에 미국에게 막대한 원조를 받을 수 있었고, 해외자본유치 또한 수월히 받을 수 있었다. 이후 80년대에는 국제적으로 3저현상이 발생하는데, 이는 우리나라 경제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다. 3저현상이란 유가하락, 국제금리하락, 엔 환율 하락을 의미한다. 유가하락은 기름소비가 많은 우리나라에게 더 없이 좋은 현상이었다. 국제금리하락 또한 외국에게 빌린 돈이 많아 갚을 부채가 많은 우리나라에게 이득이었다. 마지막으로 엔 환율이 하락하며 엔화의 가치가 상승하여 일본은 수출을 줄이고, 수입을 늘린다. 이에 경쟁국인 우리나라의 수출이 증가하고 일본의 수입증가도 우리나라 수출품이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여러 국제적 상황들이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있어서 박정희의 지도력, 국제적 상황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당시 국민들의 희생이다.(4). 국민들의 희생경제개발계획을 실행에 옮기는데 자금이 필요했고 그에 따라 실행한 정책들 중 월남파병과 서독에 광부, 간호사 인력수출은 경제성장을 위한 국민들의 희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목숨을 담보로 한 월남파병으로 미국에게서 미군 월급의 50% 수준을 받을 수 있었고, 탄광 막장에서 땀 흘리며, 병원에서 시체들을 닦아야지만 돈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국민들의 피와 땀을 흘린 희생이 있었기에 경제개발계획을 실시할 수 있었다. 국민들의 희생으로 시작한 경제개발이지만 이 경제개발이 성공적으로 작동할 수 있었던 것도 국민들의 희생 덕분이었다. 경제성장 속에서 노동자의 희생이 강제된 것이다. 당시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하루 15시간이상 장시간 노동을 하였다. 임금 또한 60년대 후반 생활비에 미치지 않는 금액이었다. 경제는 성장하지만 노동자의 삶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였다. 노동자들의 불만은 쌓이게 되고 전태일 분신사건으로 폭발하게 된다. 전태일 분신사건은 당시 노동자들의 삶이 어땠는지 보여줌과 동시에 그만큼 노동자들의 희생이 컸다는 것 또한 보여준다. 또 70년대 후반 중동건설 붐으로 중동으로 건너간 많은 건설업자, 건설노동자들도 우리나라 경제성장에 이바지 한다. 이들이 중동에서 땀 흘려가며 고생한 덕분에 78년 처음으로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할 수 있었다. 경제발전과정 중 이렇게 많은 국민들의 희생이 있었고, 이 덕분에 우리나라 경제가 성장할 수 있었다.
1. 해방 후 87년 민주화운동 전까지 우리나라 경제 발전과정(1) 해방 후 ~ 전쟁 전 까지 우리나라 경제해방 후 우리나라 경제는 파탄이 나있었다. 일본 자본의 철수, 남북 두 개의 정부로 인해 물자왕래가 되지 않아 산업활동이 위축되었고, 해외동포의 귀국, 북한주민의 월남으로 인한 인구증가로 식량부족, 실업자가 증가하였고, 물가 또한 폭등하였다. 이 후 등장한 이승만 정부는 우리나라 경제를 회복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그리하여 실시한 정책이 농지개혁과 귀속재산처리다. 농지개혁은 당시 우리나라 인구의 80%가 농업인구였기에 시급히 시행되어야만 했다. 농지개혁은 유상몰수, 유상분배로 지주들의 토지를 국가가 매입한 다음 농민들에게 싼 가격에 판매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귀속재산처리란 일본인 소유의 재산을 처리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 당시 귀속재산은 우리나라 총 자산가치의 80%나 되는 어마어마한 재산이었다. 이 재산을 정부는 돈이 많은 사람들에게 헐값에 판매하였다. 이 귀속재산불하 과정에서 재벌이 시작되었다. 정부는 동시에 자립경제에 필수적인 발권, 정부, 은행의 은행 기능을 맡는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을 설립하고 은행법을 제정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한국경제를 회복하려는 노력 중에 6.25전쟁이 발발한다.(2) 전쟁 후 원조경제전쟁 후 우리나라는 자립적인 경제회복이 불가능하였기에 미국의 원조물자에 의존하는 원조경제를 행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주요 산업 또한 원조물자 관련 산업이었고 삼백산업이 주를 이루었다. 삼백산업은 미국 원조 물자 대부분이 밀가루, 설탕, 면화였기에 이를 가공하는 산업이었다. 이로 인해 식량 부족 문제는 해결되지만 농산물 가격이 하락해 농가 경제가 타격을 받는다. 이러한 원조경제는 전적으로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는 경제체제로 자생적인 경제성장이 될 수 없었다. 그에 따라 국민들은 경제적 빈곤을 탈피하기 어려웠다.(3) 박정희 시대 경제성장과정박정희는 이러한 경제적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련을 모델로 한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실시하게 된다. 하지만 경제개발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자금조달을 위해 박정희 정부는 화폐개혁을 실시하고 한일 국교를 정상화해 일본에게 손해배상을 청구, 상업차관을 저리에 도입한다. 또한 군인들을 월남에 파병한다. 파병 군인들의 월급은 미국이 지급하는데 이는 미군 월급 기준 50%였다. 이것을 정부는 우리나라 기준으로 군인들에게 월급을 지급하고 나머지는 국가예산으로 활용하였다. 그리고 광부, 간호사를 서독에 파견하는 인력수출, 기업이 돈을 빌릴 수 없으니 국가가 보증하여 외자를 도입해 자금을 조달하였다. 이렇게 모은 자금으로 우리나라는 경제개발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195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농업사회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제1차경제개발계획을 통해 생활필수품을 자급자족하면서 공업사회로의 전환을 이루어 나갔다. 1960년대 우리나라는 외국에서 빌린 돈을 갚기 위해 경공업제품 수출에 주력하는 제2차경제개발계획을 실시한다. 이 때 주요 수출품은 인건비가 낮은 산업으로 의류, 섬유, 가발 등이었다. 70년대 실시된 제3, 4차경제개발계획은 우리나라 공업구조를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전환, 육성시켰고, 기술발전을 통한 전자산업도 키워나갔다. 이러한 경제성장 과정 중에 제1차 석유파동이라는 위기도 찾아온다. 우리나라는 경제규모에 비해 석유소비가 많은 나라이기에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되어 찾아왔다. 중동국가들이 석유파동으로 번 돈을 쓰기 위해 중동 건설 붐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에 우리나라 건설업체, 건설 노동자들이 건너가 많은 외화를 벌어오게 된다. 그리하여 1978년 처음으로 경상수지 흑자를 달성하며 원조경제에서 벗어나게 된다. 또한 쌀 자급자족이 가능하게 되어 우리나라는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