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1945년 해방 이후 미국과 소련의 임시정부 구상"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의 전개
1.1.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
1.2. 모스크바 3상회의와 미소공동위원회
1.3. 반탁운동과 좌우합작운동의 좌절
1.4. 남북한 분단정부 수립
1.5. 6.25 전쟁의 발발과 휴전
2. 분단체제와 군부독재
2.1. 반공체제와 이승만 정권의 장기집권 시도
2.2. 4.19혁명과 장면 정부
2.3. 박정희 군부정권의 등장과 개발독재
2.4. 유신체제와 전두환 정권의 등장
3. 민주화 운동과 성취
3.1. 부마항쟁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3.2. 6월 민주항쟁과 군부독재의 종식
3.3. 문민정부의 출범과 민주주의의 제도화
4. 경제 발전과 사회 변화
4.1. 수출주도형 경제성장과 농촌의 변화
4.2. 중화학 공업화와 산업화
4.3. 외환위기와 금융ㆍ재벌개혁
4.4. 교육의 보편화와 여성의 지위 향상
5. 북한의 현대사
5.1. 토지개혁과 사회주의 체제 수립
5.2. 김일성 유일지배체제의 구축
5.3. 선군정치와 김정은 체제
6.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의 전개
1.1.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
1945년 8월 초 일본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한국의 민족지도자를 찾아 한국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협상대상자로 삼고자 하였다. 이때 건국 준비를 위한 민족의 대표기관과 정치세력 형성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여운형이 이에 동조하면서 협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미 1944년 8월 10일 비밀리에 '건국동맹'이 조직되었고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을 때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발족하게 된다.
건준의 사무실은 서울 풍문여자중학교에 두었고, 위원장에 여운형, 부위원장에 안재홍과 허헌, 총무부장에 최근우, 재무부장에 이규갑, 조직부장에 정백, 선전부장에 조동호, 무경부장에 권태석 등으로 진용을 갖추었다. 그러나 건준이 지나치게 좌익진보세력으로 조직되자 민족주의계 인사들이 이에 반발하여 탈퇴하였으며, 부위원장 안재홍도 탈퇴하여 9월 1일 조선국민당을 창당하였다.
9월 4일 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려 집행위원회 개편을 단행하였고 9월 6일에는 600여 명으로 구성된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소집하였다. 경기여자중학교에서 열린 이 회의에서 '조선인민공화국 임시조직법안'이 통과된 뒤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건준은 9월 7일 해체되고 9월 11일 중앙인민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에 여운형, 총리에 허헌이 각각 추대, 임명되었다.
그러나 창당 선언 시부터 건준을 반대하고 임시정부의 귀국을 기다리던 김성수·송진우·장덕수 등 우익진영은 이들 조직을 '벽상조각'이라고 비난하였다. 그후 해외 독립운동지도자들이 귀국하고 이승만이 주석 취임을 거절하자 조선인민공화국은 자연 해체되었다. 이러한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은 해방 당시 국내 정치 세력의 총합체가 되지는 못했지만, 일종의 '상층 통일전선체' 로서 전체 국민의 지지를 받으면서 정치적 공백기에 국내정치와 치안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1.2. 모스크바 3상회의와 미소공동위원회
1945년 12월, 미국·영국·소련 3국 외상이 모스크바에 모여 개최한 3상회의(モスクワ三相会議)에서 한국 문제를 비롯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여러 지역의 처리 문제에 대해 협의하였다. 모스크바 3상회의는 한반도의 전후 처리 방식으로 신탁통치안을 결정하였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한국 관련 결정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고, 민족적 원칙에 바탕을 둔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여건을 창출하기 위해 임시 민주정부를 수립한다.
둘째, 한국 임시정부 구성을 지원하기 위해 남한의 미군사령부와 북한의 소련군사령부 대표들로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할 것이다. 이 공동위원회는 한국의 민주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하여 건의안을 작성할 것이다.
셋째, 미소공동위원회의 제안을 토대로 한국 임시정부와 협의를 거쳐 최고 5년 기한의 4개국 신탁통치에 관한 협정을 검토할 것이다.
넷째, 남북한 관련 긴급 문제와 행정·경제 부문의 균형 수립을 위해 2주 이내에 미군사령부와 소련군사령부 대표로 구성된 회의를 개최할 것이다.
