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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취미와 예술 D형
1.1. 독립영화의 이해
독립영화는 영화 장르적 개념으로서도 설명될 수 있겠지만 독립영화의 여러 특성상 영화장르의 분류기준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의미는 영화 탄생이 서구에서 시작된 이유로 서구 영화사의 맥락에서 살펴봐야 될 것이다.
오늘날 독립영화라는 이름은 1960년대 후반 미국의 카운터컬처와 함께 일어난 영화운동 뉴 아메리칸 시네마에서 비롯되었으며, 1920년대 독일의 표현주의 영화와 프랑스의 아방가르드 영화 등과 같이 영화의 예술성을 추구하고자 한 유럽 영화 예술 혁명에 대한 계승이었다. 1920년대 암울한 독일 시대를 반영했던 표현주의 영화는 과감하고 실험적이었으며, 유럽의 영화감독들은 이러한 영화적 특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양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영화 스튜디오는 줄줄이 폐업해야만 했고, 영화인들은 작은 8mm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 나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촬영했다. 대중성과 상업성만 추구하던 영화 산업이 드디어 '작가주의' 계열로 들어온 것이다. 이후, 유럽의 영화감독들은 꾸준한 작품 활동을 통해 각 영화 사조들을 등장시킨다. 1940년대 이탈리아에서는 '네오 리얼리즘', 1950년대에는 영국의 '프리 시네마운동', 프랑스의 '누벨바그 운동', 1960년대에는 미국의 '뉴 아메리칸 시네마'와 프랑스의 '시네마 베리떼' 등 모든 영화들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다.
미국의 뉴 아메리칸 시네마 감독들은 자신들에게 행해지는 영화 검열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개인의 표현에 대한 자유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기존의 할리우드에서 벗어나는 반(反) 할리우드 영화 운동을 전개해나갔다. 이들은 이후 할리우드 메이저, 독립영화 시스템을 절충하여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나갔다.
우리나라의 독립영화는 남미 저항영화와 제3세계 영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는 국내 독립영화와 미국의 '뉴 아메리칸 시네마'와는 차이가 있고, 오히려 국내 독립영화는 제3세계 민중영화와 그 흐름을 같이 했다고 영화사적으로 고찰해볼 수 있다.
1.2. 이창동 감독의 영화 분석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독립영화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상업영화와는 달리 전통적인 멜로드라마의 구조와 전개를 과감히 거부하고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면서도, 깊이 있는 메시지와 인물을 담아내고 있다.
이창동 감독은 상업영화의 관습에서 벗어나 작품을 통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예술성과 인문학적 가치를 추구하고자 한다. 그의 작품 는 장애인 여성과 전과자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이들을 단순한 소재로 활용하지 않고 사회적 편견과 차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보여준다. 상업영화에서는 주로 소외되어 왔던 장애인과 범죄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들의 내면세계와 삶의 고민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가지고 있던 편견과 선입견을 반성하게 된다.
또한 은 전개와 구조에 있어서도 상업영화의 관습에서 벗어나있다. 상업영화에서는 대개 남녀 주인공이 초반에 조우하고 상호작용하며 갈등과 해결의 과정을 보여주지만, 는 두 주인공의 첫 만남이 영화 시작 20분 만에 이루어지지 않고 35분이 지나서야 이루어진다. 이처럼 느린 템포와 여유로운 전개는 관객들의 기대를 저버리지만, 대신 인물의 내면을 깊이 있게 탐구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한다.
이창동 감독은 와 같은 작품을 통해 영화 예술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가치, 즉 현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역할을 강조한다. 그의 작품들은 관객들에게 단순한 오락거리가 아니라 깊이 있는 사유를 요구하며, 이를 통해 현실과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이는 독립영화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이창동 감독의 작품들은 상업영화 시스템에서 소외되었던 목소리를 강력하게 드러내며 영화예술의 본질을 추구하고자 한다고 볼 수 있다.
