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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 혁명의 배경
1.1. 앙시앵 레짐과 신분제도
프랑스 혁명의 배경에는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과 신분제도의 모순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앙시앵 레짐은 전근대적인 봉건제와 신분제를 기반으로 한 절대왕정 체제였다. 이 체제에서는 전체 인구의 2% 미만을 차지하는 제1신분(성직자)과 제2신분(귀족)이 특권계급으로서 국토의 40%를 소유하고 면세 특권과 연금 등의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반면 전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제3신분(평민)은 참정권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무거운 세금 부담에 시달리고 있었다.
제1신분인 성직자계층은 계급적으로 두 갈래로 나뉘었다. 주교나 수도원장 등 고위성직자는 귀족과 유사한 지위를 누렸지만, 사제나 대다수의 수도사와 같은 하위성직자는 평민과 크게 다르지 않은 대우를 받았다. 따라서 구체제하에서는 실질적으로 귀족과 평민이라는 두 계급만이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제2신분인 귀족 계급은 '구귀족'(대검귀족)과 '신귀족'(법관귀족)으로 구분되었다. 이들은 약 40만 명 정도였지만, 국토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토지를 소유하고 각종 면세 특권과 명예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반면 전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제3신분은 참정권도 없었을 뿐더러 귀족과 성직자에 의해 가혹하게 수탈당하고 있었다.
이처럼 구체제에 내재된 신분제도의 모순은 점차 심화되어 갔고, 이는 혁명을 발발시키는 주요 배경이 되었다. 특권 계급의 지배와 평민의 착취로 점철된 절대왕정 체제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고조되면서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1.2. 재정 위기와 삼부회 소집
루이 16세는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려 재정 개혁을 단행하려 하였다. 국왕은 1789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삼부회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표결방식을 둘러싸고 귀족, 성직자 대표와 평민 대표 간에 갈등이 생겼다. 귀족, 성직자 대표는 신분별 표결 방식을, 평민 대표는 머리수 표결 방식을 지지함으로써 자신들이 속한 계급에 유리한 방향으로 회의를 이끌려고 한 것이다.
프랑스혁명의 직접적 원인은 재정적 파탄이었다. 루이 14세는 각종 전쟁에 참가하고 미국독립혁명에 원조하여 프랑스의 재정적 파탄을 초래하였다. 루이 14세는 이러한 재정적 파탄을 극복하고자 특권계급에 상관없이 모든 토지에 과세하고자 하였으나 성직자와 귀족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그리하여 새롭게 과세의 승인을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160년 이상 열리지 않았던 신분제 회의인 삼부회를 개최했다. 삼부회는 1614년 이후 한 번도 소집된 적이 없는 신분 대표 회의로서, 루이 16세는 여기서 조세인상에 대한 동의를 받아내고자 했다.
1.3. 부르주아의 등장과 개혁 요구
구제도 하에서 제3신분에 속했던 부르주아는 점차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부르주아는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에 봉건적 신분제와 절대왕정 체제의 구속에서 벗어나길 원했다. 그들은 가치 있는 개인의 능력과 재산을 인정하고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보장받기를 요구했다.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은 이미 18세기부터 두드러져 왔다. 유럽 대륙에서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가 발전하면서 부르주아는 경제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특히 프랑스에서 부르주아는 신흥귀족으로 분류되어 고등법원의 평정관에 진출하는 등 점차 기득권층에 편입되었다.
부르주아는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