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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관광정책 변화를 통한 중국의 대(對)한 THADD보복에 관한 고찰 및 대응방안
    관 광 학 부 관 광 경 영 학 과중국 관광정책 변화를 통한 중국의 대(對)한 THADD보복에 관한 고찰 및 대응방안임 소 정Ⅰ. 서 론Ⅱ. 중국 관광정책의 변천사Ⅲ. 중국의 대(對)한 관광정책의 변천사Ⅳ. 중국의 THAAD 보복에 관한 고찰Ⅴ. THAAD 보복에 대한 대응방안Ⅵ. 중국의 대(對)한 관광정책에 관한 전망Ⅶ. 결론참고문헌Ⅰ. 서 론1. 문제제기와 연구목적1) 문제의 제기오늘 날 세계는 국가 간 경계가 허물어지며 더 이상 나 혼자만 잘 한다고 살아남을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정치·사회·문화·경제·안보 등 모든 분야에서 다양한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에 발전을 위해서는 주변국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경제적 가치는 여러 외교적 논의 대상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가치이다. 오늘 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력이 국가경쟁력을 좌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국가는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가장 중요한 국가이익으로 생각한다. 이는 한국 또한 예외는 아니다. 광복 이후 한국은 수출산업을 중심으로 놀라운 경제성장을 해왔으며, 세계에서 이례적으로 가장 빠른 국가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리고 21세기 현재에는 관광산업의 발전을 통한 경제성장을 도모하고 있다.특히 최근 들어 중국의 관광시장이 크게 성장하면서 한국은 중국인 관광객을 중심으로 외래 관광객의 유치에 힘써왔다. 그 결과 외래 관광객 수가 역대 최대치를 기록한 지난 2016년 중국인 관광객의 수가 전체 외래 관광객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며 한국 최대 인바운드 관광시장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그러나 지난 3월 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인 THAAD 배치의 시작을 공표한 후로 중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뚝 끊겼다. 지난해부터 추진해온 중국의 대(對)한 THAAD 보복이 본격화된 것이다. 이로 인해 국내 관광산업이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으며, 중국의 THAAD보복에 대한 대응책이 시급한 상황이다.2) 연구의 목적오늘날 한국경제에서 관광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크다. 특히 작으로 중국에서는 매년 일정한 주제와 홍보문구를 정해 관광홍보마케팅 활동을 하는 “중국관광의 해”가 개최되고 있다.4) 규범적 발전기 (1997~2001)이 시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중국 공민의 출국관광이 제도적으로 규범화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은 1997년 을 반포함으로써 출국관광에 대한 본격적인 법제도를 구축하였다. 비록 이 법제도는 관광목적지 선택 및 관광 방식 등에 많은 제한이 있었지만 처음으로 중국 공민의 해외여행을 자유화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뿐만 아니라 1998년에는 관광목적지 제도(Approved Destination Status : ADS)가 도입되었다. 이에 따라 타 국가들이 중국의 출국관광 목적지가 되기 위해서는 ADS 협정을 체결하도록 되었다. ADS 협정의 원칙으로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 째, 관광목적지의 확정은 단체관광을 위한 것으로, 최소 단체인원을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원칙은 협정을 체결한 양국은 중국 단체관광객을 취급하는 여행사를 확정하며, 해당 여행사는 상대국이 확정한 여행사의 범위 내에서 합작 파트너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전담여행사 제도라 한다.한국이 관광목적지로 지정된 것은 1998년이다. 한국은 두 차례의 중국인 관광목적지 개방정책에 따라 관광목적지로 개방되었다. 먼저 1998년에는 9개의 성·시에 대해 한국을 관광목적지로 개방하였으며, 2000년에는 한·중 문화관광 합의각서가 체결됨으로써 개방지역이 중국 전역으로 확대되었다.또한 이 시기에는 홍콩과 마카오의 반환이 이루어짐에 따라 이 두 지역과 중국 본토와의 관광교류가 더욱 활발해졌다. 변경관광도 나날이 발전함에 따라 중국 여유국은 변경관광을 통일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을 제정하였다.무엇보다 이 시기에 중국 관광산업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1999년 도입된 중국의 ‘황금연휴제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1997년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발생한 아시아금융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황금연휴제도를 도입하였다. 아시아금융위기가 중국에까지 영 명을 넘어서며 중국인 관광객은 세계 관광시장에서 중요한 소비주체가 되었다(대월월, 2017: 43).중국의 아웃바운드 관광객 수가 꾸준히 증가하는 가운데 중국인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국가 중 하나가 바로 한국이다. 는 2010년부터 2015년까지 한국을 방문한 중국인 관광객의 수와 한국을 방문하는 전체 외래 관광객의 수에서 중국인 관광객이 차지하는 비중을 나타내고 있다. 