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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국대장공주와 공민왕의 정치 (Princess Nogukdaejang and Her Influences on King Gongmin’s R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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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등록일 2025.06.13 최종저작일 20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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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국대장공주와 공민왕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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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정보

    · 발행기관 : (사)한국인물사연구회
    · 수록지 정보 : 한국인물사연구 / 12호 / 141 ~ 182페이지
    · 저자명 : 이형우

    초록

    고려 충렬왕이 원 나라의 제국대장공주와 혼인을 시작한 이후 고려와 원 나라는 사위와 장인의 관계가 성립되었다. 노국공주는 그런 역사적 상황 속에서 고려 31대왕인 공민왕과 혼인하여 왕후가 된 인물이다.
    노국공주와 공민왕의 혼인은 두 사람의 배경으로 볼 때 특별한 정략적인 의미보다는 오히려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혼인의 배경은 공주와 왕이 후대에 기억되는 매우 각별한 부부관계를 갖게 했다고도 보인다.
    그들의 인생은 공민왕이 갑자기 고려의 왕이 되면서부터 변하였다. 고려로 돌아온 직후 왕은 원 나라의 제도를 버리고 고려의 제도를 받아들여 공주를 시험에 들게 하였다. 그러나 공주는 조일신의 난을 함께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보이듯이 공민왕을 원 나라 제후국의 왕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부군이자 고려의 왕으로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런 공주의 입장은 1356년 ‘反元개혁’의 단행에서 공민왕을 지지함으로써 결정적으로 굳어졌으며, 이후 공주는 원 나라 출신 공주가 아닌 공민왕의 왕후일 뿐이었다. 그런 까닭에 興王寺의 난에서도 공주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왕을 죽음의 순간에서 지켜주기도 하였다.
    공민왕도 선대의 왕들과는 달리 공주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혼인한지 10년이 지나도록 대를 이을 왕자는 물론 공주도 얻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후궁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후사를 얻지 못하였던 그들에게 16년만에 아이가 생겼지만 불행히도 아이가 태어나는 도중에 아이는 물론 공주도 함께 죽었다. 왕의 슬픔은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을 정도였다. 왕은 공주에 대한 미안함과 애정을 표현하는 일환으로 공주의 무덤인 正陵과 공주의 초상화를 모시는 影殿을 조성하는 공사를 10여 년에 걸쳐 진행하였다. 왕이 이들 공사에 보인 집착은 도를 너무 지나친 수준이었다.
    이 공사들에 대하여 백성들은 계속하여 고통을 호소하였고, 공사의 중지를 원하였다. 그런데 백성들의 바람을 왕에게 전달하여야 할 신하들은 간언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侍中이었던 유탁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사 중지의 요청을 실행한 신하였다. 그는 그 때문에 죽기 직전의 상황으로까지 몰렸었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그 이후 실행에 옮겨진 신하들의 간언은 더 이상 없었다.
    이 시기 정치세력화한 ‘신진사류’들 역시 그 공사의 중지에 대해서 실행에 옮겨진 간언을 한 인물은 없었다. 이런 사실은 ‘신진사류’들의 역사적 평가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하고 가야할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공민왕의 개혁정치가 실패한 것에는 공주의 죽음과 그녀를 위한 토목공사가 일정한 작용을 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원인은 왕의 잘못된 행동에 대하여 간언을 해주는 뜻있는 신하들이 부족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영어초록

    The Goryeo dynasty and the Mongol Yuan dynasty had entered in the relation of son-in-law and father-in-law since King Chungryeol(충렬왕) of Goryeo married Princess Jegukdaejang(제국대장공주) of Yuan. Under this circumstance Princess Nogukdaejang wedded King Gongmin, the 31st king of the Goryeo dynasty, and then became a queen.
    Considering the personal backgrounds of Princess Nogukdaejang and King Gongmin, it is highly probable that their marriage had been induced from personal relations than a political maneuver. That might have enabled their marriage specially remembered for such a long time.
    Their lives had changed just after the husband was unexpectedly enthroned as a king of Goryeo. As soon as the couple returned to Goryeo, King Gongmin made Princess Nogukdaejang suffer by abolishing the Yuan institutions and restoring the original Goryeo political system. However, as shown during the revolt of Jo Il sin(趙日新의 난), she embraced the modified position of her husband as a king of the Goryeo dynasty from a prince of the Yuan court. Her standpoint had decisively confirmed when she supported King Gongmin on his reformation against the Yuan(反元개혁) in 1356. Since then, she was no longer a Yuan princess; she had been only a queen of King Gongmin. Thus Princess Nogukdaejang dared to disregard her life to save King Gongmin at the moment of death during the rebellion at the temple Heungwang sa(興王寺의 난).
    King Gongmin himself showed exceptional affection to Princess Nogukdaejang unlikely other kings who were married to the princesses from the Yuan court. He did not allow keep any concubine even though they could not have a baby for more than ten years. Although the royal couple was finally able to have a junior in the 16th year of their marriage, Princess Nogukdaejang died during the labor with her long-awaited baby. King Gongmin’s grief was overwhelming. He started on a construction project to build Jeongreung (正陵), a royal tomb for Princess Nogukdaejang, and Yeongjeon(影殿), a shrine in where the queen’s portrait to be placed for ten years as a small token of his love and sorry for his wife. King Gongmin became obsessed more and more with the construction project.
    The common people of Goryeo constantly complained their hard times demanding to stop the construction. The king’s vassals whose duty was to deliver the commoner’s hopes to the ruler had neglected their responsibilities. Attendant-in-Chief(侍中) Yu Tak(柳濯) was the only one who asked to stop the construction so that to be put to the moment of death. It is unsure if Yu Tak’s case traumatized his colleagues, but there is no more record of remonstrance during King Gongmin’s following reign.
    Also, no single person among the New Scholar-Officials(新進士類), the newly emerged power groups, was persistent or brave enough to put his exhortation into action. This point should be reconsidered especially when the New Scholar-Officials was evaluated for their historical contribution. It is certain that the irrational construction project is partly responsible for the failure of King Gongmin’s reformation. The much responsibility, however, lies in deficiency of faithful retainers who could have advised King Gongmin to rectify his misgovernment.

    참고자료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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