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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들러 개요
1.1. 아들러의 생애
1.1.1. 어린시절
아들러는 1870년 2월 7일 중류층 유태인 상인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4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들러는 골연화증으로 4살까지 걷지 못했으며 5살 때는 폐렴에 걸려 죽을 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받았다. 또한 동생의 죽음과 아들러의 병약했던 어린 시절로 인해 의사가 되기로 했다고 한다. 잦은 병치레로 어머니의 관심을 많이 받았었지만 동생 때문에 관심을 뺏기면서 어머니와는 관계가 멀어지고 아버지와 가깝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형인 'siegmund'를 질투해 청소년기 까지 형제간 갈등을 경험하였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수학 점수가 좋지 않아 구두수선공 수련을 받게 하라고 교사가 아버지에게 조언을 했으나 아버지는 아들러를 격려하였고 결국 후에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획득하였다."
1.1.2. 성인기 및 사망
(성인기 및 사망)
아들러는 1895년 비엔나 대학에서 의학 전공 의사자격증을 획득하여 안과의사로 개업을 하고 후에 일반의로 바꾸고 결국 신경학과 정신의학을 전공하였다. 개인의 치료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던 아들러는 아동 양육, 학교 개혁, 갈등을 야기하는 편견 등과 관련된 문제를 자주 거론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 군의관으로 참전하고 비엔나의 32개 공립학교에 아동 클리닉을 개설하여 교사, 사회 복지사, 의사를 교육시켰다. 1897년에 사회주의자 모임에서 만난 러시아 유학생과 결혼하여 4자녀를 두었고, 사회주의자인 아내의 영향으로 그는 남성과 등등한 여성의 권리를 옹해했을 뿐만 아니라 평등하고 민주적인 인간관계를 강조하였다.
1930년대에 독일의 나치세력이 오스트리아에서도 점차 강해지자 아들러는 고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갔다. 1937년 5월 28일 아들러는 스코틀랜드 애버딘의 한 대학에서 강연을 앞두고 산책을 하던 중에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1.2. 개인심리학의 발전과정
1.2.1. 프로이드와의 만남과 결별
아들러는 1895년 비엔나 대학에서 의학 전공 의사자격증을 획득한 이후 안과의사로 개업을 하였다. 하지만 곧 일반의로 바꾸고 결국 신경학과 정신의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들러는 개인의 치료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아들러는 프로이드를 만나기 이전에 이미 정신분석을 개관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아들러가 프로이트 진영에 참여하게 된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1902년에 프로이드는 의 모태가 된 수요일 저녁 모임에 아들러를 초대하였다. 이후 1907년 아들러는 그의 유명한 논문인 를 발표하였고, 프로이드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1910년에는 학회의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들러는 인간발달에 있어서 인간의 근본적 동기가 "성 < 사회적 요인"에 의해서 생긴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프로이드의 주장과는 다른 것이었다. 결국 1911년에 아들러는 프로이드와 결별하고 를 떠나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를 설립하며 독자적인 행보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학회는 나중에 의 근간이 되었다.
이처럼 아들러는 프로이드와의 만남과 결별을 거치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개인심리학 이론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의 이론은 이후 많은 영향을 끼치며 현대 심리치료 발전에 기여하게 되었다.
1.2.2. 독자적 이론체계 모색
아들러는 프로이드와의 결별 이후 독자적인 이론체계인 개인심리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는 Hans Vaihinger의 '마치 ~처럼'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아 개인의 행동을 생물학적, 외적, 객관적 요인보다는 심리적, 내적, 주관적 요인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특히 아들러는 개인의 행동 동기를 성적 충동이나 리비도가 아닌 권력추구 또는 완전성의 추구로 대체하였다. 즉, 인간의 근본적 동기는 사회적 요인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프로이드의 이론과 크게 달랐다.
또한 아들러는 1912년 『개인심리학의 실제』를 발간하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이론 체계를 발전시켰다. 그는 개인의 행동이 생물학적, 외적, 객관적 요인보다는 심리적, 내적, 주관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이처럼 아들러는 프로이드 이론과 결별한 이후 자신만의 고유한 개인심리학 이론을 구축해 나갔다.
1.2.3. 사회참여의 강조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의 군의관으로 참전한 아들러는 인간 본성에 관한 부분에 있어서 중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 연대감을 관찰하면서 "공동체 의식"이 인간의 기본적 동기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아들러는 이를 통해 인간은 사회적 참여를 통해 인생의 의미와 자기 가치감을 추구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즉, 열등감을 보상하기 위해 능력을 개발하고 사회적 참여를 통해서 인생의 의미를 추구한다는 개인심리학의 기반을 형성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고아들로 가득하게 된 상황에서 아들러는 여러 학교에 상담소를 개설하고 운영하였다. 이때 교사와 부모가 함께 참여하는 공개적인 토론모임을 가졌다. 문제 아동에 대해서 자유롭게 토론하면서 의견교환을 하고 아들러는 아동과 직접 면담을 하고 나서 최종적으로 교사, 부모 또는 아동에게 문제해결을 위한 조언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공개 토론 모델은 알려져 있으며 공동체 정신건강 프로그램을 발달시키는 초석이 되었다."이다.
1.2.4. 개인심리학의 보급과 사회적 활동
1920년대부터 아들러는 강연활동을 통해서 유럽과 미국에 개인심리학을 보급했다. 아들러는 아동 지도 클리닉을 개설하고 아동 교육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활발한 사회적 활동을 펼쳤다. 1927년에 출판된 "개인심리학의 실제와 이론과 인간이해"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아들러가 사망한 후에는 Rudolf Dreikurs(1897-1972)가 아들러의 가르침을 전승하며 개인심리학을 발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