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노동권의 발전 과정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상세정보

소개글

"대한민국 노동권의 발전 과정"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한국노동운동의 발전과정
1.1. 일제하의 노동조합운동
1.2. 해방 이후부터 5.16 혁명까지
1.3. 한국노동운동 구분 및 특징
1.4. 정부의 노동정책 구분과 특징
1.5. 노동조합의 변천사

2. 스웨덴 노동시장체제의 성격
2.1. 스웨덴 모델의 특징
2.2. 노동시장 조직과 중앙임금협상
2.3. 적극적 노동시장정책과 완전고용

3. 사민주의적 노동시장체제의 위기와 변화
3.1. 스웨덴 노동시장체제의 위기와 조정
3.2. 임금협상의 분권화
3.3. 실업증가와 노동시장의 변화

4. 사민주의적 노동시장체제의 지속과 성과
4.1. 높은 경제활동 참가율
4.2. 낮은 실업률(장기 실업률)
4.3. 적극노동시장정책을 통한 완전고용 달성
4.4. 사민주의적 노동시장체제의 지속 요인

5. 97년 경제위기 이후 한국의 노동시장체계 변화
5.1. 외환위기 이전 한국 노동시장의 특징
5.2. 외환위기 이후 한국 노동시장의 경향
5.3. 한국 노조의 특징
5.4. 스웨덴 노동모델과 한국 노동모델의 차이점

본문내용

1. 한국노동운동의 발전과정
1.1. 일제하의 노동조합운동
1.2. 해방 이후부터 5.16 혁명까지

1960년 3월의 제4대 정. 부통령 선거는 집권당인 자유당의 부정선거였다. 선거당일인 3월 15일 투표용지를 받지 못한 마산 시민들의 데모가 도화선이 되어 4월 19일 전국 학생들이 궐기하여 데모를 벌이면서 이에 시민들이 합세하자 4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을 대통령직에서 하야(下野) 하므로 자유당 정권은 붕괴되고 말았다. 4.19의 학생의거는 10여년 계속되어온 독재체제를 전복시키고 자유를 되찾은 혁명이었으며 이 혁명은 학생들이 선봉적 역활을 하였지만 독재와 부정축재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4.19에 뒤이어 각급 노동조합에서는 자유당의 비호를 받아 집권을 유지해온 노동조합간부들의 정화운동이 전개되었다. 4월30일 한국운수분회에서 반장들이 항만자유노조간부들의 사퇴를 요구하였고 5월3일 인천항만 자유노조산하 수천의 근로자들이 근로자의 주권회복, 체불노임 청산, 전국적으로 파문을 일으킨 비료 조작비에 대한 책임규명을 위한 총궐기가 있었고, 이에 5월5일 33개 분회중 17개 분회장들이 회합, 노동조합 수습방안 을 협의하였다. 5월 10일에는 구세력들이 대한노총수습위원회의 명령지시라는 날조된 명목으로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려하여 조직분쟁이 노골화되었다. 5월 13일 군항분회에서는 조합원 총회를 개최, 질서 회복과 수습방안을 강구하였고, 5월 16일 한운분회에서 총회를 개최, 구 간부들의 대의원 선출을 불허하는 결의를 하였고, 5월 19일에는 신한분회의 수습총회를 비롯, 각 분회가 수습총회를 개최, 기존 노동조합 간부들을 제명처분하고 분회장을 직접투표로 선출, 분회운영을 민주적으로 개편함으로서 구 세력들이 자취를 감추고 민주노동운동에 서광이 비치게 되었다. 5월28일에는 새로 선임된 분회장들이 인천항만 자유노동조합 수습대의원대회 소집을 결의, 6월 1일에는 대의원대회를 개최하였다. 노동조합의 정화와 쇄신책이 부두전역에 퍼지고 있어 참되고 정상적인 노동 조합 개편이 전개될것을 기대 하였으나 대의원들의 산발적이고 무리한 개인 주장이 빈발하였으며 분회장 회의에서 사전에 노조임원을 배정한 사실이 탄로되어 대회는 규약개정까지 진행되고 대회의장단이 자취를 감추는 바람에 대회는 유회되고 말았다. 그 후 각 분회에서는 총회를 개최하고 노동조합 설립신고를 하는 사례가 발생하였는데 이것은 노동계의 분열과 대립을 가져온 것이 아니고 외부세력의 침투와 구세력의 재기를 방지하는데 그 목적이 있으며 또한 법적으로 노동조합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 후 제각각 노동조합들을 결성, 파업결의등을 하였으니 노동조합의 통일은 멀어져 갔다. 이 후 5.16을 맞이하게 되었다.


1.3. 한국노동운동 구분 및 특징

한국노동운동은 일제하의 노동조합운동, 해방 이후부터 5.16 혁명까지, 그리고 이후의 시기별로 구분될 수 있으며, 각 시기별 특징은 다음과 같다.

일제하의 노동조합운동은 민족해방운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노동운동의 양태는 일시적 쟁의투쟁과 지속적 단체 활동인 노동조합 운동으로 구분된다. 1919년 3·1운동 이전에는 노동쟁의가 점차 증대되었으며, 1920년대에는 문화정책으로 인한 노동쟁의와 반일감정이 결합된 쟁의가 나타났다. 1920년대 후기에는 노동자들의 쟁의투쟁이 조직화되어 전국적 성격을 가지는 대규모 파업이 발생하였다. 1930년대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합법적 쟁의행위가 어려워지면서 적색지하노조운동이 활성화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노동쟁의가 거의 불가능해졌다. 노동조합 발전 면에서는 1920년대에 조선노동공제회와 노동대회 등이 결성되었으며, 1930년대부터는 지역연맹 조직이 단위노조를 중심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부터 5.16 혁명까지의 노동운동은 4·19혁명을 통한 자유당 정권 붕괴 과정에서 전개되었다. 4·19 이후 각급 노동조합에서는 자유당 정권하의 어용노조간부들에 대한 숙청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후 노동계는 분열과 대립 속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고, 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다시 침체되었다.