아웃바운드 관광객 수 및 관광객 수 증가율(2000 ~ 2015년)(단위 : 만 명)연도관광객 수증감(%)연도관광객 수증감(%)20001,04713.4%20084,58411.9%20011,21315.9%20094,7664.0%20021,66036.8%20105,73920.4%20032,02221.8%201170522.4%200420,88542.7%20128,31818.4%20053,1307.5%20139,81918.0%20063,45211.3%201411,65918.7%20074,09518.6%201512,7869.7%자료 : 정리. (http;//data.stats.gov.cn/) 방한 중국인 관광객 수 추이(단위 : 천 명)구분2010년2011년2012년2013년2014년2015년관광객 수1,8752,2202,3864,3256,1265,467비중21.3%22.7%25.5%35.5%45.3%47.3%자료 : 문화체육관광부·한국문화관광연구원, 2015 외래 관광객 실태 조사, 2016, p.36.를 보면, 방한 중국인 관광객은 2013년 급격히 증가하여 2014년에는 612만 명을 넘어섰으며, 이는 한국을 방문하는 전체 외래 관광객 수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수로 47.3%의 비중을 차지했다. 또한 지난해 7월에만 한국을 찾은 중국인 관광객의 수는 약 92만 명으로 이는 같은 달 한국을 찾은 전체 외래 관광객 수의 53.9%를 차지하는 비율로 한국 관광시장에서 중국인 관광객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최준규, 2016: 41).또한 과 를 비교해 보았을 때, 2015년 중국의 전 관광정책 및 영향1) THADD(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 : THAAD)란 무엇인가사드(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 : THAAD)는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로,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미사일 방어체계의 핵심요소 중 하나이다. 이러한 사드는 중단거리 탄도미사일로부터 군 병력과 장비, 인구밀집지역, 핵심시설 등을 방어하는데 사용된다(네이버 지식백과, 2007).사드의 개발은 냉전시대 당시 소련이 개발한 신형 전역탄도미사일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이 대기권 내 탄도미사일을 상층에서 방어하는 기술에 대해 연구를 시작하면서 이루어졌다. 이 연구를 통해 처음 개발된 것이 패트리엇 미사일이다. 패트리엇 미사일은 걸프전 당시 이라크의 탄도미사일을 성공적으로 요격하면서 유명해졌다. 그러나 패트리엇 미사일은 광범위한 지역의 탄도미사일을 방어할 수 없으며, 요격 가능 고도가 10~20km에 불과하다는 단점이 있다. 만약 고고도에서 탄도미사일의 핵탄두가 폭발할 경우, 이에 대응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패트리엇 미사일보다 고고도에서 적의 탄도미사일을 요격하면서, 더욱 광범위한 지역을 방어할 수 있는 새로운 탄도미사일 방어체계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사드가 개발되게 된 것이다.사드 요격 미사일의 최대 사거리는 200km에 달하며, 최대 고도는 150km이다. 사드의 요격미사일은 미사일에 내장된 킬 바이클이라는 요격체가 탄도미사일에 직접 충돌해 파괴하는데, "Hit-to-kill“이라 불리는 이 방식은 탄두미사일의 탄두를 완전히 파괴함으로써 파편으로 인한 피해나 핵이나 화학오염물질에 등에 의한 2차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어 대량살상무기에 매우 효과적이다.사드는 발사대 6기(1기당 8개 미사일 탑재)와 레이더 및 통제 및 통신장비 등으로 1개 포대가 구성된다. 이 가운데 사드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AN/TPY-2 레이더는 위상배열레이더로 종말단계방식과 전진배치방식의 2가지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 닉슨 독트린이란 지난 1969년 미국이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아시아 개입에 대한 회의감을 느껴 ‘아시아의 문제는 아시아인이 해결하라’며 발표한 대아시아 정책이다. 이 당시 미국이 의미한 ‘아시아의 손’이란 일본을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는 변화하였고 닉슨 독트린 발표 당시에는 개도국이었던 중국이 현재 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려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다시 아시아로의 회귀를 외치며 일본과의 협력관계를 공고히 하려하고 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미국의 일본 자위권 지지와 일본에의 사드 배치가 이를 보여준다.사드논란 이전까지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2008년 양국 정상의 상호 국빈방문 이후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로 격상되었다(강효백, 2017). 특히 중국은 일본의 군국주의 재진출을 막고, 중국 중심의 아시아 통합을 이루기 위한 전략적 가치로써 한국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한국에 대한 중국의 인식은 지난 2015년 한·중 FTA 체결 의도에도 드러난다. 중국은 2001년 WTO에 가입한 이후 빠르게 주변 국가들과 FTA를 맺어왔다. 중국이 FTA를 추진하는 이유는 경제적인 목적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경제적인 접근을 통해 아시아의 통합과 미국의 영향력 약화라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이다.중국은 특히 한국과의 FTA 체결을 위해 적극적인 구애를 해왔다. 그 이유는 첫째, 중국은 동아시아 지역의 경제통합에서 남중국해 주변과 환황해 지역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한국과 SEAN을 각 지역의 중추적 역할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일본, 미국과의 주도권 경쟁에 대처하기 위해서이다. 2007년 한국이 미국과 FTA를 체결하게 되면서 한국에 대한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이 한국과 먼저 FTA를 체결하게 되면 중국이 주도권 경쟁에서 밀리게 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한·중 FTA를 추진한 것이다. 셋째, 동북3성 개발의 촉진을 위해서이다. 이는 정보화를 통한 산업화 추진이라는 동북진흥정책의7).
