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신진사대부의 등장"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여말 선초의 신진사대부
1.1. 신진사대부의 등장과 분화
1.2. 정몽주
1.2.1. 염락이학(濂洛理學)과 경학적 학문 기조
1.2.2. 정명사상(正名思想)과 춘추정신(春秋精神)
1.3. 정도전
1.3.1. 정도전의 생애와 활동
1.3.2. 정도전의 혁명사상과 건국철학
1.3.3. 조선 건국 후 정도전의 활약과 최후
2. 고려 후기의 상황
2.1. 농장의 확대
2.2. 권문 세족과 신진 사대부
2.3. 공민왕의 개혁
3. 성리학의 수용과 발전
3.1. 성리학의 도입과 정몽주
3.2. 성리학의 사회 지도 이념으로의 부상
3.3. 성리학 기반 역사서 편찬
4.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여말 선초의 신진사대부
1.1. 신진사대부의 등장과 분화
고려 후기 개혁정치의 추진은 아직 중앙 정계에 확고한 정치적 기반을 갖고 있지 못한 신흥관료(新興官僚)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향리(鄕吏)출신을 비롯한 한미한 가문출신 관료들이 개혁세력이 되어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신장시키고 있었다. 이들은 세족(勢族)출신 사대부와는 달리 아직 문벌화(門閥化)하지 않은 가문배경의 소유자였으며, 특히 유교적 소양을 바탕으로 현실 비판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을 사대부 층의 한 갈래로 계보화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로 지칭할 만하다.
이제현(李齊賢)과 이색(李穡)을 중심으로 하는 공민왕대 신진사대부는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었다. 우선 이들은 좌주(座主), 문생(門生)관계 등 과거를 매개로 결속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이들은 대부분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공민왕대 개혁정치를 통해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신진사대부는 우왕대 이인임(李仁任) 정권이 등장하면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인임 정권은 족당(族黨)세력을 형성하여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경제적 부를 독점하고 있었다.
신진사대부들은 이인임 세력과의 정면 대결을 통하여 위기국면을 돌파하고자 하였으나, 정치적으로나 입지적인 면에서 무리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을 단행하면서 신진사대부가 마침내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신흥 무인세력(新興武人勢力)이 주도했지만, 여기에는 신진사대부의 정치적 이해관계도 개입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우선 신진사대부의 외교노선이기도 한 친명(親明)노선이 회군의 명분이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도전은 일찍부터 이성계와 교우관계를 가지면서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암시하고 있었다. 이처럼 위화도 회군은 정치권력의 장악을 목표로 하고 있던 이성계 등 신흥 무인세력과 현실개혁에 관심을 갖고 있던 신진사대부의 정치적 결합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위화도 회군 이후 집권세력으로 부상한 신진사대부는 권력장악에 성공한 후 사전개혁(私田改革)과 관제개편(官制改編) 등 개혁정치를 주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왕조교체의 기반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신진사대부는 이러한 정치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내적으로 분화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내적 분화는 사전개혁과 왕조교체(王朝交替)를 둘러싸고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를 달리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온건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세력과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세력으로 나뉘게 되는데 온건개화파 측은 왕조를 유지하고자 했으나 급진개화파 측은 역성혁명 즉 새로운 왕조수립(王朝樹立) 주장하였다.
1.2. 정몽주
1.2.1. 염락이학(濂洛理學)과 경학적 학문 기조
정몽주의 학문은 특별한 사승관계 없이 독학으로 자득한 것이었으며, 이 점에서 그의 뛰어난 학문적 역량을 볼 수 있다. 정몽주는 젊어서부터 '사장은 지엽적인 재주에 지나지 않으며 그보다도 심신의 학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대학(大學)』 『중용(中庸)』 두 책 속에 갖추어 있다.'고 하였다. 정몽주는 『대학』에 대해서 '『대학』은 모두 이발공부(已發工夫)'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중용』과 『대학』을 짝을 이루는 책으로 간주하여, 『중용』을 심성수양서로 『대학』을 실천과 생위의 문제를 취급하는 책으로 보고 한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사서(四書)』에 두루 통하였지만, 특히 『대학』과 『중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에 심취하고 있는 일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서 "염락(濂洛)의 도를 부르짖고, 불교와 도가의 말을 배척하며, 강론이 정묘하여 깊이 성인의 오묘한 이치를 깨쳤다."고 적고 있는 데에서도 확인된다. 이것은 정몽주의 학문세계가 염락이학에 바탕하고 있음과 그 학문내용이 성리학의 근본정신에 부합하고 있음을 전해 주고 있다..
1.2.2. 정명사상(正名思想)과 춘추정신(春秋精神)
정몽주의 사상 근저에 정명론(正名論)이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었음은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언급에서 확인된다. 유성룡은 "선생이 한번 죽음으로써 하늘이 내려 주신 양신이 이로써 확립되고 사람의 표준이 이로써 세워져...
참고 자료
·도현철, 「14세기 전반 유교지식인의 현실인식」,『14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회』, 민음사, 1993.
·한영우,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지식산업사』, 1999.
·김영수,「여말선초의 역사적 도전과 실천 성리학 :정몽주와 정도전의 <歷史-天道>論을 중 심으로」, 『한국정치연구 제10집』,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2000.
·김광철, 「개혁정치의 추진과 신진사대부의 성장」,『한국사 19』국사편찬위원회, 2003.
·정성식, 「포은과 삼봉의 철학사상」,『심산문화』, 2003.
·오영교, 「조선건국과 경국대전 체제의 형성」,『혜안』,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