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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중·후기 성균관의 흥학책 (Seonggyungwan’s Heunghakchaek after the Middle of Yeongjo’s Re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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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등록일 2025.07.01 최종저작일 20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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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중·후기 성균관의 흥학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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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정보

    · 발행기관 : 역사교육연구회
    · 수록지 정보 : 역사교육 / 135호 / 159 ~ 201페이지
    · 저자명 : 구희진

    초록

    본고는 영조 중·후기 성균관의 흥학책을 살펴본 것이다. 이하에서는 본고에서 규명한 내용을 정리한 뒤, 영조대 성균관 흥학책이 지니는 의의에 대해 논하면서 결론에 대신하겠다.
    영조 중기에는 경신처분과 신유대훈으로 조성된 탕평정국에 기초하여 제반 국제를 정비해갔다. 성균관의 흥학책은 탕평정국의 기반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노론과 소론의 경화자제가 함께 거재하여 소통하도록 유도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므로 경화자제들의 거재를 장려하기 위하여 원점과와 도기제강을 실시했다. 하지만 31년 을해옥사이후 영조는 전제적인 통제책을 취해갔다. 경화자제의 거재에 중점을 두었던 흥학책에서 벗어나 거국적으로 유생층에 대한 권강책을 모색해갔다.
    영조는 35년에 과거제를 개혁하여 一經講을 도입해서 강경을 강화한 이후, 성균관 과시에서도 강경을 강화했다. 그리고 영조 36년 말에는 드디어 성균관에 月三講의 강학을 제도화했다. 과거제 개혁으로 慶科의 실시는 제한되었으나 성균관 과시는 크게 증가하여 영조 35년에서 45년 사이의 전체과거에서 성균관 직부전시자의 비율이 24%에 이르렀다. 유생층의 이해가 직접 관련된 과거에서 성균관의 위상을 높여가면서 월삼강을 실시해 갔던 것이다.
    영조는 월삼강을 칙려하기 위해서 초기에는 대사성을 독려하고 장의의 참여를 단속했으나, 복정한 이후에는 성균관 유생들에 대하여 직접 관유소대를 실시하였다. 하지만 월삼강은 그 효과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다가, 영조 42년 과폐이정윤음의 폐지로 과거에서 일경강을 실시하지 않게 되면서 상재생들에 대한 경전의 권강이 어려워진 이후에는 경계의 내용을 담고 있는 간략한 箴銘頌 만을 강하게 했다. 영조는 권강책의 내용을 변화시켜가면서도 간헐적이나마 관유소대를 실시하며 권강을 지속해 가려 했다.
    영조는 권강책을 君師로서 당대사회의 변화에 대응하여 유생들을 배양하고 통제하기 위한 ‘苦心’ 속에서 추진해갔다. 성균관의 월삼강은 세자를 폐위하고 賜死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해가는 과정에서 제도화되었으며 이후에도 유생들의 공론을 대표하는 성균관을 통하여 유생층을 통제하는데 활용되었다. 조선후기 신분제 해체와 유생층의 증가에 따른 지방사회의 향전이 영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당론과 연계되거나 반란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제어하고, 反蕩平의 입장을 견지하는 山林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성균관의 공론을 단속하고 활용하려 했다. 영조후기에 들어서 성균관에 월강은 제도화되고 관유소대를 통하여 국왕이 직접 권강에 나섰으나 강학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반면에 유생들의 자율성은 극도로 위축되어 갔다.
    그런데 영조는 또한 전제적인 권위로 과감하게 사회의 변화를 수용하여 성균관에서 신분이 아닌 나이순서로 序齒하도록 제도화시키고, 4조에 현관이 없는 향장의를 선발하고, 課試에서는 京鄕互對를 하여 실력있는 향유들의 진출을 넓히기도 했다. 그 결과 영조 후기에 들어서 성균관 과시를 통해서 선발된 직부전시자는 경유가 80명인데 반하여, 향유가 88인에 달하게 되었다. 또한 향유로서 문과에 합격한 조상이 없는 지방 幼學들의 진출이 늘어났다.
    이와 같이 추진되어간 영조대 성균관의 흥학책은 조선후기 사회 변화 속에서 성균관의 위상과 역할을 다시 정립한 것이었으므로 이후 갑오개혁 이전까지 성균관 흥학책의 기본 골격을 이루게 되었다. 구희진,「조선말 성균관의 흥학책」『동국사학』57, 2014.








