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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야의 역사와 문화
1.1. 가야의 개요
가야는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대표적인 고대 왕국 중 하나이다. 가야는 B.C. 3세기경부터 A.D. 6세기 중엽까지 약 900년간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야는 당시 한반도 남부를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가야는 여러 개의 소국들이 연합한 연맹체 형태의 국가로, 주요 소국으로는 김해의 금관가야, 고령의 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고성의 소가야 등이 있었다. 이들 소국들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연합하여 가야라는 문화권을 형성했다.
가야의 문화적 성취는 매우 높은 수준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가야인들은 철 생산과 제철 기술에 뛰어났으며, 토기와 금속공예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우수한 기술을 발전시켰다. 특히 가야의 토기문화는 일본 스에키토기 문화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가야는 해상 교역에도 능했는데, 낙동강을 통해 중국과 교류했으며 일본과도 활발한 교역을 펼쳤다.
가야는 한반도 삼국 중에서도 뒤늦게 통일되었다. 가야는 신라와 고구려, 백제 등 인접국들의 영향을 받아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562년 마지막 남은 대가야가 신라에 의해 멸망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가야의 문화적 유산은 통일신라와 고려, 조선 시대로 이어지면서 한국 문화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1.2. 가야의 주요 유적
1.2.1. 김해 회현리 패총
낙동강 하류의 김해평야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높이 7m, 동서너비 130m, 남북너비 30m 정도의 낮은 구릉에 형성된 조개더미가 김해 회현리 패총이다. 1907년 이마니시류우가 발견하였고, 1920년 우매하라스에나오ㆍ하마다코우사크가 발굴하였으며, 1934년 카야모토모리토가 동단 정상부를 발굴조사하였다. 1920년 조사에서 화천 탄화미 등이 발견되었고, 1934년 조사에서 조개더미와 구별되는 아래의 문화층으로 고인돌, 독무덤, 돌널무덤이 확인되어 돌널무덤에서 석촉, 붉은간토기, 독무덤에서 세형동검과 관옥이 출토되었다.
고인돌은 덮개돌이 약간 경사면으로 흘러내린 모습으로 남아 있다. 화천은 A.D 9년에 왕망이 주조한 화폐로 불과 10년 정도 통용되었는데, 한반도에서는 평양과 김해에서 발견되고, 일본열도에서는 큐우슈우에서 오오사카에 까지 출토되고 있다. 이는 당시 구야국이 중개무역의 중심지로 역할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출토된 탄화미는 기원전후에 김해지역이 성숙한 쌀농사의 단계에 돌입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세형동검은 한민족 청동기문화의 표식적 유물로서 왜의 관여를 배제할 수 있는 자료이다.
김해시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으며 수로왕릉과 근접해 있다. 조개더미 뒤편에 김해김씨종친회 본부가 있고, 그 뒤에는 가락국 왕궁이 있었다는 비가 세워져 있다. 현재까지도 많은 조개껍질과 토기편들이 널려 있어 이곳을 찾는 이를 이 천년 내지 천오백년전의 가야인의 세계로 안내하고 있다.
1.2.2. 김해 수가리패총
김해 수가리패총은 김해군 장유면 수가리 조개더미로, 1970년대 초 부산대박물관의 지표조사에서 확인되어 1978~1979년 부산대박물관에 의해 2차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유적이다. 이 조개더미는 신석기 중기부터 초기 철기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문화층을 포함하고 있다. 조사 결과 3구역의 조개더미에서는 총 6개 층으로 구분되었는데, 1·3·5층은 순수한 조개껍질층이었고 2·4·6층은 약간의 조개껍질이 섞인 흑갈색 부식토층으로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조개껍질층과 부식토층이 교대로 퇴적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유적에서는 빗살무늬토기, 붉은간토기, 가락바퀴, 타제석기, 마제석기, 흑요석제석촉, 숫돌, 골각기, 조개팔찌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빗살무늬토기를 형식적으로 분류하여 '수가리 Ⅰ·Ⅱ·Ⅲ 문화기'로 구분하였는데, 이는 신석기문화의 중기 후기 만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수가리패총은 우리나라 신석기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남해고속국도 개설 과정에서 원래의 유적은 소멸되었으나, 도로에 인접한 장유면 수가리마을 일대에 여전히 많은 조개껍질이 흩어져 있어 이를 통해 당시 패총의 규모와 양상을 짐작할 수 있다.
