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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후반 조선학계의 양명학 비판론과 문묘제도 개정 논의 (The criticism of Yang Myung-hak and the discussion on the revision of the Munmyo system in the academic world of Joseon. in late 16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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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등록일 2025.03.19 최종저작일 20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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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후반 조선학계의 양명학 비판론과 문묘제도 개정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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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정보

    · 발행기관 : 역사실학회
    · 수록지 정보 : 역사와 실학 / 76호 / 39 ~ 73페이지
    · 저자명 : 정두영

    초록

    양명학이 전래되고 수용․비판되었던 명종(明宗) 말 선조(宣祖) 초는 사림 세력의 집권에 따른 정치 질서의 재편이 요구․시도되던 시기였다. 그 결과 김세필(金世弼)․박상(朴祥)와 같이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경우, 홍인우(洪仁祐)․남언경(南彦經)․노수신(盧守愼)과 같이 양명학을 적극적으로 이해․수용하려는 경우, 이황(李滉)과 그 문하 및 그에 동조하는 학자들과 같이 이단(異端)으로 규정․배척하는 경우, 유성룡(柳成龍)․이정구(李廷龜)처럼 양명학을 우호적으로 인식했다가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경우, 선조(宣祖)처럼 양명학보다는 왕수인(王守仁) 개인의 공업에 주목하는 경우 등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학문적 입장에 따라 양명학에 대하여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이런 다양한 반응이 가능했던 것은 양명학 문헌의 유포에 특별한 제약이 없었고, 심학(心學)에 대한 평가가 경직되지도 않았으며, 또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강학과 토론 등 양명학에 대한 학문적 검토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황의 양명학 변척이 이루어지면서부터 양명학에 대한 학계의 인식은 일변하였다. 주자학을 체계화하고 주자도통의 정립을 시도함으로써, 주자학적 정치질서를 확립시키는데 주력했던 이황은, 양명학이 주자학 정치이념을 확고하게 정립․확산시키는 데 큰 장애가 될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양명학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하였다. 이황 문하들도 이황의 입장을 계승하여 양명학을 변척했다. 그 결과 주류 학계의 일반적 입장은 점차 양명학을 이단(異端)으로 규정하고 배척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이황과 그 문하의 변척 활동에 따라 양명학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일반적인 인식으로 자리잡아 갔으며, 양명학이 거론될 때마다 이황의 변척이 그 기준이 되고 있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명의 조선 문묘제도 개정 요구와 이에 대한 조선 조정의 대응 양상이었다.
    선조 34년(1601) 명의 요구로 시작된 문묘개정 논의의 초점이 되었던 것은 호거인(胡居仁) 진헌장(陳獻章), 왕수인(王守仁), 설선(薛宣) 등 중국의 유현(儒賢)을 문묘에 종사하는 문제였다. 퇴계 이황의 양명학 변척에 따라 양명학은 이단으로 규정되는 것이 학계의 공론(公論)이었고, 이는 주자의 성리학만이 정학(正學)이며, 그것과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이단(異端)이라는 주자도통의 관점이 그 기준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육구연(陸九淵)․왕수인(王守仁)의 종사(從祀)는 절대 허용할 수 없는 문제였다. 명의 영향력이 이미 사라진 시점에서도 똑같은 논의가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 논의가 단순한 제도개정 문제가 아니라 이단에 대한 엄격한 비판을 통해 주자정통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개입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영어초록

    At the end of King Myeongjong and King Seonjo, where Yang Myung-hak was introduced, accepted, and criticized, it was a time when the reorganization of the political order was demanded and attempted according to the power of the Sarim forces. As a result, in the case of critically reviewing such as Kim Se-pil and Park Sang, in the case of actively understanding and accepting Yang Myung-hak, such as Hong In-woo, Nam Eon-kyung, and Noh Su-sin, and in the case of rejecting the rules or the scholars who sympathize with him, Yuseong. These various reactions were possible because there were no special restrictions on the distribution of Yangmyeonghak literature, the evaluation of psychology was not rigid, and academic reviews of Yangmyeonghak such as lectures and discussions were conducted in this atmosphere.
    Since Yi Hwang's rejection of Yangmyeonghak, the academic perception of Yangmyeonghak has changed. Yi Hwang, who focused on establishing a runner-up political order by systematizing runner-up and attempting to establish runner-up communication, judged that Yang Myung-hak would be a major obstacle to firmly establishing and spreading the runner-up political ideology. Accordingly, Yang Myung-hak was defined as heresy and rejected. Yi Hwang's servants also succeeded Yi Hwang's position and transformed Yang Myung-hak. As a result, the general position of the mainstream academia gradually tended to define and reject bimyunghak as a heresy.
    According to Yi Hwang and his subordinates' transformational activities, this perception of Yang Myung-hak became a general perception, and whenever Yang Myung-hak was mentioned, Yi Hwang's exclusion was the standard. A good example of this was the demand for revision of the Joseon Munmyo system and the response of the Joseon adjustment to this.
    The focus of the discussion on the revision of the tomb, which began at the request of King Seonjo in the 34th year of King Seonjo (1601), was on the issue of Chinese Yu Hyeon, including Ho Geoin, Jinheonjang, Wang Suin, and Seolseon, engaged in the tomb. According to Toegye Yi Hwang's rejection of Yang Myung-hak, Yang Myung-hak was defined as heresy in the academic world, and only the Neo-Confucianism of the runner was suspended, and if it deviated a little from it, the perspective of Ju Ja-Dotong was the standard. From this point of view, the work of Yuk Gu-yeon and Wang Su-in was absolutely unacceptable. The fact that the same discussion is repeated even at the time when the influence of the title has already disappeared shows that this discussion was not just a matter of institutional amendment, but the purpose of strengthening the self-government through strict criticism of heresy.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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