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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복궁 관람
1.1. 경복궁의 역사 및 기본 구조
경복궁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임금이 개경에서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수도를 옮긴 후, 1395년 세운 우리나라 으뜸의 궁궐이다.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리기를 기원한다'"는 뜻을 가진 경복궁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소되어 270여 년간 방치되어 있다가, 고종 4년(1867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다. 그러나 1876년 대규모 화재로 800여칸이 소실되었으며, 이어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궁궐의 많은 부분들이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훼손되어 근정전, 경회루, 향원정 등 극히 일부 중심 건물만 남았으며, 그마저도 조선 총독부 건물 건축(1915년~1927년)으로 인해 궁궐 자체가 가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아픈 역사를 가진 경복궁은 다행히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 사업이 시작되어, 총독부 건물 철거(1996년), 흥례문과 동궁 등의 복원, 광화문 복원(2010년) 등의 과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2. 경복궁의 주요 건물
1.2.1. 근정전과 사정전
근정전과 사정전은 경복궁의 핵심적인 중심부를 이루는 건물들이다. 근정전은 우리나라 경복궁을 대표하는 가장 상징적인 건물로, 가장 화려하고 권위 있기에 조선시대 500년 왕조의 위엄을 잘 드러내 주는 곳이다. "천하의 일을 부지런히 하여 잘 다스리다"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근정전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는 조선시대 왕권의 상징이자 권위를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근정전 바로 뒤에는 임금의 집무실이라 할 수 있는 사정전이 위치하고 있는데, 사정전의 좌우에는 만춘전과 천추전이 균형 있게 배치되어 있다. 이처럼 근정전과 사정전은 경복궁의 핵심적인 공간으로서 왕권과 국가 권위를 상징하는 중요한 건축물들이라 할 수 있다.
1.2.2. 강녕전과 교태전
사정전 좌우로는 만춘전과 천추전이 균형있게 배치되어 있다. 이들은 조선 왕조의 500년 역사 동안 왕의 주요 거처이자 정무를 처리하던 곳으로, 엄숙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강녕전과 교태전은 사정전에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있는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강녕전은 왕의 거처이고, 교태전은 왕비의 거처이다. 이들 건물들은 용마루가 없으며, 양의문(兩儀門)이라는 솟을대문으로 왕의 거처와 왕비의 거처가 분리되어 있다. 이는 일반 양반가옥에서 사랑채와 안채를 분리한 것과 유사한 구조이다.
교태전 뒤쪽으로는 아미산이라 불리는 꽃동산이 조성되어 있다. 이 꽃동산에는 모란, 진달래, 국화 등 다양한 꽃과 나무를 심었고, 벽에는 덩굴무늬,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새, 사슴 등의 무늬로 장식한 붉은색 굴뚝 4개를 배치하였다. 그리고 굴뚝 옆으로는 "낙하담(노을이 내려앉은 연못)"과 "함월지(달을 품은 연못)"라는 돌로 된 연못을 조성하였다. 이처럼 인공적으로 조성된 산과 연못이 붉은 굴뚝과 어우러져 아름답고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규모가 크고 화려하여 왕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동시에 아기자기한 면모로 인해 일반인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1.2.3. 수정전
근정전의 서쪽에 수정전이 있는데 세종대왕때 집현전이 있던 곳이다. 이후 왜란으로 인해 소실된 자리에 고종 4년에 다시 건축하여 일제의 횡포에도 살아 남아, 조선의 근대화 개혁인 갑오개혁을 추진했던 군국기무소와 내각의 청사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는 이유로 일본에 의해 대부분 철거되고 박람회장으로 쓰이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수정전은 조선 말기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간직한 건물이라는 점에서 그 뜻이 남다르게 다가온다. 특히 세종대왕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愛民精神)으로 훈민정음을 만들어 낸 집현전이 있던 곳이고, 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