    관광학| 2017.06.26| 28페이지| 3,000원| 조회(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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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전쟁이 미국 대외정책에 미친 영향
    한국전쟁이 미국의 대외정책에 미친 영향한국전쟁은 미국으로 하여금 한반도에 대한 전략적 가치를 재평가하는 기회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한국전쟁 이전 미국은 한반도에 대한 전략적 가치를 매우 낮게 평가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통해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재평가하게 되었고, 이 시기에 재평가된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바탕으로 형성된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은 향후 수십 년 간 미국의 한반도 정책의 기조가 되었다.태평양 지역이 미국의 국가 안보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였다.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 사이에 위치한 미 대륙의 지정학적 위치를 자국의 자연적인 보호막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발달된 기술과 교통수단을 바탕으로 전개된 2차 세계대전을 치루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미국은 더 이상 대서양과 태평양이 자연적인 보호막의 역할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2차 세계대전 이후 태평양을 미국의 국가 안보에 있어 중요한 지역으로 평가하게 된 것이다.그런데 한국전쟁 이전까지 태평양 지역에 대한 미국 군사·외교 정책의 주된 관심사는 일본이었다. 당시 미국은 일본이 그들의 영향력 하에 존재할 때 대륙에서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어떠한 세력에 대해서도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반면 한반도에 대해서는 단지 일본의 안보에 직접적으로 위협이 될 만한 요소와 일본으로 가는 해상 무역로의 안전보장에 대해서만 그 전략적 이익이 두어질 뿐이었다.이처럼 미국은 한반도에 대한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했으며, 당시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점령군의 기본정책의 목적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을 자극하지 않으며, 남한의 치안을 유지하는 데에만 한정시켰다. 이는 당시 미국과 소련의 유럽에서의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한반도가 미국의 본질적 이익이 걸린 지역은 아니지만 소련봉쇄의 목적상 남한지역에서 만이라도 자신들의 영향력을 독점함으로써 소련의 영향 하에 놓이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 것이었다.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의도와는 달리 미국과 소련의 관계는 유럽과 한반도에서 점차 악화되어 갔다. 이에 따라 미국은 이러한 시기적 상황과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에 대한 낮은 평가를 바탕으로 이후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 주한미군 철수, 애치슨 라인 설정 등을 통해 대 한반도 정책을 수행해 나갔다.이 시기의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정책 가운데 주한미군의 철수와 애치슨 라인의 설정으로 한반도를 미 극동방위선으로부터 제외시킨 것은 한국 전쟁의 발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소극적 입장이 북한으로 하여금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미국이 즉각적으로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오판을 낳게 하여 남침을 더욱 고무시킨 것이다.그러나 미국이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을 철수시킨 데에는 한반도에 대한 낮은 전략적 가치 평가를 바탕으로 한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냉전체제가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면서 미국의 군사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남한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4만 5천명 규모의 2개 사단을 타 지역으로 옮기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한반도에서의 미군의 철수를 통해 신생공화국의 지위에 있어서의 강대국의 제국주의적 간섭이라는 국제사회의 비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세 번째 이유는 소련 측의 양국 철수 제의 때문이었다. 소련은 남한과 북한에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주 북한 소군을 철수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더 이상 남한 내에 군대를 주둔시킬 명분이 사라진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을 근거로 내세워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UN에 이관시킴으로써 위신 추락 없이 남한 내의 미군 철수를 결정하였다.