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침략과 정복
1.1. 게르만족의 침략
게르만족은 3~5세기 동안 로마제국의 서쪽을 침략하여 476년에 결국 로마제국의 서쪽을 멸망시켰다. 이들은 3세기부터 로마제국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침입했으며, 이 때 로마제국은 거의 무너진 상태였다. 이로 인해 로마제국의 상태는 불안정하게 이어져 갔고,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불안정한 상태에서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나라의 힘을 강화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로마제국에 머물게 된 게르만족들도 생기면서 5세기에는 게르만족이 로마제국에 침입하였을 때 로마제국에 머무르는 게르만족들과 로마제국을 침입하려는 게르만족들이 로마제국을 두고 서로 싸우게 되었다. 결국 게르만족은 독립적인 형태로 거주하였지만, 로마제국의 황제와 종교를 받아들였다. 또한 동쪽의 게르만족은 각 고유의 신 또는 기독교의 이단으로 아리우스주의를 믿었는데 이들도 모두 로마를 침입하면서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후 476년에 게르만 장군이 로마제국을 통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로 인해 로마법과 게르만법을 각각 두어서 사람에 따라 재판을 하는 것과 같이 하나로 합쳐지지 못했고, 게르만족은 로마제국의 종교와 교회를 보존하고 유지하였기 때문에 로마제국이 완전하게 멸망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1.2. 무슬림의 침략
무슬림의 침략은 7세기부터 중세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이슬람교의 확산과 팽창을 위한 것이었다. 무슬림들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출발하여 북아프리카와 중동, 소아시아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7세기 초,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후 그의 추종자들은 아라비아 반도 전역을 통일하며 이슬람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무함마드의 사후 그의 추종자들은 이슬람 세계를 확장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것이 무슬림의 침략으로 이어졌다.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가 이끄는 무슬림들은 먼저 비잔틴 제국과 사산 페르시아를 공격했다. 이라크, 시리아, 이란 등 중동 지역을 장악한 무슬림들은 이후 이집트와 북아프리카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이집트를 점령한 무슬림들은 지중해를 건너 스페인반도로 진출했고, 711년 이베리아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이로써 무슬림들은 지중해 지역과 중동, 북아프리카에 걸친 거대한 제국을 세우게 되었다.
한편 동쪽으로도 무슬림들의 진출이 이루어졌다. 8세기에는 중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까지 점령했고, 13세기에는 인도 북부까지 진출했다. 이슬람교는 이 지역에서도 크게 확산되었다.
무슬림의 침략은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닌 이슬람교의 확산을 위한 것이었다. 무슬림들은 정복한 지역의 주민들에게 이슬람교로의 개종을 강요했고, 이를 거부할 경우 차별과 박해를 받았다. 하지만 개종을 선택한 주민들에게는 일정 수준의 자치권과 권리를 보장해 주었다. 이를 통해 무슬림들은 점령지에서의 통치를 용이하게 할 수 있었다.
무슬림의 침략은 이슬람교의 팽창을 위한 것이었지만, 당시의 세계사적 맥락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첫째, 무슬림의 팽창은 서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 등 기존의 강대국들을 붕괴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냈다. 둘째, 무슬림들은 정복한 지역에서 자국의 언어와 문화, 종교를 전파함으로써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셋째, 무슬림 제국은 지중해 세계와 인도양 세계를 연결하는 교역망을 형성했고, 이를 통해 문화와 기술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이처럼 무슬림의 침략은 이슬람교의 팽창이라는 종교적 동기에서 비롯되었지만, 세계사적으로 볼 때 기존 질서의 파괴와 새로운 문화·경제 질서의 형성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1.3. 바이킹의 침략
바이킹은 9~10세기 동안 유럽을 침략한 북유럽의 해상 민족이었다. 이들은 약 200여 년간 유럽 각지로 침략을 감행하며 서유럽의 안정을 크게 해쳤다.
