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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고려의 유교와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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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고려의 유교와 불교"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유교의 수용과 그 배경
1.1. 유교사상의 특징
1.2. 삼국의 유교 수용
1.3. 고려 전기의 유교 수용
1.4. 고려 후기의 유교: 주자 성리학의 수용
1.5. 참고문헌

2. 중세후기문학-제1기 고려후기
2.1. 무신란 · 몽고란과 문학
2.2. 문학의 본질과 기능에 관한 논란
2.3. 불교문학의 새로운 경지
2.4. 민족사 재인식의 시대
2.5. 사람의 일생 서술방법
2.6. 속악가사와 속악부
2.7. 설화 · 무가 · 연극의 양상
2.8. 경기체가 · 시조 · 가사의 형성

3. 중세후기문학-제2기 조선전기
3.1. 한문학의 정착
3.2. 훈민정음 · 서사시 · 언해
3.3. 악장 · 경기체가 · 가사
3.4. 시조의 정착과 성장
3.5. 관인문학과 왕조사업의 표리
3.6. 사림문학, 심성에서 우러나는 소리
3.7. 방외인문학에 나타난 반감의 양상
3.8. 불교문학의 시련과 변모
3.9. 산문의 영역 확대
3.10. 소설의 출현
3.11. 연희의 양상과 연극의 저류

4.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제1기 조선 후기
4.1. 시대변화와 문학의 양상
4.2. 문학의 본질 논의
4.3. 실학파 문인들의 등장

5.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제2기
5.1. 근대로의 전환기 문학

6.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유교의 수용과 그 배경
1.1. 유교사상의 특징

유교사상은 중국 고대의 춘추전국시대에 공자와 맹자, 순자를 중심으로 정립된 사상이다. 유교사상은 공자가 지적하듯이 귀신보다는 인간을, 죽음보다는 삶을 중시하는 현실우위의 사상이다. 즉, 내세보다는 살아있는 인간이 존재하는 사회현실은 중시하는 사상이다. 그러므로 유교사상은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관계와 사회관계를 엄격히 규정하여 그 관계를 명확히 한다.

유교는 중국고대사회의 우주 자연관에 따라 절대적인 질서로서의 천(天)을 상정하고 인간과 사회가 절대적 질서와 합치되는 상태를 말한다(天人合一). 인간이 하늘의 절대적 질서와 합치되는 상태는 군-신-부-자가 각각 맡은 바 도리를 다하는 정명이 구현된 사회라든가 천리로서 인간의 규범인 인륜(오륜)을 통해서 도덕적 가치의 세계로 이행되는 상태를 말한다.


1.2. 삼국의 유교 수용

삼국의 유교 수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에 유교가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로 알려져 있는데 그때 전래된 유교는 주로 한대(漢代)에 성립된 경학사상이었다. 그러므로 삼국의 유교는 공맹사상과 함께 한대의 경학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고구려의 경우는 소수림왕 때 태학(太學)을 세워 상류계층을 교육하기 시작했고, 이 때 교과 내용에 오경(五經)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반 서민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경당이 있었는데 여기서도 유교 경전과 역사서 등을 가르쳤다.

백제는 제도적인 측면에서 고구려보다 빨랐다. 백제는 중국의 군현제도를 모방한 국가 질서의 수립하였고, 중국에서 들여온 경학이나 의술 등을 일본에 전파함으로써 일본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백제의 왕인 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한 기록이 있다. 백제는 일찍부터 한자를 사용하였고 유교적 상례를 중요시하였다. 국가의 조직과 제도면에서도 유교의 영향을 받아 고이왕 때에 『주례』의 육관제(六官制)를 본 따서 중앙 관제를 만들었다. 중국 한무제 때 성립된 오경박사 제도가 백제에도 있었다.

신라는 삼국 가운데 한문의 도입과 유교의 전래가 지리적 영향으로 인해 가장 늦게 이루어졌다. 늦기는 하였지만 유교를 받아들이면서 이를 사회질서와 정치이념에 이용하여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졌다. 충담사가 지은 안민가(安民歌)나 화랑의 세속오계(世俗五戒)등을 보더라도 유학의 근본이념이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세속오계는 원광법사가 화랑에게 준 교훈인데, 유교 사상이 보편적 윤리로 정착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오계 속에서 보이는 충이나 효나 의 등은 유교 사상에 기반한 것이다.

즉, 삼국시기의 유교는 고대의 전통적 사회기반 속에서 국가질서를 유지하는 이념으로 작용한 동시에 교육기관에서 도덕교육, 특히 공동체 혹은 국가라는 조직사회에서 지켜야 할 도의를 가르침으로써 국가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도록 유도했다.

삼국시기의 유교는 삼국항쟁기를 거치면서 중세적 이데올로기로 전환하였다. 물론 이 시기의 유교사상이 처음부터 독자적인 정치사회의 운영원리로서 작용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회경제구조의 변동에 따라 이에 대응하는 지배이데올로기가 필요하였으므로 전통사상과 병존하면서 점차적으로 독자적인 지배이념으로 정착되어갔다.


