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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이라크는 4대문명의 발상지인 '강사이의 땅'(Land of two Rivers)이라는 의미의 메소포타미아 평야를 끼고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국토의 중심을 흐르고 있다. 이라크의 수도는 바그다드이며, 면적은 44만 2,000km2 로 한반도의 약 2배에 달하는 국토 면적을 가지고 있다. 또한 바그다드(Baghdad)는 '신에 의해 세워졌다'는 페르시아어의 어원을 갖고 있으며, 아랍인들은 '평화의 도시'라 부르고 있다. 이라크는 동쪽으로 이란, 서쪽에는 시리아, 요르단, 남쪽은 사우디와 중립지대, 쿠웨이트, 그리고 북쪽지역은 터키와 인접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위치한 이라크는 북부지역은 고대 앗시리아제국이, 남부는 바빌로니아제국이 위치했던 곳으로 이미 기원전 4000년 전부터 인류의 문화가 꽃을 피웠던 지역이다. 이렇듯, 인류의 4대 문명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이라크가 근대국가로 출발한 것은 불과 71년 전이다. 문명의 여명기인 수메르 문명까지 5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장중한 역사는 영광과 오욕으로 뒤범벅이 돼 있으며, 근대에도 잦은 정변과 전쟁을 겪으며 거친 격랑에 휩쓸려왔다.
이러한 이라크의 오랜 역사와 지정학적 가치로 인해 이 지역은 과거부터 다양한 세력들의 각축장이 되어 왔다. 특히 중동 전체가 서구 강대국들의 개입과 종파 간 갈등으로 오랜 세월 불안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라크 역시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끊임없는 내전과 전쟁을 겪어왔으며, 그 결과 현대 이라크의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친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2. 이라크의 고대역사
2.1. 고대문명과 이슬람의 출현
기원전 4000년 무렵,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을 낀 비옥한 땅에서 메소포타미아('두 강 사이의 땅'이라는 뜻)를 중심으로 한 이라크 일대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지역이었다. 수메르인들은 지구라트(옛 바빌로니아의 피라미드 형태의 신전)를 세우고 쐐기 모양의 설형문자를 고안했으며 12진법과 태음력을 썼다. 바빌로니아는 고도의 도시문명을 이루며 기원전 1750년쯤 가장 오래된 성문법으로 꼽히는 함무라비 법전을 선보였다. 또한 앗시리아는 이집트까지 아우르는 드넓은 제국을 건설했다. 신바빌로니아는 높이 90m로 알려진 '바벨탑'이라는 지구라트 건설을 시도하고 느부갓네살 2세는 바빌론에 공중정원을 짓기도 했다. 이들 고대국가는 기원전 538년 이란 지역에서 태동하여, 고대 오리엔트를 지배한 페르시아제국에 멸망당했다. 그 200년 뒤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당해 세계사의 중심무대에서 사라졌다.
이러한 메소포타미아지역은 기원전 2000년-500년에 이르는 동안 바빌로니아제국이 번성하였고, 그 후 페르시아, 몽고, 오스만제국 등의 통치를 받아 오다가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오스만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아 오다가 1932년 입헌군주국으로 독립하였다. 이후 주변 국가와 서방국가와의 갈등 속에서 후세인의 독재와 1990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과의 제 1차 걸프전, 그리고 제 2차 걸프전을 겪으면서 후세인 정권 축출에는 성공했으나,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많은 내부적, 외부적 갈등을 겪고 있다.
이슬람교의 출현과 함께 이 지역에 전개된 역사를 살펴보면, 메카와의 세 번에 걸친 전쟁 끝에 무슬림군은 630년에 이곳을 무혈점령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슬람 점령 지역은 이라크와 시리아로 향하게 되었다. 642년의 네하완드 전투에서 아랍군은 계속 승리하여 이라크를 평정하게 되었다. 이슬람 신앙의 기치 아래 단결된 아랍족에 대 정복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는 칼리프 자리를 놓고 갈등이 일어났다. 두 번째 칼리프인 오마르가 페르시아 출신의 노예에게 피살된 후, 오스만('Othm n, 644~656)이 칼리프로 추대되었다. 오스만의 중앙 정부의 이익을 대표하는 총독의 세력 강화는 결국 중앙 집권적 권력 형태를 초래하였다. 이 세력에는 메카와 케디나의 오아시스 부족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때문에 정복의 제일선에서 싸운 베두윈 부족 출신의 전사들은 불만이 많았다. 결국 정복지 거주 전사들의 불만이 오스만의 살해로 치닫게 되었다. 그 뒤를 이어 예언자의 사촌이며 사위인 알리("Ali, 656~661)가 칼리프에 선임되었으나, 복수를 외치는 오스만 지지 세력과의 충돌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결국 이슬람 공동체는 동쪽은 알리, 서쪽은 무아위야의 지지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이러한 분단 상태 중에 알리가 암살당하여 제국은 661년 무아위야 아래 다시 통일되었다. 그러나 750년 우마이야가의 아랍 왕국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압바시야가의 아불 아바스가 사파가 칼리프가 되었고 이는 새로운 압바시야조의 세상을 열었다.
2.2. 이슬람 정복시대에서 1차 세계대전까지
메카와의 세 번에 걸친 전쟁 끝에 무슬림군은 630년에 이곳을 무혈점령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슬람 점령 지역은 이라크와 시리아로 향하게 되었다. 물론, 이 두 지역은 각각 당시 중근동의 대강국이었던 페르시아의 사산 제국과 비잔틴 제국의 영역이었다. 642년의 네하완드 전투에서 아랍군은 계속 승리하여 이라크를 평정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이라크 지역에서 전통을 이어 온 페르시아 제국은 멸망하게 되었다.