2. 다큐멘터리 영화사
2.1. 1930년대 - 다큐멘터리 운동
1930년대 다큐멘터리 운동은 영국의 영화감독 존 그리어슨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리어슨은 1924년 사회과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서 경제 대공황을 겪고 있는 미국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가 허물어지게 되었고, 사회문제를 다루는 영화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어떠한 깨달음을 주려 했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리어슨은 청어산업에 관한 영화 『모니토르』를 만들었다. 이 작품은 그리어슨이 감독·제작한 최초의 작품으로 1929년 말에 '런던 영화협회'에서 처음 공개되었고 큰 인기를 모았다. 점점 영화는 사회문제를 주제로 다루게 됨에 따라 이런 사적인 단체는 금지된 좌익 계통이나 소련 영화를 자주 상영하는 장소로 변모해 갔고, 경제 대공황이 일어나자 그 경향은 더욱 짙어졌다.
『모니터』는 침체되고 썩어 있던 당시의 영국 영화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으며, 장기간 흥행에 성공하였다. 1930년대에 시작된 영국의 다큐멘터리 운동은 그리어슨을 중심으로 한 젊은 영화인들에 의해 전개되면서 엘튼의 『북극으로』(1932), 레그의 『빅 시티』(1935), 와트의 『철강도시』(1938) 등 많은 영화가 제작되었고, 영국 내는 물론 외국까지 널리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리어슨의 다큐멘터리 운동은 '다큐멘터리'라는 용어가 지니고 있던 선입견을 뒤바꾸어 놓았다. 당시까지 다큐멘터리의 대명사로 간주되던 플라허티의 작품들은 외딴 곳의 인물들을 인간적인 친밀감을 가지고 부각시킨 장편의 영화들이었다. 반면 그리어슨의 다큐멘터리는 비개인적인 사회문제를 주제로 다룬 단편 영화로서 어떤 입장인지를 분명히 내세우는 형태였다.
또한 그리어슨은 영화에서 플리허티가 꺼리던 해설을 사용하였고, 결국 플라허티식 영화는 사라져 갔고 그리어슨식의 영화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다큐멘터리가 정치적인 경향을 띠게 된 것은 그리어슨의 활동에 힘입은 까닭만은 아니며, 세계적인 현상으로 시대의 산물이었다.
한편 독일에서의 다큐멘터리는 영국에서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1920년대 베르토프가 혁명적 다큐멘터리를 만든 반면, 1930년대 독일의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은 히틀러 나치즘 체제를 옹호하는 선전 다큐멘터리 『의지의 승리』(1934)를 만든다.
2.2. 1940년대 - 전쟁과 다큐멘터리
1940년대의 다큐멘터리 영화는 전쟁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영화들은 군사 행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었으며, 그 영화들은 전쟁 도구로서 군용 나팔의 역할을 했다. 이 시기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는 아군에게는 사기를 진작시켜주는 반면, 적군에게는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독일군은 전면 충돌 장면을 잘 기록할 수 있도록 공격을 미루고 카메라맨을 돌격 부대보다도 앞에 배치하였으며, 최초로 낙하산 부대를 이용했던 노르웨이 공략 때에는 300명의 독일인 카메라맨을 동원했다. 이렇게 촬영된 전투 장면의 필름들은 라는 시리즈의 뉴스 영화로 활용되었다. 이 영화들은 관객들에게 압도적이고 박력 있는 장면들을 보여주면서 독일의 승리에 특별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내레이션과 음악을 동원했다. 따라서 관객은 영화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영국도 독일과 마찬가지로 군용 나팔격의 영화를 제작하는 데 많은 신경을 썼는데, 그리어슨 덕분에 영국에는 이미 전쟁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는 여건이 준비되어 있었다. 험프리 제닝스가 만든 (1939)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는 세계를 차분하게 묘사하고 전쟁의 와중에도 인간답게 행동하는 남녀의 모습들을 보여줌으로써 위기에 처해 있는 영국인의 심정을 감동적으로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