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押馬), 3등은 타각부(打角夫)로 구분되었고, 통사에도 당상역관(堂上譯官)과 당하역관(堂下譯官)의 구별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중국어 교과서를 남겼고, 그 이후 많은 학자들이 언해 ... 되어 있는데 권 1~4, 9의 전반부는 동래와 부산포의 조선 관리와 부산의 왜관에 거주하는 일본인과의 대화에서 자주 쓰이는 내용이 중심이 되어 일본인을 접대하거나 무역에 사용되는 회화 ... (女眞學)·왜학(倭學) 등 4학을 갖추었고, 그 중 특히 한어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사역원의 중요한 임무는 통사(通事)였으며 실력에 따라 1등은 통사, 2등은 압물(押物)·압마
을 조선에 통지하도록 했다. 역관왜학훈도 안동준과 동래부사는 옛 관계를 유지하려면 서계를 고쳐야 한다는 뜻을 서한을 통해 알렸다. 일본은 이 서한을 왕정복고 통지를 거부한다는 공식 ... 년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리 이후 세이타이 쇼군이 되어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 정권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고 국내 정치의 안정된 기틀을 마련했다. 이에야스는 국제
다.“이번 바다를 건너간 역관(譯官)의 배에 실은 미곡이 백여 석에 이르도록 많았으니, 침몰할 우려는 반드시 이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듣건대 동래부(東萊府) 근처의 곤수(帥)128 ... 의 외국어 교육과 무역 활동에 대한 부분을 가장 인상 깊게 들었으며, 특히 변승업 가문이 역관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는 것에 더 흥미를 느끼게 되어 조선시대의 역관과 역관 ... 과 뛰어난 협상력으로 역관무역을 통해 거대한 부를 축적하고 조선의 경제를 활성화시킨 주축이었다. 특히 역관들은 청과 일본의 중간에 위치한 조선의 지리적인 특성을 이용하여 중개무역
?염포에 왜학이, 1433년 황주에 한학, 예종1년(1469)에 웅천?동래에 왜학을 각각 설치했다. 1485년 의주?창성?이산?벽동?위원?만포?북청에 여진학이 신설되고 1785년 거제 ... 에 왜학, 제주에 한학과 왜학을 설치하였다. 이런 지방 역학원에서는 향통사를 양성하여 중앙의 사역원에 파견 근무하고 중요 역관은 사역원에서 양성?선발하였다. 잡과는 식년시, 증광시 ... 었다. 조선시대 잡과의 역학생도 정원을 보면 다음과 같다.1485년1746년1785년한학357515몽학1035?청학4554?왜학414020역관선발에 사용된 과책 및 시취방법을 ?경국대전
지 않고는 부사를 만날 수 없다는 규정을 벗어나 왜관 주재 관리들을 이끌고 동래부로 몰려가 부사를 면접하려 했다. 이때 동래부사 정현덕은 이들을 책망하고 왜관으로 돌아가게 하자, 그 ... 강경한 담판을 위해 1872년 9월 외무대승 하나부사를 파견했지만, 별 소득 없이 돌아갔다. 이때 부산 일대에서 미쓰이 계통의 상인들에 의한 밀무역 및 암거래가 성행하자 동래부 ... 에서는 정식으로 외무소승인 요시오카를 사절로 부산에 파견했으나 부산 왜학 훈도 안동준은 "우리나라와의 모든 교섭은 소를 통해 정식 경로를 통하여 올 것"을 요구하며 거절했다. 국교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