이처럼 모스크바 3상회의는 한반도의 신탁통치와 임시정부 수립 방안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결정 내용이 국내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혼란과 대립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1946년 1월 16일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이 개최되었다. 미국 측 대표는 아놀드 소장이, 소련 측 대표는 스티코프 중장이 맡았다. 이 회담에서 양측은 시급한 현안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지만, 1개월 이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고 2월 5일에 폐회하였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1946년 3월 20일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소련 측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협의대상 선정 기준으로 ①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지지, ② 민주적 성향, ③ 대소련 침략 세력이 아닐 것 등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미국 측은 대부분의 한국인이 모스크바 협정에 반대하며, 따라서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세력을 협의대상에서 배제할 수 없다고 맞섰다.
결국 양측은 타협안을 마련하여 4월 17일 미소공동위원회 '코뮤니케 제5호'를 발표하였다. 이에 따르면 협의대상 정당·단체는 모스크바 3상회의 협정을 지지하는 선언서에 서명해야 했다. 그러나 이후 미소 간 선언서 서명의 의미를 두고 다시 논란이 일어나 5월 6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무기한 휴회에 들어갔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1947년 5월 21일 재개되었다. 남북한 총 461개 정당·사회단체가 협의대상으로 참여하였으나, 7,000만 명에 달하는 과다한 인원으로 구성되어 사실상 정상적인 운영이 불가능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협의대상 문제를 둘러싸고 다시 대립이 격화되어 결국 8월 중순 결렬되고 말았다.
이처럼 미소공동위원회는 한국의 정치세력과 관련 문제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입장차로 인해 2년여 동안 성과 없이 결렬되었다. 이에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에 이관하기로 결정하였고, 유엔 총회는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한에서의 총선거 실시를 결의하였다.
1.3. 반탁운동과 좌우합작운동의 좌절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안이 발표되기도 전에 신탁통치 문제에 관한 왜곡된 정보가 국내에 전달되면서 격렬한 반탁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해방 직후 한반도의 정치 상황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해방과 함께 독립을 기대하고 있던 민중들은 신탁통치 안이 전해지자 좌우익을 막론하고 이를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신탁통치를 일제의 지배와 유사한 식민상태의 연속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모든 민족세력은 탁치반대운동을 전개하였고, 한반도는 새로운 정치적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승만과 김구를 중심으로 한 우익 및 민족진영이 주도한 반탁운동은 남한단독정부수립문제를 둘러싸고 결국 이승만의 단정(단독정부)노선과 김구의 단정불가·통일정부노선으로 갈라졌다. 1946년 3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면서 반탁진영은 입장에 변화가 생겼다. 반탁진영은 "선언서 제출이 신탁통치를 수락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반탁 민족진영이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임시통일정부 수립에 참가함으로써 신탁통치를 실질적으로 반대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하지만 미소 간 의견대립으로 인해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반탁운동 속에서도 노선 대립이 분명해졌다.
이후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고 이들이 토지개혁과 산업국유화 등 각종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남한에서는 반공체제가 강화되면서 정치적 갈등이 격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도 노선의 여운형과 김규식은 좌우세력의 대립을 해소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모색하기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
좌우합작운동은 토지개혁, 친일파 처리 등을 둘러싼 좌우세력의 이견으로 난항을 겪었지만, 7원칙이라는 절충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핵심정치세력들의 동의를 얻지 못한 채 점차 정체되었고, 여운형의 암살과 미국의 한국문제 UN 이관 등으로 인해 좌절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분단이 고착화되고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소련의 냉전 대립이 한반도 문제에 깊이 개입하면서, 한국 민족의 통일 열망은 좌절을 맞이하게 되었다"이다.
1.4. 남북한 분단정부 수립
1.5. 6.25 전쟁의 발발과 휴전
25 전쟁의 발발과 휴전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38선을 넘어 기습적으로 남한을 침공하면서 6.25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초기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유엔군은 38선을 돌파하고 평양까지 진격했다. 이에 중국군이 개입하면서 전세가 다시 불리해졌고, 3년여 간 남북한의 치열한 공방 끝에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6.25 전쟁은 막대한 인적ㆍ물적 피해를 초래했다. 약 100만 명의 군인과 수백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으며, 한반도 전역이 폐허로 변했다. 이로 인해 남과 북은 오랫동안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또한 전쟁은 남북한 간의 적대감을 더욱 심화시켰고, 이후 각자의 진영에서 반공과 사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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