1.2.3. 김해 봉황대 유적
김해 봉황대 유적은 1992년부터 1993년까지 발굴조사되어 조개더미, 집자리, 환호, 쓰레기장 등의 유구가 확인된 유적이다. 조개더미는 동쪽 경사면을 제외한 전 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3세기부터 6세기에 걸쳐 형성되었다. 집자리는 중복되어 밀집을 이루고 있으며, 3세기부터 6세기에 걸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집자리를 둘러싸듯이 축조되어 있는 환호는 깊이 150cm, 너비 350cm 규모의 구조로, B.C 1세기와 A.D 4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유구에서 다량의 적갈색연질토기와 소량의 와질토기, 도질토기 등 다양한 토기류와 함께 숫돌, 골각기, 목제빗, 철기, 동물뼈, 철재, 송풍관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철재와 송풍관은 이 지역에서 야철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위서 변진전』에 기록된 바와 같이 이 지역에서 생산된 철이 한, 예, 낙랑, 대방, 왜 등에 수출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김해 봉황대 유적은 가야 문화의 발달과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1.2.4. 김해 부원동 유적
김해 부원동 유적은 김해시청의 동서지역 일대로 1980년에 동아대박물관이 발굴조사를 실시한 후 토지정비사업으로 소멸된 유적이다. 조사된 유구는 조개더미, 집자리, 무덤 등으로 토기, 토제품, 옥제품, 석기, 골각기, 탄화곡물, 철기 등이 출토되었다.
토광묘와 돌널무덤은 청동기시대의 것이며, 돌덧널무덤, 집자리, 조개더미는 철기시대의 것으로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까지 이 일대에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였음을 보여준다. 탄화된 쌀, 보리, 밀, 조, 팥 등이 출토되어 거의 현재와 같은 곡물의 대부분이 재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30여종의 조개, 소, 멧돼지, 사슴 등의 동물뼈와 탄화된 복숭아씨, 머루씨 등이 출토되어 이곳에 거주하였던 가야인들의 식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사슴뼈를 사용하여 길흉을 점치는데 사용되었다고 보이는 복골도 출토되어 가야인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김해 부원동 유적은 청동기시대부터 철기시대에 걸쳐 가야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했던 중요한 유적으로, 이곳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과 유구를 통해 당시 가야 문화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1.2.5. 김해 양동 고분군
김해 양동 고분군은 김해시에서 서쪽으로 8km 떨어진 김해군 주촌면 양동리 가곡마을 뒷산에 위치하며, 가야고분의 전시장이라고 할 만큼 모든 형식의 가야무덤들 수백여 기가 확인되었다. 1969년 중국경과 청동기가 수습되면서 알려졌고, 1984년 문화재연구소와 국립진주박물관이 발굴조사를 하였다. 이후 1990년부터 1995년까지 동의대박물관이 연차적인 발굴조사를 시행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162호분은 대형의 덧널무덤으로, 널은 판상철부로 네 모서리를 깔은 위에 안치되었고, 널 안에는 중국경 방제경 9면이 피장자의 상체부에 부장되었으며, 덧널 바로 안쪽에서는 철복 등이 출토되었다. 235호분도 7.6m나 되는 대형 덧널무덤으로 162호분과 비슷한 유물과 시기를 보이며, 318호분과 함께 매장 뒤에 불을 지른 특이한 장법이 확인되었다. 322호분에서는 [西口宮鼎, 容一斗, 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