    첫째로 강학기관으로서 성균관의 위상에 대해서이다. 영조는 36년 월삼강을 정식화한 뒤에 곧이어 1년 12차 참강 유생만 응시할 수 있는 응제를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이처럼 자격을 제한하는 것은 ‘共一國之意’가 아니라는 이유로 실시되지 못했다. 성균관에 전문적인 과정을 만들어 배타적으로 운영하는 것 보다는 지방유생들도 참여할 수 있는 개방성을 중시했던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이후의 성균관 개혁에도 그대로 구현되었다. 고종 6년의『太學別單』이나 고종 30년의『太學規制』에서도 성균관의 강학규정이 마련되었는데 儒學敎育과 課試에 관한 표준화된 과정을 만들어 지방의 향교나 서원에서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기준이 되도록 했으며, 성균관 강학에 참여할 수 있는 유생의 범위도 확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고 교육기관으로서 전문성을 높이는 것은 과제로 남겨두게 되었다.
    둘째로 성균관과 그 아래 교육기관들과의 연계에 관해서이다. 구체적으로는 성균관 하재, 4학과 그 아래의 營學, 향교, 서원, 서당과의 연계에 대해서이다. 영조는 16년에 성균관과 지방교육기관의 연계를 고려하며 하재와 4학의 결원에 대한 보충방안으로 식년마다 각 도에서 선발해서 충원하도록 했다. 이는『續大典』에도 명문화되었으나 이후 실행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續大典』에 더불어 명문화되었던 試講이나 통독강을 기준으로 충원하다가 이후 식년시가 있을 때에는 회강에서 13分半을 획득한 사람으로 하기로 추가해갔다. 하재나 4학의 유생을 충원하는데 지방학교와의 연계나 지역에 인원을 할당하여 선발하는 것보다는 科擧와 연계하는 방향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등용을 위한 선발이라는 성격이 보다 강화되어『太學別單』이나『太學規制』에는 성균관의 교육과는 관계없이 과거합격인원을 선발하는 것으로 명문화 되어갔다. 지방의 유생들에게도 과거에 합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데 중점이 두어지면서 교육기관의 내실화와 계열화, 체계화는 과제로 남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셋째로 君師의 역할에 관해서이다. 군사는 유교국가에서 통치의 주요한 방안이 교육과 교화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체현한 것이면서, 군주가 의리의 주인이 되어 붕당을 타파하려는 탕평정책의 산물이었다. 영조는 탕평을 ‘苦心’하면서 성균관의 흥학책을 유생들에 대한 대처방안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君師로 자임하며 관유소대나 빈번한 성균관 과시를 통하여 유생들을 직접 단속하려 했다. 그 결과 국왕은 강학의 권장과 課試를 위해서 노고가 막심 하였으나, 강학은 제대로 실시되지 못하였고 유생활동의 자율성은 매우 침해되었다. 조선후기 군사의 흥학은 군주 개인에 의존하며 정치적 목적에 따라 실시되는 간헐적인 권장에서 벗어나서, 유생층이 확대되어가는 사회변화에 조응해야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교육의 공적인 가치를 고양하면서 확대되어가는 유생층을 교육하고 선발할 수 있는 체계적인 제도가 마련될 수 있도록 국가적으로 지원하되 교육부분의 전문성과 자율성을 보장하는 방향에서 모색되어야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영어초록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Seonggyungwan’s Heunghakchaek after the middle of Yeongjo’s reign. Seonggyungwan’s Heunghakchaek in the middle of Yeongjo’s reign was intended to have Gyeonghwajaje stay together and reinforce the ground of Tangpyeong Policy. To induce Gyeonghwajaje stay in there together, they performed Wonjeomgwa and Dogigangje.
    But after the Eulhaeoksa, Yeongjo began to take tyrannical policy for control. He valued Ganggyeong as a means to control Confucian scholars as Gunsa. In Yeongjo’s 36th year, he institutionalized Wolsamgang in Seonggyungwan, and after that, under the pretext of encouraging Seonggyungwan Confucian scholars to study as Gunsa, he conducted Yusaengsodae.
    It was his reaction to Sarim out of power as well as Hyangjeon residing in rural area refusing Tangpyeong which Yeongjo emphasized after initiating Chinjeong in his 38th year. Yeongjo attempted to use Seonggyungwan as a way to have them cope with conflicts between factions and strata arising from social fluctuations during late Chosun as Gunsa.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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