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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민상회"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개항기 조선의 변화
1.1. 정치적 변화
1.1.1. 개화파의 등장
1.1.2. 위정척사운동의 전개
1.1.3.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파
1.2. 경제적 변화
1.2.1. 개항장의 확대와 상권 침탈
1.2.2. 일제의 금융 장악
1.2.3. 일제의 토지 침탈
1.2.4. 방곡령과 상권 수호운동, 이권 수호운동
1.3. 사회적 변화
1.3.1. 갑오개혁
1.3.2. 자주 독립, 자유 민권, 자강 혁신
2. 개화파의 분화와 갑신정변
2.1. 온건 개화파
2.2. 급진 개화파
2.3. 갑신정변의 개요 및 실패 원인
2.4. 갑신정변의 의의
3. 개항 이후 경제·사회 구조의 변화
3.1. 열강의 경제적 침탈 가속화
3.2. 상권 수호와 상공업 진흥 노력
3.3. 교육·언론 기관의 설립과 민권 의식 성장
4.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개항기 조선의 변화
1.1. 정치적 변화
1.1.1. 개화파의 등장
조선 후기에 들어 봉건적 사회구조가 크게 동요하면서 양반과 평민 간 부의 분배에 차이가 발생했다. 이에 따라 유교적 신분제도가 흔들리고 지방관의 수탈이 극심해지며 전국 각지에서 농민 항쟁이 일어났다. 1876년 개항을 계기로 조선은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었고, 이에 따라 개화세력과 척사세력으로 양분되었다.
개화파는 1870년대 형성되기 시작하여 1880년대 정부 개화정책 실시와 함께 본격적으로 정계에 등장했다. 초기 개화파의 대표적 인물은 북학과 개화사상을 계승한 박규수이다.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직계 후손으로 홍대용의 손자 홍양후와 교류하며 북학 사상을 이어갔다. 1840년대부터 아편전쟁 등 해외 정세에 관심을 가지고 서학중원설과 동도서기론을 주장하며 개화사상을 형성했다.
한편 중인층의 역관 오경석도 개화사상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경석은 직업상 청나라를 여러 차례 다니며 북경의 양무관료들과 교류하며 『영환지략』, 『해국도지』 등 서적을 수집했다. 이를 양반 자제들에게 전달하여 개화사상 형성의 토대를 마련했다.
개화사상은 실학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청과 일본의 외래사조의 영향을 받아 성립되었다. 내적으로는 화이론을 극복하고 개국통상론을 주장했던 북학파의 흐름을, 외적으로는 청의 양무론과 일본의 문명개화론을 받아들인 것이다. 개화파는 만국공법에 주목하여 조약과 통상을 중시하고, 국내 산업 육성과 재정 합리화, 군사력 강화 등을 통한 자강을 추구했다.
이처럼 개항 후 대두된 개화파는 전통사회의 변혁을 추구했던 근대 지향적 세력이었다. 그들은 시대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독립과 개혁을 이루고자 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1.1.2. 위정척사운동의 전개
조선 정부의 초기 개화 정책 추진에 보수 양반 유생들은 위정척사운동으로 맞섰다. 반외세, 반침략 운동인 위정척사운동은 크게 네 가지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위정척사운동은 병인양요 시기이며, 이항로, 기정진 등이 서양의 무력 침략에 대항한 척화주전론을 주장했다. 이들은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을 지지했다. 이어서 정부가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려고 할 때 최익현을 중심으로 한 유생들이 일본이 서양 오랑캐와 같다는 왜양일체론을 주장한다. 결국 최익현은 이 사건으로 유배되었다. 정부가 미국과의 수교를 추진하려던 시기에는, 영남 지방의 유생들이 이만손을 중심으로 만인소를 올려 서양 열강과의 수교를 반대하고 조선책략을 유입시킨 김홍집의 처벌을 요구했다. 정부는 이만손을 유배시키고 탄압했다.
한편 일제가 민비를 시해한 사건인 을미사변과 그 직후 시행된 단발령은 다시 한 번 위정척사운동의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다. 위정척사운동은 1890년대 이후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유인석, 이소응 등의 항일 의병 운동으로 계승되었다. 위정척사운동은 서양 열강과 일제의 침략 그리고 개항 자체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경각심을 높였다는 점에서 나름의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성리학적 사상에 따라 조선 왕조의 전제주의 정치 체제를 지지했지만 양반 중심의 봉건 사회를 옹호하는 한계를 보였다.
1.1.3.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파
1880년대 조선에서는 개화파 내부에 청과 일본의 외교적 대립 및 개화 방식을 둘러싸고 온건파와 급진파로 분화가 일어났다. 온건파는 청의 양무운동을 모델로 삼아 점진적인 개화를 추진하고자 했던 반면, 급진파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참고하여 과감한 개혁을 추구하였다.
온건 개화파는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으로 대표되었다. 이들은 동도서기론의 입장에서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동도서기론이란 동양의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즉, 유교적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서양의 기술 문명을 받아들이자는 것이었다. 온건파는 청과의 전통적 관계를 중시하고 민씨 척족 정권과의 타협을 모색하는 등 점진적이고 보수적인 태도를 보였다.
반면에 급진 개화파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으로 대표되었다. 이들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삼아 낙후된 조선을 근대 국가 체제로 개혁하고자 했다. 급진파는 청과의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민씨 척족 정권의 부패와 무능을 비판하며, 군주권을 제한하고 내각이 책임정치를 하는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고자 했다. 이들은 국제사회가 약육강식의 관계라고 보고, 자주 국권을 확보하기 위해 과감한 개혁을 추구했다.
온건파와 급진파의 이러한 입장 차이는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선 정부에 대한 청의 간섭이 심화되면서 더욱 뚜렷해졌다. 개화파 내부의 이러한 분열은...
참고 자료
김신재(1999), 『갑신정변기 변법개화파의 대외인식과 자주국권론』,동국사학 제33집 83p-107p
『자료모음 근현대 한국탐사』, 1994, 권태억 외,
『환재 박규수 연구』 2008, 창비, 김명호
『한국사 11 근대민족의 형성 1』 1994, 한길사, 강만길 저 외 173명
『아틀라스 한국사』 2009, 사계절,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한국역사입문(3)』, 1996, 한국역사연구회 엮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