한편 미국은 미군철수와 관련하여 미군철수가 남한을 소련에 포기하는 것이 아닌 형태로 한국문제에 대한 해결방법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당시 남한은 단독정부 수립 이후 내부반란과 인플레이션 현상 등 내부불안에 의한 자체붕괴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미군의 철수에 있어 더욱 조심스러웠다. 따라서 이에 대한 강구책으로 남한을 보호할 수 있도록 경비대를 증강 무장 훈련시키기 위한 대한군사정책을 수립하였다. 그 내용은 1948년 12월까지 주한미군을 한국으로부터 철수시키며, 한국이 내부안정과 북한의 침략에 대처하도록 한국의 경비대를 확대, 훈련, 무장시키며, 미국이 전쟁상태에 붙잡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보다 근본적으로 한국군의 공격력이나 외부침공을 격퇴할 수 있는 정도의 방어력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이처럼 미국은 한국전쟁 이전에 한반도의 안보에 대해 소극적인 정책을 펼쳤다.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남한에 대해 소극적인 정책을 펼치던 미국은 한국전쟁을 태평양 지역의 안전과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라고 하여 한반도 전쟁에 적극 개입하였다. 이는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소련의 음모로 파악하여 세계평화체제의 구축이라는 미국의 원대한 계획에 대한 공산세력의 도전으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즉, 미국은 한국전쟁을 공산주의 세력의 태평양으로의 진출로 파악한 것이며, 이는 미국에게 있어 극동아시아에서의 미국 이익의 포기를 의미하며 적대세력의 미 서부지역에 대한 직접 공격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미국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한이 공산세력에 의해 함락된다면 공산주의자들은 미국해안에 보다 가까운 나라들까지 유린할 자신감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무엇보다도 소련이 2차 세계대전 전후 일본지역을 양분하는 것을 제안했던 것으로 보아, 한국전쟁 이후의 분쟁을 일본으로까지 확산될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전쟁 이전부터 일본을 미국의 태평양 지역에 대한 안보정책의 주요 대상국으로 여겨왔던 미국에게 한국전쟁은 예방전쟁의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사회과학| 2017.06.26| 3페이지| 1,000원| 조회(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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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년대 이후 북한의 언어정책
    북한의 언어정책-문화어와 북한의 언어관을 중심으로-경기대학교 국제관계학과 201214643 임 소 정많은 사람들이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지배한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말은 말 그대로 우리가 어떠한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생각이 결정된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같은 천 조각을 보더라도 우리가 그 천 조각을 행주라고 부를 때와 걸레라고 부를 때 느끼는 바는 매우 다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천 조각을 행주라고 부를 때보다 걸레라고 부를 때 더 더럽다고 느낄 것이다. 물론 언어가 어떠한 상황에서나 인간의 사고를 완전히 지배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언어가 인간의 사고에 큰 영향을 미치며, 더 나아가 사회 전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언어의 이러한 특성을 이용하여 과거부터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의 사고를 왜곡시키고 선동하기 위한 수단으로 언어를 사용한 사례는 다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북한은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립 직후부터 다양하고 지속적인 언어정책을 수행함으로써 언어를 혁명의 도구로 이용해왔다. 그렇다면 왜 1960년대 이후의 북한 언어정책이 특히 중요한 것일까? 이는 1960년대 중엽 김일성이 서울말이 표준어가 아닌 평양말을 표준어(문화어)로 하겠다고 선언하고, 북한의 주체사상이 대두됨에 따라 이 시기의 언어정책이 이전의 언어정책과는 다른 성격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1960년대 중엽 이전의 북한의 언어정책은 크게 신철자법 시대와 철자법 시대로 나뉘어 전개되었다. 신철자법 시대는 1947년 발족된 조선 어문 연구회가 조선어의 규범화와 정화, 한자 폐지, 조선 문자 개혁, 과학적 철자법 개정 등을 주요 연구과제로 삼아 『조선어 신철자법』을 공포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시대의 북한 국어연구는 소련 언어학의 대토론에 영향을 받으면서 조선어의 문법구조, 어휘 구성과 기본 어휘, 조선어 발달의 내적 법칙 등에 대한 연구로 본격화 되었으며, 이 외에도 문맹 퇴치 운동과 말다. 