한국노동운동은 일제하 식민지 해방운동의 성격, 권위주의 정권하에서의 민주화운동, 그리고 경제발전 과정에서의 생존권 보장운동이라는 세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일제하에서는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고, 해방 이후부터 5.16 혁명까지는 독재정권에 대한 민주화운동의 성격을 띠었으며, 경제개발 시기에는 노동자의 생존권 보장을 위한 투쟁이 주를 이루었다. 이처럼 한국노동운동은 식민지 지배, 권위주의 정권, 경제개발 등 한국 현대사의 주요 국면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 그 특징이다.


1.4. 정부의 노동정책 구분과 특징

정부의 노동정책 구분과 특징은 다음과 같다.

박정희 정부(1961 ~ 1979)는 권위주의적 노동통제 정책의 개시와 노동운동 탄압을 특징으로 한다. 1972년 유신 헌법 발표와 국가보위법 제9조 제2항을 통해 노동기본권을 유보하였다. 전두환 정부(1980 ~ 1987)는 박정희 정부의 권위주의적 노동통제 정책을 계승하였다. 1980년 개악적 노동법 개정, 기업별 노동조합 체제 강화, 행정관청 개입 강화, 3자개입 금지, 공기업과 방위산업체의 쟁의행위 금지 등을 신설하였다. 또한 범정부적 노동통제 기구인 「노동대책회의」를 출범시켰다. 이러한 노동억압 정책으로 인해 1987년 6월 노동자 대투쟁이 야기되었다.

노태우 정부(1988 ~ 1992)는 권위주의 노동통제 정책을 완성하였다. 여야 3당이 합의하여 통과시킨 노동관계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는 등 노동문제에 대응하였다. 김영삼 정부(1993 ~ 1997)는 과거와 단절하지 못한 문민정부의 노동정책을 펼쳤다. 노총과 경총의 임금합의는 부분적이고 포장된 노사자치주의에 그쳤으며, 노동법의 날치기 통과로 신노사관계 구상이 무산되었다.

김대중 정부(1998 ~ 현재)는 국민정부, IMF 구제금융과 함께 출범하였다. 제1기 노사정위원회 이후 제2차 노사정위원회에서 노사관계가 정상궤도를 이탈하였고, 일방적 구조조정으로 노동계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또한 노동조합의 투쟁주의 노선에 대한 일부 여론의 비판이 있었다.

이처럼 정부의 노동정책은 권위주의적 노동통제에서 출발하여, 노동기본권 제한, 노사관계의 정부 개입 강화, 강제적 조합주의 등의 특징을 보였다. 이에 따른 노동운동의 억압과 대립으로 1987년 6월 대투쟁과 같은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1.5. 노동조합의 변천사

노동조합의 변천사는 다음과 같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는 1945년 11월 5일 16개 산별 협동노조와 1,194개의 분회, 55만 3,408명의 조합원을 망라하여 결성되었다. 최저 임금제와 8시간노동제 실시, 실업·공장폐쇄 반대를 행동강령으로 내걸었다. 한편 1946년 3월 10일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이 결성되어 전평과 대립하였다.

1946년 하반기에 들어 식량사정이 악화되면서 9월 24일 부산 철도노동자 7,000여 명의 파업을 계기로 철도노동자 4만여 명이 임금인하와 해고반대, 쌀배급을 주장하면서 총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은 출판·교통·체신·전기노조 등으로 확산되어 26만여 명의 노동자가 총파업에 참가했다.

1947년 3월 22일에는 노동운동의 자유보장, 테러 반대, 경찰의 민주화, 생활보장 등을 요구하는 24시간 총파업이 일어났으나 2,000여 명의 검거자를 내고 실패로 끝났으며, 전평은 불법화되어 1950년대까지 대한노총이 유일한 노동단체였다.

그러나 1959년 10월 대한노총에 반대해서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결성되고, 1960년 4·19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무너지자 노동쟁의와 신규노조 결성이 활발...


참고 자료

주의사항

저작권 EasyAI로 생성된 자료입니다.
EasyAI 자료는 참고 자료로 활용하시고, 추가 검증을 권장 드립니다. 결과물 사용에 대한 책임은 사용자에게 있습니다.
AI자료의 경우 별도의 저작권이 없으므로 구매하신 회원님에게도 저작권이 없습니다.
다른 해피캠퍼스 판매 자료와 마찬가지로 개인적 용도로만 이용해 주셔야 하며, 수정 후 재판매 하시는 등의 상업적인 용도로는 활용 불가합니다.
환불정책

해피캠퍼스는 구매자와 판매자 모두가 만족하는 서비스가 되도록 노력하고 있으며, 아래의 4가지 자료환불 조건을 꼭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파일오류 중복자료 저작권 없음 설명과 실제 내용 불일치
파일의 다운로드가 제대로 되지 않거나 파일형식에 맞는 프로그램으로 정상 작동하지 않는 경우 다른 자료와 70% 이상 내용이 일치하는 경우 (중복임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 필요함) 인터넷의 다른 사이트, 연구기관, 학교, 서적 등의 자료를 도용한 경우 자료의 설명과 실제 자료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