1.3. 고려 전기의 유교 수용

고려 전기의 유교 수용은 다음과 같다.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은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하고 유지강화하기 위해 유교사상을 받아들였다. 왕건이 후백제와 신라의 잔존세력의 존재를 감안하여 대외적인 명분, 즉 신국가 성립의 불가피함을 인정받고, 또 국왕으로서의 즉위를 하늘의 뜻임을 밝힐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태조가 궁예의 폭정을 "천지가 용납하지 않고 신인이 함께 분노할 것"으로 단정한 것이나, 태조의 추대공신이 "혼군(昏君)을 폐하고 명군(名君)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대의"라고 하여 왕건에게 "탕(湯), 무(武)의 일을 행하라"고 했던 방벌적 혁명론(放伐的 革命論) 유교정치사상의 천명론(天命論)에 근거한 것이다. 천견론은 군주의 정치와 도덕의 근원으로 그 일거일동이 천의(天意)와 감응한다는 것으로 만약 군주가 정치를 잘못하면 민의 불평과 불만이 일어나면 사기(邪氣)가 생기고 이것이 자연계에 난조를 일으켜 천재지변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즉, 천명사상에 바탕을 둔 방벌적 혁명론은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것은 천명에 의해 불가피하게 행한 것으로 설명하여 태조의 후삼국 통일을 정당화시키고, 그 권력의 정통성을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고려의 역대 왕이나 유자들은 이러한 천견론에 의한 천인상관설을 받아들여 천재지변을 왕의 부덕에 의한 하늘의 경고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스스로 수덕(修德)을 행하고 선정(善政)의 구현에 노력했다. 성종대 이후 중앙집권화정책을 실시하였는데 특히 지방호족의 중앙관료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고려왕조에 대한 자발적인 협력을 유도하여야 했다. 이를 위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를 정비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고려의 학제는 유교적으로 개편하려는 의도와 중앙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향호들을 포섭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구체적 내용이 국자감의 설치와 향학의 설립, 전국에 12목 경학박사ㆍ의학박사를 파견하는 것 등이 있었다. 국자감에서는 신라 하대처럼 논어와 효경이 필수과목이었는데, 특히 효경은 고려의 정치제제를 이끌어가는 데 중요한 이념을 제공하였다.

효경의 효는 그 이전의 공·맹의 효와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공·맹의 효는 부모 및 그 연장으로서의 조상을 그 주된 대상으로 하여 가족 내지 종족을 실천장소로 설정하였지만, 효경의 효는 천하에 순종하는 도 또는 덕을 본으로 여기고 효의 적용범위를 군주까지 확대하여 부의 권위를 상대화시키며 군주를 종족지배 우선하는 것으로 간주하게 하였다. 그 결과 군주에 의한 일원적 지배체제, 중앙집권체제가 성립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1.4. 고려 후기의 유교: 주자 성리학의 수용

고려는 이미 불교와 유교가 이데올로기로 존재해왔으나, 불교는 많은 폐해가 있어 지배층이 보다 철저히 유교를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원나라에서는 송대의 주자학을 관학화하여 지배이데올로기로 채택했고, 또한 원나라는 원과 주변국가 지배관계를 정당화하는 논리로서 인위적으로 전파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내적·외적 조건에 의해 고려 지배층의 주자성리학 수용이 용이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완벽한 주자학의 논리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선진적인 학자들은 기성관념 속에서 불교 내지 축술적·신앙적 사유형식의 영향을 받았으며 비주학적인 방법으로 주자학을 익히게 되었다. 안향이 승려가 부처에 예불하는 것처럼 주자의 화상에 예불하는 우상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나 당시 유자들이 주자의 일언일구를 무조건적으로 암기하는 형태를 보인 것이 이러한 비주학적 태도의 단면이었다.

고려 후기에 들면서 주자학 수용은 안향, 백이정, 권보, 이곡, 이색으로 이어져 점차 그 본의를 이해하게 되고, 현실정치론에서 반영되어 나타났다. 주자학의 핵심인 사서(四書)를 1344년(충목왕 4년)에 과거과목으로 채택하고 이후 1376년(공민왕 16년) 성균관 과목으로 채택한 것으로 보아 고려후기에 본격적으로 주자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송대의 주자학은 사서를 매우 중시하면서 종래의 유교를 보다 철학화, 내면화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이었다. 주자학에는 도문학과 존덕성의 두 측면이 있고, 거경과 궁리의 두 방법이 있다. 원의 성리학은 남송경략 과정에서 중국 한족의 효과적인 지배를 위한 방편으로 관학화되었다. 따라서 원대의 성리학은 주자성리학의 이론철학을 강조하는 궁리의 측면보다는 실천윤리를 강조하는 거경을 통한 수기의 측면을 강조하는 학문이었다.