김일성의 2차 교시는 1966년 “조선어의 민족적 특성을 옳게 살려 나갈데 데하여”라는 제목으로 행해졌는데, 그 내용은 1차 교시와 크게 다를 것이 없으나 “문화어의 선언”과 『조선말 규범집』을 승인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낳았다. 또한 이 시기에는 북한의 독자적 사회주의 사상인 주체사상이 대두됨에 따라 북한에서의 민족의 개념은 그 존립의 의미를 더욱 확실이 가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민족의 징표로써 민족어가 더욱 강조되게 되었다.1966년 김일성은 2차 교시에서 표준어로 사용하는 서울말은 ‘남존여비사상 썩어빠진 부르주아적 생활이 지배하는 말’, ‘고유한 우리말은 얼마 없고 영어, 일본말 한자어가 섞인 잡탕말’이라고 지적하면서 사회주의적 민족문화가 꽃피는 혁명의 수도 평양의 아름다운 말을 표준어로 삼을 것을 지시했다. 이 교시를 바탕으로 확립된 것이 평양말을 중심으로 한 북한의 표준어인 문화어이다. 또한 김일성은 교시를 통해 평양말의 우수성을 강조하였는데, 김일성이 평양말의 우수성의 근거로 제시한 것은 다음과 같다.민족어의 모든 말소리와 서로 다른 지역의 방언들의 말소리를 충분히 나타낼 수 있다.다른 나라 말의 발음도 원만히 표현할 수 있다.어휘의 구성이 풍부하다.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사회생활의 모든 대상과 현상들을 전부 민족글자로 표기할 수 있다.이러한 평양말의 우수성에 대한 강조와 함께 이후 북한에서는 평양말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어를 살리기 위한 말 다듬기 운동이 북한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다. 말 다듬기 운동은 몇 가지 원칙에 따라 시행되었는데, 먼저 한자어를 한글 고유어로 대체하며, 고유어가 없을 경우에는 풀이말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자어의 경우에도 대중들에게 이미 확고하게 인식되어 우리말로 굳어진 것은 한자어를 그대로 사용하며, 한자어와 고유어가 뜻이 꼭 같지 않을 경우에는 한자어와 고유어를 각각 그대로 둔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전자의 예로는 ‘학교’나 ‘방’ 등이 있고, 후자의 예로는 ‘지하’가 있는데 ‘지하’의 경우에 ‘땅동지의 만수무강을 삼가 축원합니다.또한 북한은 말 다듬기 운동의 일환으로 새로 들어오는 외래어를 그때그때 우리말로 고쳐 사용한다. 그러나 많은 외래어를 그때그때 우리말로 순화시켜 새로운 언어로 표기하고 이를 대중들 사이에 일반화시킨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이러한 점 때문에 언어의 자주성을 강조하는 북한에서도 최근 들어 국제공용어의 사용이 확대되고 있다. 특히 과학 기술 용어를 고칠 때에는 전문가들과 협의해야 하며, 다른 나라의 고유 명사는 일본어와 중국어로 발음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 발음대로 하는 것이 좋고, 나라 이름도 그 나라말로 써야 한다고 한다. 말 다듬기 사업을 통하여 순 우리말로 대체된 외래어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에끄자멘 – 시험, 클라스 – 학급, 뿔란 – 계획템포 – 속도, 우와기 – 양복저고리, 즈봉 – 양복바지지금까지 북한의 표준어인 문화어와 문화어의 대중적인 사용을 현실화 시킨 말 다듬기 운동에 대해 알아보았다. 문화어는 1960년대에 이르러 북한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지만, 한자어나 외래어가 아닌 자주성을 지닌 언어를 사용하자는 것은 일제 식민지 시대의 항일 투쟁 정신과 일본의 민족어 말살정책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된 것으로, 북한 사회의 형성과 관련하여 북한이 역사적 타당성을 지닌 사회로 발전하기 위해 필연적인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또한 해방 이후에도 남한과의 지속적인 긴장과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 중소분쟁으로 대표되는 국제공산주의 사회의 위기 속에서 자립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러한 인식이 주체사상으로 이어져 자연스럽게 사대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이 되어 한자어나 외래어가 아닌 고유어를 사용하자는 문화어 운동이 국가 정책의 일환으로 전개된 것이다.위에서도 말했다시피 북한의 문화어를 중심으로 한 언어정책은 인제 식민지 시대의 항일 투쟁 정신과 일본의 민족어 말살정책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해방 이후 남한에서도 문맹퇴치운동, 국어군화운동 등의 사업으로시에 투쟁과 사회 발전의 도구이다. 두 번째는 언어의 비 계급성이다. 이는 언어는 계급성이 없으며 전 인민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언어가 존재하며 또 그것이 창조된 것은 인간 교제의 도구로서 사회 구성원들의 계급적 지위와는 관계없이 평등하게 복무하는 그들에게 공통적이며 사회에 유일한 것으로 되기 위해서이다. 마지막으로 사회주의 승리 이후에 전세계가 공사주의로 되는 날, 수백 개의 민족어들로부터 분리해 나온 가장 풍부하고 유일한 지대어가 하나의 공통적인 국제어로 합류한다는 국제어 합류설이다.김일성은 1, 2차 교시 이후 스탈린의 언어 도구관을 계승한 것으로 보이는 주체적 언어 이론을 주창했다. 주체적 언어 이론이란 주체사상을 사상 이론적, 방법적 기초로 하고, 주체 사상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구현한 새로운 언어 이론의 체계로, 언어학에서의 주체를 세워 민족어를 체계적으로 발전시키며, 사람들이 그것을 쓰는 데서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도록 하는데 그 기본요구가 있다고 한다.