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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사임당과 같이 당대에 저평가된 인물: 광해군
1.1. 왕권과 신권의 대결 속의 광해군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왕세자로서 분조를 이끌며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을 모집하는 등 전란 극복을 위해 헌신했다. 하지만 선조와의 갈등과 왕위 계승 문제로 인해 조정 내 첨예한 대립이 발생했다.
선조는 왕위를 물려줄 계획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며, 1592년 4월 29일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한다. 선조는 광해군에게 "군국의 대권을 총괄토록 하려 한다. 임시로 국사를 다스리게 하노니 무릇 관직을 내리고 상벌을 시해하는 일을 편의에 따라 스스로 결단해서 하게 하노라."라는 교서를 내리며 사실상 그에게 분조를 맡겼다. 이후 광해군은 12월까지 각지를 돌며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을 모집하는 등 전란 극복을 위해 분투했다.
그러나 선조와 광해군의 갈등은 점차 고조되었다. 선조는 왕위 계승과 관련해 광해군을 보이지 않게 견제하고 있었으며, 명나라 또한 광해군의 왕세자 책봉을 미루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의 둘째 아들이자 광해군의 적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났다. 이로 인해 광해군의 왕위 계승이 불확실해지자, 광해군과 선조의 갈등은 더욱 증폭되었다.
선조는 15차례나 양위를 시도했으나 신료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결국 1608년 병사하면서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된다. 이로써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지만, 왕권과 신권의 갈등 속에서 정치적 불안정을 겪어야 했다.
광해군은 즉위 후 기존의 붕당 정치를 종식시키고 붕당 간 갈등을 조정하며 왕권 강화를 도모했다. 하지만 왕권과 신권의 대결 구도 속에서 대북파의 세력 확대를 막지 못했다. 결국 1623년 인조반정으로 폐위되면서 "폭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이처럼 광해군은 왕세자 시절 전란을 수습하며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 왕권과 신권의 대결 속에서 정치적 타협을 이루지 못했다. 이는 그가 왕위에 오른 후에도 지속된 불안정한 상황으로 이어졌고, 결국 인조반정으로 폐위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1.2. 선조와의 갈등
광해군이 왕세자로 책봉된 것은 임진왜란 당시의 일이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빠른 속도로 북상하여 4월 28일에는 충주까지 올라오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파천론(播遷論)이 대두되었고, 결국 선조는 평안도 지역으로 가게 되었다. 이러한 어수선한 상황에서 우부승지 신잡이 종묘사직의 장래와 민심 수습을 위해 왕세자를 책봉할 것을 건의하였고, 이에 선조는 광해군이 어떠하겠냐는 뜻을 비추었다. 신료들의 찬성으로 광해군은 4월 29일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이후 5월 20일 평양에서 머물던 선조는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한다는 교서를 다시 반포하고, 친히 편지를 써 광해군에게 주었다. 이 편지에서 선조는 광해군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