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카투사란 무엇인가
1.1. 카투사의 정의
카투사(KATUSA: Korean Augmentation To the United States Army)란 "주한 미 8군의 각 부대에서 미군들과 함께 생활하며 임무를 수행하는 한국육군 소속의 요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소속은 대한민국 육군이면서 동시에 미군 부대에서 복무하는 사병을 의미하는 것이다. 카투사는 육군종합행정학교에서 실시하는 공개모집을 통해 전산 선발되며, 이들은 한·미 양국군의 신병교육기관인 육군훈련소와 KTA(KATUSA Training Academy)에서 각각 소정의 기본교육을 받은 후, 미 8군 예하의 각 캠프로 배치된다.
1.2. 카투사 제도의 성립 배경
카투사 제도의 성립 배경은 다음과 같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심각한 병력 부족 현상이 카투사 제도 성립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북한군의 공격에 맞서 싸우기 위해 미군이 요구한 병력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군의 병력이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했기 때문이다. 1950년에 미군 육군 병력은 총 591,000명 수준에 불과했고 이 중 전투사단은 10개 사단에 불과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미군의 사상자가 늘어나 신병 보충이 시급해졌지만, 이를 충족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군을 미군부대에 배속시키는 것이 임시방편으로 고려되었다.
당시 한국군도 병력과 장비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이 전쟁에서 더 큰 역할을 하기를 희망했다. 한국군에 대한 미군 측의 불신이 컸지만, 결과적으로 미군 측은 한국군을 미군부대에 배속시키는 방안에 동의했다. 이로써 1950년 8월 15일 카투사 제도가 실시되었고, 곧바로 1만 8천 명의 카투사가 미군부대에 배치되었다. 인천 상륙작전에서부터 많은 전투에 참여한 카투사들은 미군 부족을 일정 부분 보충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요약하면, 한국전쟁 발발 이후 병력 부족에 시달리던 미군이 한국군을 배속시키는 방안을 실행에 옮기면서 카투사 제도가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전쟁 수행을 위해 카투사 제도가 도입되었다."
1.3. 한국전쟁 당시 카투사의 활동
한국전쟁 당시 카투사의 활동은 다음과 같다.
카투사들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가하게 된 것은 1950년 9월 15일경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면서부터였다. 당시 카투사의 수는 18,0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많은 수의 카투사가 전쟁에 투입되었다. 카투사들은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미 해병 5연대와 미 7사단, 그리고 이를 지원하는 부대에 배치되었다. 이들은 소총수, 운반 및 보급병, 검문소 위병, 통신병, 탄약 운반병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전쟁 초기 카투사들은 강제로 징집된 데다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배치되었기 때문에, 영어 구사 능력이 낮고 위생관념이 부족하는 등의 문제점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미군은 일선부대에 대한 전술 지도를 충분히 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우리나라의 지리와 북한군의 특성을 잘 아는 카투사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카투사들은 피난민을 다루고 정보를 얻어내며 전투 중 적군과 아군을 식별하는 데 뛰어났고, 험준한 산지의 지형에서 위장을 하고 진지를 구축하는 데에도 능하였다. 따라서 카투사들은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한 많은 전투에서 크고 작은 공헌을 하였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미군사고문단은 수준 높은 훈련과 많은 전투 경험을 쌓은 카투사들을 한국군으로 원복시켜 그들이 훌륭한 교관과 지휘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카투사들은 베테랑이 되었고 한국인 특유의 용기와 기질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기간 중 총 43,660명의 카투사가 미군과 함께 싸웠으며, 11,365명이 사상 및 실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전사한 카투사들의 유해 645구가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고, 3,619주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또한 부산 유엔군 묘지에는 1950년 9월 낙동강 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유해 36구가 안장되어 있다.
2. 카투사 조직의 존속 요인
2.1. 한미 안보 지원기의 카투사 제도(1950-1986)
2.1.1. 한국전쟁 기간(1950-1953)
한국전쟁 기간(1950-1953)의 카투사 제도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성립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군은 심각한 병력 부족 현상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군의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의 역할 확대를 주장하였으나, 미군 지휘관들은 한국군에 대한 불신감을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한 미국대사였던 무쵸는 한국군의 미군 배속을 제안하였고, 이에 맥아더 장군이 동의하면서 카투사 제도가 성립되었다.
당시 카투사들은 대부분 강제 징집된 인력이었기 때문에 영어 구사 능력이 부족하고 훈련이 미흡한 상태였다. 하지만 카투사들은 한국군의 지리와 북한군의 특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카투사들은 인천상륙작전, 낙동강 전투, 원산상륙작전 등 주요 전투에 참여하여 활약하였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미군사고문단은 임무수행 능력이 뛰어난 카투사들을 한국군으로 복귀시켜 교관과 지휘자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한국전쟁 당시의 카투사 제도는 미군의 병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임시방편적인 조치였다. 카투사 제도의 성립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무쵸 대사, 맥아더 장군 등의 역할이 중요하였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카투사 제도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성립되었다.
2.1.2. 미 무상원조 수혜기(1953-1971)
미국의 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