주체적 언어 이론에서는 언어를 자주적 민족을 특징짓는 표징의 하나로써 바라보며, 경제, 문화, 과학기술 등 사회주의 건설의 모든 분야에서 언어가 힘있는 무기로 이용될 수 있다고 한다. 먼저 경제적 측면에서 언어는 근로대중을 높은 정치적 자각과 창조적 적극성으로 고양하고 무장시킴으로써 경제활동을 위한 동기를 마련할 수 있다. 다음으로 문화적 측면에서 언어는 문화를 창조하고 보존하여 민족의 것으로 되게 함으로써 문화 생활에서의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입장을 지켜나갈 수 있게 한다. 마지막으로 과학기술의 측면에서 언어는 인민 대중으로 하여금 과학기술을 마음껏 소유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을 보장할 수 있다.또한 주체적 언어 이론은 언어의 사명이 언어와 사회적 의식, 그리고 언어와 혁명투쟁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먼저, 언어와 사회 의식과의 관계에서 언어는 혁명적 세계관의 형성과 사회 의식 발전에 크게 작용하여 사람들을 낡은 사상의 구속에서 해방시투쟁에 이바지 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또한 주체적 언어 이론에서는 언어가 이러한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언어 발전이 민족적 특성을 살리는 것을 기본 바탕으로 하여 민족 문제와 결부시키고, 과학문화 발전을 충분히 고려하며, 세계 공통적인 방향에서 쉽게 접근하는 것을 원칙으로 제시했다.지금까지 북한이 언어정책을 전개해 나가는 데에 있어 기본이 된 문화어와 북한이 언어정책을 지속적이고 연속적으로 추진해나갈 수 있는 이유로서 북한의 언어관에 대해 알아보았다. 북한이 언어정책으로 지속적이고 연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언어를 이유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닌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언어가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사람들의 사고에, 나아가 한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큰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러나 특히 북한은 해방 직후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에 사회주의 사상을 북한 사회 내에 정착시켜야 했기 때문에 남한보다 더 체계적이고 주도 면밀하게 언어정책을 전개해 나간 것 같다.한자어나 외래어를 고유어로 대체하려고 시도한 노력은 남한에서도 있었다. 그러나 남한에서의 이러한 언어정책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으며, 오늘날 남한에서는 언어파괴가 하나의 사회적 문제로 대두될 만큼 언어사용에 있어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수 백 만명의 대중이 실생활에서 직접 사용함으로써 실현될 수 있는 언어정책을 북한에서는 지속적이고 연속적으로 수행해 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그러나 북한은 언어를 독재의 수단으로 활용함으로써 앞의 북한 말 다듬기 운동의 원칙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정치용어만 예외적으로 한자어의 수정을 금하는 것과 같은 언어정책에서의 모순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북한 언어정책에서의 모순뿐만 아니라 최근 북한에서도 어느 정도의 한자어나 외래어의 사용이 인정되고 있고, 언어적인 측면 외의 사회·문화·경제적으로도 서양 문물의 침투가 이루AT 6
    사회과학| 2017.06.26| 6페이지| 1,500원| 조회(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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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장의 힘, 면암 최익현 평가A+최고예요
    노장의 힘, 면암 최익현과 목 명 : 인물로 본 역사담당교수 : 이 승 민학 과 : 국제관계학과학 번 : 201214643이 름 : 임 소 정제 출 일 : 2012년 11월 7일목차1. 서론 ------------------------------------------ p.12. 본론2-1. 구한말의 시대적 상황과 면암 최익현의 사상 - p.22-2. 면암 최익현의 흥선대원군 탄핵 ------------- p.32-3. 면암 최익현의 개항반대 -------------------- p.42-4. 면암 최익현의 항일투쟁 -------------------- p.53. 결론 ------------------------------------------ p.61. 서론나는 우리나라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을까? 나는 나 스스로에게 이러한 질문을 자주 던져본다. 그 때 마다 항상 나오는 답은 ‘잘 모르겠다, 별로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이다. 정치인들의 부정부패, 길거리에서 서로 손가락질 해가며 싸우는 아줌마, 아저씨들, 우리나라를 청소년 자살률 1위 국가로 만드는데 크게 한 몫 한 치열한 입시경쟁 등,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우리나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 같다.그러나 그렇다면 나는 왜 월드컵이나 올림픽에 우리나라가 출전했을 때 그렇게도 우리나라를 마음 깊이 응원하는 것일까? 