바이킹의 침략은 주로 해안가와 연안 지역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당시 바이킹들이 기동력이 뛰어난 장거리 항해가 가능한 선박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이킹들은 주로 겨울철에 습격을 감행했는데, 이는 보통 겨울철 동안 유럽 지역이 군사적으로 상대적으로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바이킹들은 방대한 영토를 차지하고자 하기보다는 약탈과 투기를 주된 목적으로 삼았다. 이들은 수도원이나 교회, 성을 습격하여 귀중품을 약탈해갔으며, 주민들을 납치하여 노예로 팔기도 했다. 바이킹들의 잦은 약탈로 인해 유럽 각지에서는 바이킹에 대한 두려움이 팽배해졌다.
바이킹의 침략은 주로 크게 네 방향으로 이뤄졌다. 첫째, 노르웨이와 덴마크 출신의 바이킹들은 서쪽으로 영국과 아일랜드를 습격했다. 둘째, 스웨덴 출신의 바이킹들은 동쪽으로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등을 공격했다. 셋째, 덴마크 출신의 바이킹들은 프랑스 북부와 네덜란드 해안을 습격했다. 넷째, 일부 바이킹들은 더 멀리 대서양을 건너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 심지어는 북아메리카 대륙에도 도달했다.
바이킹의 잦은 습격으로 유럽 각지에서는 안전이 극도로 위협받게 되었다. 이에 각국 군주들은 바이킹의 침략을 막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샤를 왕은 바이킹에게 일정 지역을 할양하고 매년 세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평화를 유지하고자 했다. 이처럼 바이킹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한 각국의 노력으로 인해 점차 유럽 각지에서 안정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2. 황제와 교황
2.1.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는 무함마드의 가장 가까운 동료이자 이슬람 최초의 정통 칼리프로 불리는 인물들이다.
무함마드가 죽자 이슬람 공동체(움마)는 새로운 지도자를 선택해야 했는데, 아부 바크르가 무함마드의 뜻을 가장 잘 이어받았다는 믿음 아래 첫 번째 칼리프로 추대되었다. 아부 바크르는 자신의 명에 따르지 않는 이들을 처리하는 등 강경한 방식으로 공동체의 통합을 꾀했다. 특히 무함마드가 없어진 이슬람이 분열될 것을 막기 위해 "배교자 전쟁"을 벌이며 아라비아 반도의 부족들을 통합시켰다. 그는 불과 2년 만에 세상을 떠났지만, 이슬람 공동체를 하나로 유지하고 확장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는다.
아부 바크르의 계승자인 우마르는 이슬람의 영토 확장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계속해서 공격하여 짧은 기간에 이 지역을 지배하에 두었다. 또한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집트까지 장악하며 이슬람 제국을 크게 성장시켰다.
우마르는 이를 통해 이슬람 세계를 하나의 통일체로 이끌어 나가고자 했다. 그는 경제, 행정,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개혁을 단행했는데, 특히 세금 제도 정비, 도로망 건설, 우편 시스템 정비 등을 통해 제국 통치에 용이한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지역 영주들의 권력을 견제하고자 백작과 공작 등을 임명하는 등 중앙집권화 정책을 펼쳤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우마르는 이슬람의 정체성과 정통성 확립에 기여했다. 그는 무함마드가 태어난 날이 아닌 무슬림들이 메디나로 이주한 '히즈라'를 이슬람력의 기점으로 삼았다. 또한 유추법(키야스)과 합의(이즈마)를 통해 이슬람 율법 체계를 정립하고 학자들을 육성했다. 이를 통해 이슬람의 제도화와 교리 통합에 앞장섰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우마르는 관료들의 부패와 지도층의 사치를 엄격히 규제하는 등 검소한 통치를 펼쳤다. 이는 초기 이슬람의 사회 정의와 청렴성을 지키고자 한 노력으로, 그의 통치가 정의와 공정성의 상징이 되게 했다.
