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전국 주요 지역의 역사와 문화 유적
1.1. 충북 옥천의 역사와 문화유산
1.1.1. 옥천의 지리적 특징
옥천의 지리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옥천은 충청북도 중남부에 위치한 군으로, 남한의 거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동쪽으로는 소백산맥을 경계로 경상북도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보은군, 남쪽으로는 영동군과 접하고 있다. 전라북도 무주군에서 발원한 금강 상류가 옥천군을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어 교통의 요지로 기능해왔다. 지형적으로는 동쪽이 높고 서쪽으로 갈수록 낮아지는 산악지대로, 동쪽의 소백산맥이 최고봉을 이루고 있다. 서쪽으로는 금강의 본류 유역에 뚜렷한 평야가 발달하지 않고 대부분 협곡을 이루고 있다. 내륙 분지인 옥천분지와 청산분지가 형성되어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으며, 금강의 지류인 보청천과 옥천천이 합류하여 옥천의 수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지리적 특성은 옥천의 역사와 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1.1.2. 옥천의 역사
옥천의 역사는 신라시대부터 민족의 근간을 이루어왔다. 본래 신라의 고시산군(高是山郡)을 경덕왕 때 관성(冠城)으로 고쳤으며, 고려 8대 현종 시에는 경산부(京山府)에 속하였다가 16대 인종 시에 다시 현령을 두고 관장하였던 바 18대 명종 시(1183년)에 아전과 백성들이 현령인 홍언을 잡아 가두는 사건이 발생하여 이에 관호(官戶)를 폐지하였다. 이후 25대 충선왕 시(1313년)에 지옥주사(池沃州事)로 승격시켜 경산부에 속해 있었던 이산(利山), 안읍(安邑), 양산(陽山)의 3현을 관리하도록 하였고, 조선 3대 태종 시(1413년)에는 지명을 지금의 옥천(沃川)으로 고치고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편입시켰다. 이처럼 옥천은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며 충청도의 중심 지역으로 발전해왔음을 알 수 있다.
1.1.3. 옥천 문화유산 답사
1.1.3.1. 대원군의 가르침 척화비
척화비는 1866년 고종 3년의 병인양요와 1871년 고종 8년의 신미양요를 치른 뒤 흥선대원군이 국민들에게 양인을 배척하고 경고하기 위하여 1871년 4월에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요충지에 세운 많은 비석 중 하나이다. 척화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라는 큰 글자로 음각되어 있으며, 옆에는 "우리들의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라는 작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척화비는 1882년 고종 19년에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고 우리나라가 서양의 각국과 교역이 되면서 모두 철거되었는데, 이 척화비는 산기슭에 있기 때문에 철거당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6·25 전쟁 때 사람으로 오인받아 항공기의 기관총 사격을 받아 파란 많은 한국의 역사를 대변해주고 있다. 그 후 1976년 주변을 정화하고 진입로 계단, 철책 등을 보수하여 면모가 일신되었다.
척화비를 통해 흥선대원군이 서양 문물을 배척하고 국가를 지키고자 했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외세의 침략과 개방정책에 맞서 전통문화를 지키고자 했던 그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귀감이 되고 있다. 이처럼 척화비는 우리나라 역사의 한 페이지를 보여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1.1.3.2. 백제 성왕의 얼이 깃든 관산성
백제 성왕의 얼이 깃든 관산성은 백제와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옥천의 군서면 월전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백제 성왕이 신라와 가야의 연합군에 대항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전사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성왕은 545년 백제 26대 왕으로 즉위했다. 즉위 2년 후에 양나라 고조로부터 왕에 책봉되었고, 백제의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여 남부여라 불렀다. 554년 신라 진흥왕에 의해 한강 유역을 빼앗겼으나, 왜에 원군을 요청하여 신라를 공격하고자 했다. 하지만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전사하면서 백제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관산성은 백제와 신라, 가야 간의 격전지였다. 옥천군 월전리에 위치한 이 성은 현재 높이 약 30m의 낭떠러지가 있는 곡간에 있는데, 동남쪽 산정에는 관산성이, 서북쪽 약 800m 지점에는 성왕의 아들 여창이 쌓은 환산성이 있다고 한다. 이처럼 관산성과 환산성은 백제군과 신라·가야군 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성왕은 신라와 가야의 연합군에 맞서 용감히 전투를 펼쳤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