나는 왜 다른 나라가 우리나라에 대해 모욕적인 말을 했을 때 그렇게도 분노를 하는 것일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나는 우리나라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때에 따른 얕은 애국심도 애국심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물론 우리나라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많은 단점들이 있고, 이러한 단점까지 모두 감싸 안으며 ‘우리나라니까 괜찮아’ 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내게는 이러한 우리나라의 단점을 고쳐 우리나라를 더 살기 좋은 나라로 바꾸고자 하는 용기가 없다.면암 최익현 선생을 생각 할 때면 이러한 나의 생각들은 더욱 더 부끄러워진다. 면암 최익현 선생은 선비였지만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닥쳤을 때는 붓 대신 칼을 들 줄 아는 진정한 애국지사였다고 할 수 있다.나는 진정으로 우리나라를 사랑하고 싶고, 우리나라가 위기에 닥쳤을 때 앞서 나가 싸울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싶기에 면암 최익현 선생을 이 과제의 주제로 선택했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우리나라를 자기 자신보다도 더 사랑했고 그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할 줄 알았던 최익현 선생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2. 본론2-1. 구한말의 시대적 상황과 면암 최익현의 사상최익현은 조선조 순조 33년(1883)에 경기도 포천군 내북면 가채리에서 최지헌의 2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庵)이다. 그는 14세 때에 부친의 명에 따라 성리학의 거두인 화서 이항로의 문인이 되어, 성리학의 기초를 닦고 우국애민적인 위정척사 사상을 이어받았다. 23세 때에 명경과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고 재임 중 꾸준히 부정부패와 구국항일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였다.최익현이 활동한 19세기는 한국근현대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전환기였다. 우선 대내적으로 19세기 중엽은 안동 김 씨가 권력을 독점함에 따라 정치적으로 각종 부정부패가 만연하며 왕권이 매우 하락한 시기였다. 특히 삼정의 문란으로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잇달아 일어나면서 조선의 통치 질서가 근본적으로 동요되고 있었다.19세기는 대외적으로도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제국주의가 등장하면서 서양세력이 동쪽으로 진출을 하기 시작했다. 서양세력의 침략대상에 있어서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는 1876년 일본을 시작으로 여러 열강들과 불평등 조약을 맺으며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전통과 유교사상은 물론 나라 자체가 존립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이러한 내우외환의 시기에 1876년의 개항을 전후로 하여 전통을 지키려는 위정척사파와 외래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개화파가 등장하였다. 이 중 최익현은 대표적인 위정척사파의 인물로 척사 사상은 역사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보수주의적인 사상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최익현을 포함한 위정척사론자들의 상소를 분석해 보면, 대체로 자존과 애민, 애국의 바탕에서 주체를 지키려 하였던 자아실현의 정신이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최익현은 형이상학적인 이론적 연구보다는 현실적인 실천 철학으로서 우리의 정통을 수호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위정척사 사상은 진보적인 개화사상과 방법만 다를 뿐 항일구국과 자주독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이념이었다고 할 수 있다.2-2. 면암 최익현의 흥선대원군 탄핵최익현이 관직에 오른 후 본격적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1860년대 당시 하늘을 치솟을 듯한 기세를 자랑하던 흥선대원군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부터였다.흥선대원군은 1963년 철종이 사망하자 왕위에 오른 어린 아들, 고종을 대신하여 정권을 잡았다. 당시 조선은 세도정치로 인해 민생이 혼란스럽고 왕권이 매우 하락해 있었다. 이에 오랫동안 세도가문에 의해 무시당해왔던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를 타파하여 왕권을 회복하고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그러나 왕권강화와 민생안정을 위한 흥선대원군의 정책에는 많은 반발이 있었다. 백성들의 원성을 산 흥선대원군의 대표적인 정책으로는 왕권강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경복궁 중건사업이 있다.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은 당백전과 원납전을 발행하여 조선의 경제구조를 어지럽히고 양반의 묘지림을 벌목하며 무리하게 서민들의 노동력을 징발하는 등의 이유로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이에 최익현은 1868년 최익현은 토목역사를 중지하고, 수렴정치를 금하며, 당백전을 혁파하고, 4대문 문세징수를 금할 것을 주장하는 시폐 4조의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로 인해 최익현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지만 이후 최익현은 흥선대원군의 노여움을 사 돈녕부 도정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는데, 곧바로 사직하고 은거했다.