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 김재준의 글이「신학지남」에 실리지 못하도록 하였다.박형룡의 삶에 있어 주기철목사와의 만남 또한 새로운 전기를 만들게 되는데, 둘의 만남은 산정현교회가 담임목회자 문제로 혼란 ... . 그래서 그는 정국의 분위기가 점점 경색되어 감을 느끼고 1938년 봄에 주기철목사의 전송을 받으며,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그리 넉넉하지 못하 ... 을 겪게 되면서 이다. 교회를 정통보수신앙으로 잘 인도할 목회자를 박형룡이 직접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러던 중 평양신학교 19회 졸업생이며 경남 마산문장로교회에서 시무 중이던 주기철
었다. 그의 순교적 신앙은 후대의 수많은 선교사들의 모델이 되었고, 그의 순교정신은 한국교회 속에 소중히 간직되어 내려왔다. 주기철, 손양원 등 수많은 사람들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 ... 잡아 온 평양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장로교는 1901년에 설립된 평양신학교를 통해 7명의 목사를 배출했는데, 평양신학교는 한국의 일선 교회는 물론 노회와 총회를 태동 ... 에서는 1912년 3월 이전까지 7개 대리회를 노회로 승격하여 7개 노회가 총회를 결성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1912년 9월 1일에 7개 노회에서 파송한 목사 총대 96녕, 장로 125
지만 개인적으로 또는 개교회적으로 전국 각지에서 신실한 기독교도에 의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이 격렬히 일어나게 된다. 이 가운데 주요 인물로는 주기철, 이기선, 한상동, 주남선 목사 ... 들 중 안창호, 김종섭, 한석진, 방기창 등이 다 기독교인들이었다.) 그 중 한석진, 방기창은 한국 장로교 최초의 7 목사 중 2인이었다.독립협회에 가담한 기독교인들 이외에도 19 ... 한 입장은 호남 지방에 선교 근거를 갖고 있던 미국 남장로교에서 먼저 표명되었다. 이를 주도한 이가 당시 미국 남장로교 해외 선교부 총무로 활약하던 풀턴(Fulton)목사이다. 그
가 되었다. 그의 순교적 신앙은 후대의 수많은 선교사들의 모델이 되었고, 그의 순교정신은 한국교회 속에 소중히 간직되어 내려왔다. 주기철, 손양원 등 수많은 사람들이 불의와 타협 ... 목사의 헌신적인 노력, 이수정의 편지, 맥클레이 선교사의 한국 방문, 그리고 낙스를 비롯한 한국 주변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는 선교사들의 간절한 청원에 힘입어 1884년 들어서 한국
,을 뻗쳐 공작하였다. 총회 개회 전에 주기철목사를 비롯하여 이기선,채정민,김선두 등 여러 목사와 박관준 장로 같은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구금하였다. 각 지방 경찰서는 전국 23개 ... 을 부라리고 지켜 서 있었다. 이는 너무나 살벌한 광경이었다. 조작된 각본대로 신사참배 안은 가결되었다. 총회장 홍택기목사는 전신을 떨면서 "신사참배가 가하면 '예'하시오"라고 묻 ... 고 '부'는 묻지도 않은채 그냥 만장일치의 가결로 선포하고 말았다. 봉천노회 소속인 한부선(B.F.Hunt)목사는 불법이라고 외쳤으나 무술경관에 의하여 밖으로 축출 당하였다.서정민
시작해 가톨릭, 성공회, 성결교, 구세군, 감리교 장로교 등 모든 교단과 교파가 신사참배에 결의했다. 그러나 주기철목사를 비롯한 일부 기독교인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순교 ... 의 전면광고로 나오는 경우도 있으며, 이단이었던 그룹이 다시 참된 신앙고백으로 돌아왔다는 소식도 전해지지만 목사와 신학교 교수들이 이단으로부터 청탁을 받아 이권을 챙겼다거나 이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