고려 후기에 수용된 주자학은 원의 만권당에서 공부하던 유자 혹은 정동행성의 향시로부터 출발하여 원의 주자학을 익힌 유자들에 의해서 성립된 것이므로 원의 관학 주자학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고려 유자들은 고려 후기의 사회혼란을 고려왕조의 전반적인 제도개혁이나 체제정비의 차원으로 이해하지 않고, 인간 개개인의 윤리도덕의 문제, 교화의 실현문제로 이해하며 이를 해결하는 방식도 인간의 본성을 중시하는 쪽으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고려후기의 수용된 주자성리학은 원의 영향 속에서 수용자의 현실적 요구에 의한 존덕성과 거경이라는 인간의 내면을 중시한 학문이었다. 특히 이색과 권근은 여말의 사회모순에 대하여 인간의 본성을 중시하는 주자학을 바탕으로 윤리도덕적 정치론을 전개하였다. 반면 정도준, 조준과 같이 고려 후기 모순을 전반적인 체제상의 결함으로 이해하여 재조정 및 제도개혁을 주장하는 부류도 등장하였다. 이처럼 고려 후기 주자학의 수용은 수용자의 주자학 이해방식의 차이에 따라 고려 말의 혼란에 대해 서로 다른 현실정치론을 성립시켰고, 궁극적으로 고려왕조의 수성과 조선왕조의 창업이라는 정치적 흐름까지도 결정하게 되었다.


1.5. 참고문헌

정경희, 『삼국시대 사회와 유교경전 연구』, 「동방학지」 60, 현세대 국학연구원, 1988. 이 논문은 삼국시대의 유교 수용과 그 특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삼국의 유교 수용 과정과 국가 질서 수립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주재혁, 『몽골·고려사연구의 재검토』,「국사관논총 8」, 국사편찬위원회, 1989. 이 논문은 고려시대 몽골과의 관계 및 고려사 연구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고려 후기 주자학 수용과 그 특징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문철영, 『여말 신흥사대부들의 신유학 수용과 그 특징』, 「한국문화」3, 1982. 이 논문은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 신흥사대부들의 신유학 수용 과정과 그 양상을 분석한다. 중세 후기 유학의 확산과 그것이 문학에 미친 영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이상으로 참고문헌에 대한 내용을 작성하였다. 1.5절에 언급된 세 편의 논문은 유교의 수용과 전개 과정, 고려 후기 주자학 수용, 신흥사대부의 신유학 수용 등 유교 사상과 문학의 관계를 다각도로 다루고 있어, 본 레포트의 이해를 돕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2. 중세후기문학-제1기 고려후기
2.1. 무신란 · 몽고란과 문학

무신란 이후에도 문학활동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왕성한 창작의욕과 날카로운 비평의식을 가지고 문학을 새롭게 하였다. 무신란 이후 문학이 활발해진 이유는 여러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무신란 학살에서 살아남은 문인들이 현실에서 도피하면서 문학에 탐닉한 결과 문학이 융성하게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규보를 비롯한 일군의 신진 문인들은 그렇게 볼 수 없어서 이는 불완전한 이유일 뿐이다.

둘째, 무신정권의 성격변화에서 문제해결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정중부를 비롯한 초기집권자들의 실패를 시정하고, 후기의 최충헌과 그 후계자들은 서방이라는 기구를 만들어 문신들을 등용하고 포용함으로써 문학이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문신이 나라의 주인으로 군림할 때의 위세를 잃고 무신의 서기 노릇을 한다면 문학이 위축되었어야 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기에 이 견해 역시 재검토가 필요하다.

무신란 이전의 문인과 무신란 이후의 문인은 동질적인 문인이 아니다. 무신란 이후 특권의식이나 형식주의를 특징으로 삼는 문벌귀족의 문학이 몰락하고 청산되었다. 무신정권은 스스로 문학을 일으킬 수 없었고, 지방 향리, 중소 지주 출신의 문인들(신흥사대부, 신진사류. 이후 조선왕조 건국세력)이 중앙정계에 등장해 새로운 문학을 이룩하는 주체가 되었다.

신흥사대부는 사회를 재구성하면서 필요한 실무, 기술, 의학, 농업, 유학, 애민이념을 확립하였다. 농민과 천민의 반란이 계속 되는 상황에서, 김극기나 이규보는 농촌실정을 문제 삼고 농민의 어려운 처지에 공감하는 문학으로 나아갔다.

무신란 이후 문벌귀족은 결정적인 타...


참고 자료

정경희, 『삼국시대 사회와 유교경전 연구』, 「동방학지」 60, 현세대 국학연구원, 1988.
도현철, 『고려시대 유교의 전개와 성격』, 「한국사」4, 한길사, 1994
주재혁, 『몽골·고려사연구의 재검토』,「국사관논총 8」, 국사편찬위원회, 1989
문철영, 『여말 신흥사대부들의 신유학 수용과 그 특징』, 「한국문화」3, 1982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지식산업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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