최익현은 1873년 다시 승정원 동부승지로 임명되었다.라서 최익현은 이러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를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계유상소》를 올렸고, 당시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고종이 최익현의 《계유상소》를 받아들이면서 흥선대원군은 실각하게 되었다.이후 최익현은 고종의 신임을 사 호조참판에 임명되어 그동안의 누적된 폐단을 바로 잡으려 하였으나 기득권층의 반발을 얻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2-3. 면암 최익현의 개항반대1875년, 최익현이 2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왔을 때 조선은 고종의 친정체제가 수립이 되어 명성황후가 집권을 하고 있던 시기였다. 당시 민씨 정권은 일본이 운요호사건을 빌미로 조선에 개항을 요구하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려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이에 강력히 반발한 사람이 최익현이었다. 최익현은 강화도에서 조약체결을 위한 담판이 진행 중이던 1976년 1월 23일 도끼를 들고 대궐 앞에 나아가 척화상소를 올렸다. 이는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면 도끼를 들어 자신의 목을 치라는 시위였다.상소문에서 최익현은 일본과 조약을 맺지 말아야하는 이유를 5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최익현은 강화도 조약이 일본의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지금 당장에는 강화를 맺는 것이 별 탈이 없어보일지 몰라도 결국엔 우리가 그들의 탐욕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둘째로, 일단 강화를 맺으면 교역을 하게 되는데, 일본의 상품은 모두 사치스럽고 음란한 것이며, 또한 수공업품이므로 무한한 것이지만 우리의 물화는 모두 필수품이며 땅에서 생산되는 유한한 것이기 때문에 이내 우리는 황폐해 질 것이라고 주장했다.셋째로, 최익현은 일본인이 비록 왜인이나 그들의 기실은 바로 양적이기 때문에 강화가 한번 이루어지면 사학이 교역을 타고 끼여 들어와 온 나라에 퍼져 인륜이 쇠퇴할 것이라는 왜양일체론을 내세웠다.또한 넷째로, 일본인이 우리나라에 왕래를 하게 되면 우리의 재산을 탈취하고 부녀자를 능욕하는 등 인간의 도리가 땅에 떨어지고 백성이 안주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회, 문화, 역사 등의 위기를 통찰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최익현은 이 상소로 인해 흑산도로 유배되었고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어 최익현이 우려한 사항을 현실로 맞아들이게 되었다.2-4. 면암 최익현의 항일투쟁개항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흑산도로 유배된 후, 최익현은 약 20년간 침묵을 지켰다. 그 20년간 임오군란이나 갑신정변 등으로 나라 안은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왜의 침략 또한 심화되어 갔지만 최익현은 침묵을 잃지 않았다. 이러한 최익현의 기나긴 침묵을 깬 것은 1895년 을미사변의 발발과 단발령의 단행이었다.1895년 단발령의 단행으로 의병이 일어나 일본에 대하여 무력으로 저항하려는 세력이 커지자 당황한 조정은 당시 민간에서 신망이 두터운 최익현으로 하여금 의병해산을 권유했다. 그러나 최익현은 오히려 상소문을 올려 “내 머리는 잘라도 부모님이 준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며 의병해산이 아닌 그 의기를 바탕으로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는 자주의 항쟁력으로 삼자는 방향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상소문으로 인해 최익현은 투옥되었다.이후 1904년, 고종이 최익현에게 정치적 자문을 구하여 최익현은 조정에 나가 계속해서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최익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05년 조선은 결국 일제와 침략조약인 을사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마자 최익현은《청토오적소》와 재소를 올려 망국조약에 참여한 을사5적의 처단을 주장하고, 일본의 죄목 16개조를 나열한 격문을 작성하여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최익현은 그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상소운동의 한계를 깨닫고 마침내 의병대열에 나아가 무력투쟁에 차여하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70을 넘겨 백발이 되었지만 최익현은 나라를 위해 전국 방방곳곳에 대의의 깃발을 내건 것이다.최익현은 흥주 의병투쟁을 지도한 후, 1906년 4월에 의병장 임병찬과 함께 전북 태인의 의병 투쟁을 준비하였다. 최익현이 “국가가 위급존망의 지경에 있으니 의병을 일으키는 것이 의로운 본분”임되었다.
    인문/어학| 2017.06.26| 8페이지| 1,000원| 조회(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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