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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구 근대의 초상: 이성과 신앙
1.1.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유럽을 중세로부터 끊어내고 근세로의 진입을 이끌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카톨릭 교회와의 싸움을 격화시켰고, 대중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았다. 비텐베르크 성 교회는 종교개혁의 시작과 전개과정을 보여주는 "정신적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은 유럽 여러 민족의 잠자던 의식을 깨웠다. 루터가 제시한 "만인 제사장 교리"는 평신도들의 의식을 일깨워 주었고, 이는 서구 근대 문명의 주체인 개인의 탄생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요컨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중세로부터 근세로 이행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그 과정에서 인쇄술의 발달과 성경 보급, 만인 제사장 교리의 확산 등을 통해 서구 근대문명의 주요 변화를 이끌어냈다고 볼 수 있다.
1.2. 루터와 만인의 제사장
마르틴 루터(1483-1546)는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종교개혁을 주도했는데, 그의 "만인 제사장" 사상은 그 핵심 중 하나였다.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라는 신앙 고백을 통해 천주교회의 성직자 중심 구조를 비판하고, 각 그리스도인이 직접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다는 사상을 제시했다.
루터는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일반 신도들이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게 했다. 이를 통해 성서가 교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신도들의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세례와 성찬 등의 성사에 있어서도 성직자의 중개 없이 신도 개인이 직접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루터의 사상은 당시 천주교회의 타락과 부패에 대한 반발로 나온 것이었다. 성직자들의 부도덕한 행태와 면죄부 판매 등에 대한 비판이 그의 주장의 배경이었다. 그는 교회의 권위가 성서와 신앙에 기초해야 한다고 역설했고, 그래야만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직접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다고 보았다.
나아가 루터의 "만인 제사장" 사상은 당시 신분제도와 신분 차별에 대한 비판으로도 이어졌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평등하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이는 신분제도에 기반한 봉건사회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 결국 루터의 사상은 종교적 차원을 넘어 사회·정치적 차원으로까지 확장되어, 근대로의 전환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된다.
1.3.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16세기가 왔다. 1000년 유럽 지성사를 억누르던 천동설이 폐기됐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적 탐구와 탐험의 시대가 도래했다.
1543년 폴란드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가 라틴어로 쓴 논문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출간되었다. 그는 이 논문에서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고 지구를 비롯한 행성들이 태양 주변을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주장했다. 이로써 중세 동안 지배적이었던 지구중심설이 폐기되었다.
16세기 시대정신 속에서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 크라쿠프, 이탈리아 볼로냐, 파도바대학에서 신학과 법학, 천문학, 수학과 의학을 공부했다. 1450년 독일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기독교 성서를 인쇄했고,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면죄부를 비판하며 종교개혁을 선언했을 때, 이 루터의 선언문도 인쇄술로 2주만에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이처럼 16세기는 정보와 지식을 대중화한 혁명적 변화를 가져온 시기였다. 코페르니쿠스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자신의 지동설을 내놓았다. 그의 논문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지구를 움직이게 하면 모든 천체 현상이 신의 섭리에 맞게 너무나도 간단하게 설명이 되었다. 기독교 성경 구절 "땅은 영원히 있도다"라는 구절에 생각이 묶여있었던 유럽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 인해 해방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강단의 교수들의 비난이 두려워 자신의 논문 출간을 40년이나 미루었다. 하지만 이 출간도 사실 그의 새로운 발견이 학계에 알려지게 해달라는 그의 학설에 매료된 가톨릭계 인사들의 아주 간곡한 부탁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1543년 출간된 이후 유럽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17세기 후반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관찰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입증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모형은 당시 교황청에 의해 일시적으로 탄압을 받기도 했다. 1992년 10월 31일 264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오를 복권시켰다. 갈릴레오 재판 359년 만의 일이었다.
이처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유럽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천문학의 발전과 더불어 기존의 천동설을 타파하고 지구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는 곧 중세 유럽에서 근대로 나아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4.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1세(1558-1603)는 영국의 여왕으로, 자신의 종교정책, 군사력, 문화정책 등을 통해 영국을 평화의 시대로 이끄는데 성공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종교정책은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독립하여 영국 성공회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국교회 예배에 참석하도록 의무화하였지만, 반대하는 카톨릭 신자들에게 참여를 강요하지 않는 관용정책을 펼쳤다. 이를 통해 신교와 구교 간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었다.
또한 엘리자베스는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퇴하여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함으로써 영국의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이는 당시 카톨릭 국가였던 스페인에 대한 영국의 대항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편 엘리자베스 여왕은 연극을 사랑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당시 런던에 세워진 글로브 극장 등은 엘리자베스 시대 영국 연극의 중심지였다. 이를 통해 중산계급의 확장과 문화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는 영국을 평화와 번영의 시대로 이끌었다. 그녀의 다각도의 정책은 영국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5. 서구 근대 런던의 극장과 문화정책 중산계급의 확장
엘리자베스 1세(1558-1603) 치세의 영국은 16세기 유럽에서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문화정책을 통해 극장을 사랑하고 중산계급의 확장을 장려하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연극을 사랑하고 런던에 극장이 생겨나게 하는 등 문화정책에 힘썼다. 당시 연극은 계급을 초월하여 누구나 함께 즐기는 최고의 오락물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연극 관람을 적극 지원하였고, 이에 따라 런던에는 극장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대표적인 극장이 바로 글로브 극장이다. 1598년 버비지 형제가 런던의 템스 강 남쪽 사우스워크에 지은 이 극장에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상연되었다.
연극은 당대 여가 시간을 보내는 최고의 오락물이었다. 극장은 누구나 계급에 상관없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장소였다. 이처럼 엘리자베스 여왕의 문화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