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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진왜란의 배경과 원인
1.1. 조선 내부의 정치, 경제, 사회적 혼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조선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 각 방면에서 큰 혼란이 일어났다. 신분 제도와 군역 제도가 무너져 권문세도가가 농장을 확대하기 시작했으며 공납 제도도 문란해지면서 사회 전반이 동요하는 기미를 보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조정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실의 척신들의 권력 쟁탈전이 발발하여 을사사화가 발생했다. 사림파 집권 이후에도 정권은 동인과 서인 양대 세력으로 분열되어 대립을 거듭했다.
이처럼 조선 내부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혼란은 임진왜란 발발의 배경이 되었다.
1.2.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계획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계획은 다음과 같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는 먼저 1586년경부터 대규모 선박 건조 계획을 수립하고 각 제후에게 녹봉의 액수에 따라 차등을 두어 선박을 건조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임진왜란 직전에는 1천여 척의 전선을 확보할 수 있었고, 전쟁 말기에는 3천여 척의 선단을 보유하게 되었다.
또한 도요토미는 1590년부터 각 제후들에게 출정부대의 군량을 준비하도록 명령하였다. 부족한 군량은 시장과 농민을 통해 충당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1년에는 일본 각지에 동원령을 내려 총병력 33만 명을 동원할 수 있는 전쟁 준비 태세를 갖추었다.
특히 도요토미는 조선과의 교섭을 통해 전쟁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1591년 쓰시마 국주 소 요시토시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가도입명(假道入明)"을 요청하였다. 이는 조선이 명나라로 가는 길을 내어주기를 요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명과의 군신대의를 깨뜨릴 수 없었고, 일본의 사신을 업신여기며 거절하였다. 이에 도요토미는 결국 조선을 침략하기로 결정하였다.
요약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하고 철저한 사전 준비를 통해 조선 침략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결국 무력으로 조선을 침략하게 된 것이다.
1.3. 조선과 명나라의 군신관계
조선과 명나라의 군신관계는 당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특징이었다. 조선은 명나라와 사대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이는 조선이 제후국으로서 명나라에 예와 명분에 합당한 불평등한 지위를 인정하고 명에 복속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명 황제에 의거한 조선 국왕 책봉 수용, 명 연호 사용, 정기적인 조공 등의 의무가 부과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대 외교 관계에서도 명의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은 거의 없었으며, 오히려 조선은 명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려고 노력하였다. 즉, 사대 관계는 조선이 명을 대상으로 한 굴복이라기보다는 왕권 안정을 도모하고 문화적 발전을 추구하기 위한 외교적 수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임진왜란 발발 당시 조선은 명을 섬기는 군신관계에 있었지만, 이는 조선이 명에 복속되어 있었다기보다는 상호 이익을 위한 전략적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군신관계로 인해 임진왜란 발발 시 조선은 명나라의 구원을 요청할 수 있었고, 이에 명나라는 조선에 대규모 원군을 파견하게 되었다.
1.4. 명나라의 내부 혼란
명나라의 내부 혼란이 임진왜란 발발에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명나라는 만력제 시기 정국 혼란에 빠져 있었다. 만력제는 국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에만 빠져 있었고, 몽골의 항장 보바이의 반란과 귀주의 토관 양응룡의 난을 평정해야 했다. 이어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명나라는 3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조선에 파견하여야 했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물자와 식량 등의 재정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명나라의 재정이 심하게 흔들렸다. 특히 임진왜란에 군대를 파견하면서 국가 재정이 문란해져 여진족이 흥기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결국 청·명 교체의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2. 임진왜란의 발발
2.1. 부산진성 함락과 왜군의 북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1592년 4월 13일 약 7백 척의 병선에 휘하의 장졸을 태워 오우라항을 떠났다. 그들은 다음날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여 부산진성을 침입하였다. 이때 부산진의 첨사 정발은 목숨을 다해 가며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일본군에 밀려 패하고 군민들과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
부산진성이 함락된 후 일본군은 점차 북상하였다.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2대는 부산에 상륙하여 울산을 함락시킨 뒤 영천, 군위 등을 거쳐 중로군과 합하여 충주로 진군하였다. 제3대의 군대장 구로다는 동래에서 김해로 침략하여 우로로 지례, 금산을 거쳐 추풍령을 넘어 청주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제4대는 김해에서 제3대와 함께 창녕을 점령한 뒤 성주를 거쳐 추풍령 북상로로 향하였다. 제5대도 부산에 상륙하여 북쪽으로 진격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순식간에 5만 대군이 조선 내륙으로 쇄도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 정부는 급보를 접한 뒤 여러 대책을 강구하였다. 경상좌수사 박홍의 장계에 이어 확실한 보고를 받은 조정은 이일을 순변사로, 성응길을 좌방어사로, 조경을 우방어사로 임명하여 지역을 할당하고 관군을 보내어 대응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은 군대에 대해 생소한데다 장수들도 오랜 전쟁 경험이 없어 전력을 펼치기 어려웠다. 결국 왜군의 북진은 속도를 내며 순식간에 진행되어 불과 20일 만인 5월 3일 한양이 함락당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일본군은 개전 후 단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는 돌풍을 일으키며 막강한 전력을 과시하였다. 조선 정부와 군대의 조직적 대응 능력이 부족했고 백성들의 협력을 이끌어내지 못한 것이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2.2. 의병 부대의 활약과 명군의 참전
의병 부대의 활약과 명군의 참전이다.
개전 후 2달이 지나자 곽재우, 조헌, 고경명 등의 호국지사들과 정부에서 내려 보낸 수령들의 주도로 집결한 지방군들이 일본군의 육상 보급로를 압박하여 각지에서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이들 의병 부대들은 일본군의 보급선과 통신망을 차단하며 일본군을 곤란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