이슬람 신앙의 기치 아래 단결된 아랍족에 대 정복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는 칼리프 자리를 놓고 갈등이 일어났다. 두 번째 칼리프인 오마르가 페르시아 출신의 노예에게 피살된 후, 오스만('Othm n, 644~656)이 칼리프로 추대되었다. 오스만의 중앙 정부의 이익을 대표하는 총독의 세력 강화는 결국 중앙 집권적 권력 형태를 초래하였다. 이 세력에는 메카와 케디나의 오아시스 부족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때문에 정복의 제일선에서 싸운 베두윈 부족 출신의 전사들은 불만이 많았다. 결국 정복지 거주 전사들의 불만이 오스만의 살해로 치닫게 되었다. 그 뒤를 이어 예언자의 사촌이며 사위인 알리("Ali, 656~661)가 칼리프에 선임되었으나, 복수를 외치는 오스만 지지 세력과의 충돌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결국 이슬람 공동체는 동쪽은 알리, 서쪽은 무아위야의 지지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이러한 분단 상태 중에 알리가 암살당하여 제국은 661년 무아위야 아래 다시 통일되었다. 그러나 750년 우마이야가의 아랍 왕국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압바시야가의 아불 아바스가 사파가 칼리프가 되었고 이는 새로운 압바시야조의 세상을 열었다. 이슬람 공동체의 우두머리가 우마이야조에서 압바시야조로 바뀌어진 것은 단순히 왕조의 변화가 아니고 제국의 구심점이 시리아로부터 이라크로 옮겨진 것이다. 바그다드는 중근동에 세워진 다인종국가의 전통적인 중심지였다.
이후 1258년 2월에 몽고군에 의해 바그다드는 함락되고 이와 함께, 5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압바시야조(750~1258)는 망하고 말았다. 이어서 이라크 지역을 통치하게 된 것은 터키계의 오스만 제국으로, 제 1차 세계 대전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의 속주가 되었다. 19세기 들어 유럽인(주로 영국인)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 탐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1910년대부터 영국은 특히 페르시아만 일대 유전의 안보문제에 집착했다. 1914년 바그다드로 진격, 3년 만에 이라크를 점령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주의 열강들의 아귀다툼 속에서 이라크는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됐다. 영국군은 이라크에 진입하면서 독립을 약속했지만 약속을 이행할 의사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가혹한 조세정책과 토종산업 말살 등 영국의 폭정이 극심해지면서 독립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던 이라크인들은 1920년 대대적 폭동(아랍민족 무장운동)을 일으켰다. 이에 대한 영국의 대응은 가혹했다. 몇 달 만에 1만명 이상을 학살한 영국은 저항이 계속되자 이라크에 대량 폭격을 가했다. 결국 1932년에 이뤄진 이라크의 공식 독립은 30년간 사실상 영국의 위성국가로 남아있었다.
3. 영국 위임통치와 이라크 하쉼왕조
3.1. 영국의 위임통치 상황
영국의 위임통치하에서 이라크는 다양한 인종과 종교 집단으로 구성된 복합 사회였다. 이라크는 인구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시아파 무슬림과 소수인 순니파 무슬림, 그리고 약 6분의 1에 달하는 쿠르드족 등 다양한 민족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라크의 복합적인 구성은 영국의 위임통치 하에서 정치적 혼란과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영국은 1차 세계대전 중 오스만 제국의 붕괴 이후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위임통치하게 되었다. 당시 이라크는 오스만 제국의 한 지방에 불과했지만, 영국은 이 지역을 통치하면서 새로운 국가 경계를 그리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은 이라크 내부의 다양한 민족과 종교 집단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통치 정책을 세웠다.
영국은 이라크 통치를 위해 순니파 출신의 파이잘을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이는 시아파와 쿠르드족 등 다른 민족 집단에게 불만을 야기했다. 특히 다수를 차지하던 시아파들은 자신들의 권리가 무시되고 있다고 여겼다. 이에 더해 영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이라크 내 소수 민족인 유대인과 앗시리아인에게 우대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이처럼 영국은 이라크 통치에 있어 다양한 민족과 종교 집단 간의 갈등을 고려하지 않고 자국의 필요에 따라 일방적으로 정책을 수립했다. 그 결과 이라크 내부에서는 끊임없는 반영 및 독립 운동이 일어났고, 다양한 민족 간 갈등이 격화되었다. 영국의 위임통치는 이라크의 분열과 불안정을 야기했으며, 이후 이라크 역사에서 지속적인 정치적 혼란의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3.2. 이라크 하쉼왕조 등장
이라크 하쉼왕조 등장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위임통치 하에 이루어졌다. 영국은 1916년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통해 아랍 지역의 국경을 획정하였는데, 이는 당시 아랍민족 지도자 후세인의 독립 약속과는 배치되는 내용이었다.
영국은 1899년 쿠웨이트를 보호령으로 선포하고 사바 가문을 왕가로 만들었다. 1920년 후세인의 아들 파이잘이 영국 위임통치하 이라크의 국왕으로 추대되면서 하쉼왕조가 건립되었다. 당시 쿠웨이트는 오스만 제국의 바스라 주에 속해 있었지만, 영국의 식민지배 아래 독립을 얻게 되었다.
영국은 이후 이라크를 보호하며 자국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는 정권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파이잘은 1932년 이라크가 완전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