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조선시대 인구"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조선시대 인구변화와 의학의 발전
1.1. 서론
1.1.1. 과거 인구의 중요성
1.1.2. 조선시대 인구 통계의 한계
1.2. 조선시대 인구 변동과 의학의 인식적 측면
1.2.1. 조선 초기 질병에 대한 의학적 접근
1.2.2.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전란의 영향
1.2.3. 대기근과 전염병 확산
1.2.4. 조선 말기 의학의 변화
1.3. 동의보감과 조선 의학의 발전
1.3.1. 동의보감의 편찬 배경과 특징
1.3.2. 동의보감의 의학사적 의의
2.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조선시대 인구변화와 의학의 발전
1.1. 서론
1.1.1. 과거 인구의 중요성
과거 인구는 국력과 연결될 만큼 그 중요성이 대두되던 시기였다. 당시 주된 생계유지 방법인 농업은 사용되는 토지 대비 확보되는 식량이 비교적 적었고, 한정된 영토와 자원은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였기에 군사력을 기반으로 한 다른 국가의 자원을 빼앗아 오는 것이 자원을 확보하기 가장 쉬운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고려 말~조선 초 한반도 만주지역에 거주하였던 여진족은 척박한 영토와 험난한 기후조건으로 인해 조선과 중국의 변방을 침략, 약탈하여 생계를 유지하곤 하였다. 이처럼 타국을 침략하기 위한 군사력, 이를 막아내기 위한 군사력 모두 인구를 기반으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 인구 변화는 국가 유지에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1.1.2. 조선시대 인구 통계의 한계
조선시대 인구 통계의 한계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호적제도에 기반한 인구 조사는 실제 인구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했다. 호적 등재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10세 미만의 아동들과 노비계층 등이 누락되어 실제 인구가 과소 집계되었다. 특히 전란 등으로 호적 등재가 지연되거나 기록이 소실되는 등 불가피한 사정으로 인구 통계의 정확성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둘째, 호적 조사 및 작성 과정에서 수령들의 축소 보고가 이루어졌다. 수령들은 자신의 고과 성적에 호구 증가가 직결되자 실제보다 인구를 축소하여 보고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해 인구 통계가 실제 규모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셋째, 조선 정부는 호구 조사를 국가정책 수립의 기본 자료로 활용하지 않고 단순히 백성의 수를 왕의 덕정을 나타내는 지표로 여겨 정확한 통계 작성에 관심이 부족했다. 때문에 인구 동태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인구 통계는 실제 인구의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에 걸쳐 일관된 원칙에 따라 작성된 호적 기록은 전통시대 인구 변동의 추이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1.2. 조선시대 인구 변동과 의학의 인식적 측면
1.2.1. 조선 초기 질병에 대한 의학적 접근
조선 초기 질병에 대한 의학적 접근은 성리학적 가치관에 기초하고 있었다. 조선은 건국 직후 성리학을 국가 운영의 근본으로 삼았는데, 여말선초 성리학적 의료관은 생리론(生理論), 병인론(病因論), 치료론(治療論) 세 가지 접근 방식이 주를 이루었다.
당시 문종의 아들 소현세자가 학질로 사망한 사례에서 잘 드러나듯이, 질병의 원인을 음양론에 기반하여 이해...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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