따라서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는 무함마드 이후 이슬람 공동체를 안정화시키고 발전시키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우마르는 이슬람 제국의 영토 확장, 행정 체계 정비, 교리 통합 등을 통해 이슬람 문명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2.2. 우스만과 알리
우스만은 무함마드의 12촌 아들로, 메카에서 가장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는 그 재산을 몇 배로 불려나갔다. 그가 이슬람으로 개종하자 그의 일족인 귀족 가문 우마이야 가문은 맹렬하게 이슬람에 반대했다. 그러나 우스만은 무슬림들에게 자금을 지원하였고, 메카에서 무슬림에 대한 학대가 극에 달하자 무슬림을 이주시키는데 자금을 조달하였다. 히즈라 당시에도 우스만의 사업은 번창했는데, 무슬림 대부분이 히즈라 당시 그들이 소유한 모든 것을 잃은 반면 우스만은 여유로웠다.
모든 것을 가진 듯 하였으나 우스만은 단식, 기도, 쿠란을 읽으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무함마드가 죽고 나서도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두려워했고 더 열심히 단식, 기도, 자선을 베풀었다. 그 결과 세 번째 칼리프에 오르게 되었다.
우스만의 칼리프 시대에 이슬람 공동체는 방대한 영토를 통치하는 하나의 정부가 되었다. 우스만은 쿠란의 확정판을 정리하였고, 공동체 재정을 재정비하였다. 특히 멀리 있는 영토에서 거둬들이는 세금 수입을 증가시켰다. 경제의 자유를 믿어 점령지에서 무슬림의 토지 구입을 허용하고 이를 위해 국고에서 돈을 빌리는 것도 허용했다. 이를 통해 우마이야 가문을 비롯한 무슬림 최상류층이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또한 우스만은 모스크 건설, 운하 도로 건설, 관개사업 개선 등 공공사업에 힘썼다. 우스만은 사촌인 무아위야를 총애했는데, 당시 무아위야는 유프라테스강 상류부터 지중해 해안을 따라 이집트에 맞닿은 지역까지 다스렸다.
그러나 우스만의 통치 후반기에 제국 곳곳에서 불평이 생겼다. 이집트에서 세금 징수와 관련하여 폭동이 일어났고, 우스만이 이집트 총독을 교체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이들을 돌려보냈으나 이들이 돌아가던 중 칼리프가 이집트 총독에게 이들을 체포, 처형하라는 메세지를 우스만의 노예에게 전달한 것을 알고 궁궐로 돌아왔다. 광분한 이들은 궁의 문을 부수고 칼리프를 때려 죽였다. 이후 나흘간 메디나를 휘젓고 다녔고 새 칼리프가 임명될 때까지 도시를 떠나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알리가 새로운 칼리프로 선출되었다.
알리는 무함마드의 사위이자 사위가 된 것이 아니라 입양한 아들처럼 여겨지는 인물이었다. 알리는 어려서부터 무함마드와 카디자의 집에서 자라 무함마드의 아들처럼 자랐으며, 남자로서는 첫 번째 무슬림이었다. 알리는 무함마드를 살해하려는 시도에서 무함마드 대신 위험에 무릅쓰기도 했고, 우후드 전투에서 부상당한 무함마드를 데려왔다. 무함마드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알리의 지위는 특별했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특정 가족에게 특권을 부여하지 않았으며 자신 이후에 신의 사도는 없다고 했기 때문에 꼭 알리를 선출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알리와 아부 바크르, 우마르 지지자 사이의 의견 차이로 수니파와 시아파가 갈라섰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에 대한 위협이 닥치자 이 불화는 종결되었다.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가 통치할 때 이슬람에 한번 입문하면 영원히 입문한 것이라고 단언했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이슬람을 사로잡고 있는 종교적 원칙이 되었다.
알리는 부패한 제국을 개혁하고자 했다. 그는 우스만이 임명한 총독들을 해직하고 새로 파견했지만, 기존 총독들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알리와 아이샤 사이의 갈등도 있었는데, 아이샤는 알리가 우스만 체포 사건의 범죄자들을 체포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결국 알리와 아이샤 군대가 맞붙었고, 이 '낙타 전투'에서 알리가 승리했지만 1만 명의 무슬림이 사망했다. 이후 알리와 아이샤는 화해했다.
무아위야는 알리와의 동맹을 거부하고 칼리프의 지위가 자신의 것이라고 선언했다. 시핀 전투에서 알리와 무아위야가 맞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