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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터닝포인트와 교회사
1.1.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독립된 자아를 찾다
주후 60년에 로마의 강압 통치에 대한 유대인들의 분노는 마침내 폭발했다. 로마는 자주 성전 보물창고를 약탈하여 미납된 세금을 충당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점점 빚의 수렁으로 빠져들어갔다. 유대인의 봉기가 시작되자 로마는 수동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유대인들 가운데 급진파의 목소리가 우세해졌고, 세금 납부 거부 운동이 시작되면서 전면전으로 발전하게 된다.
베스파시안, 티투스, 하드리안과 다른 로마의 장군에 의해 진행된 이스라엘과의 전쟁은 의도치 않게 유대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교회를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기독교는 이 과정을 통해서 전 세계로 보급되는 보편종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대교라는 '이미 주어진 틀'이 사라지게 되었을 때, 기독교는 무엇으로 그 자리를 채워야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떠안게 되었다.
유대교로부터 기독교가 분리되는 과정을 통해 교회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수단들은 결국 신조, 정경, 감독제도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 의해 기록된 4복음서와 사도 바울의 10~13개의 편지가 회람되고 있었다. 또한 교회 내의 직제가 편성되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간단하고 간편한 주장이 정립되었다. 이로써 유대교로부터 기독교가 독립된 자아를 찾아가게 된 것이다.
1.2. 국가의 비호 아래 역사적인 교리를 만들다
325년 5월 20일 기독교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날 230명의 감독들이 비두니아(Bithynia)의 주요 도시였던 니케아에 모여들었다. 이 공의회는 감독들에 의해서 제안된 것이 아니라 로마 황제인 콘스탄틴에 의해 소집되었다.
이 공의회 이전에 있었던 심각한 교리적인 논쟁들은 북아프리카 연안에 위치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장로 아리우스(Arius)와 관련이 있었다. 이 현안문제들은 최소한 150년 이상 논쟁이 진행도니 사안들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말씀', '하나님의 로고스'인 예수의 지위가 무엇인가에 대한 점이었다.
아리우스는 성부와 성자의 구별에 대해 강조했던 오리겐에 반대해서 성부의 초월성과 우선성을 강조했다. 아리우스가 견해를 밝힌 318년부터 니케아 공의회가 열리기 전까지 로마제국의 정치적 전개가 급박하게 돌아갔다.
디오클레티안은 중동의 브리틴 섬까지 뻗어있는 제국의 행정제도를 위해 영토를 4개로 구분했다. 콘스탄틴은 황제가 되기 위해 다른 세 명의 경쟁자들과 투쟁해야했다. 콘스탄틴은 312년 로마의 북쪽 밀바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패퇴시키면서 황제로 급부상한다. 이 싸움이 있기 전 콘스탄틴은 환상을 보았는데, 이 사건이 교회의 행로를 변화시켰다.
황제로 안정기에 들어서자 콘스탄틴은 교회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단합하여 그 잠재력을 이용하고자 했다. 이런 그의 의도를 위해서는 분쟁 가운데 있는 교회의 교리문제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니케아에서 공의회가 열린 것은 종교적인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치적인 필요에서였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된 정경이나 주요 지침들은 교회의 권력 행사를 위한 관계들을 세우게 된다. 아리우스는 예수가 성부를 나보다 더 크신 분(요 14:28)이라고 언급한 부분, 예수가 성장되어 갔다고 언급한 부분(눅 2:52), 인간의 궁핍을 겪었다고 언급된 부분, 예수를 처음 난자(롬 8:29) 등의 구절들을 찾아냈다. 그는 만물을 창조주의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려고 했다.
예수가 특별한 역할을 수행하기는 했으나 한 하나님이 유일하게 신성을 갖는다면 예수는 하나님이 될 수는 없다. 여기에 대해 반아리우스파는 예수는 하나님의 본체(빌 2:6)이시며, 하나님의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히 1:3), 하나님의 영광을 공유하며(고전 2:8), 항상 불변하는 분(히 13:8)이라는 성경 구절들을 인용한다.
양편의 적대자들은 경전에 정통했다. 아리우스에 대항했던 진영에는 아타나시우스가 있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 감독이었으나, 이 과정에서 반대파의 공격을 받아 다섯 번이나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은 사실 형이상학적이고, 신학적 주장에 근거를 두었다기보다는 삶의 경험에 기초한 것이었다.
결국 니케아 신조는 교회의 승인을 즉시 얻지는 못했다. 'homoousios'(동일본질) 같은 단어들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그러나 결국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에서 381년 소집된 공의회에서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하면서 오늘날 니케아 신경으로 알려진 형태의 신조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 신조는 거의 1,700년 동안 교회의 신학, 예배, 기도를 위한 확고한 기초로 자리 잡게 된다.
니케아 신조가 자리 잡기까지 아리우스주의자들과 공교회주의자들의 충돌은 정치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아리우스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성부- 성자의 차등적 관계를 군주-태수 혹은 군주-교회의 관계로 보길 원하는 황제들이 있었다. 그러나 공교회주의자들은 성부와 성자가 동등한 권위를 지닌 것처럼 성자의 왕국인 교회도 성부의 왕국인 제국에 종속되지 않으며 동등하게 존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성자의 동질성을 주장하는 것으로부터 국가로부터 독립한 교회, 교회로부터 독립한 국가의 양쪽 필요를 채우며 정립되어 갔다. 통치자들이 공공연하게 삶의 모든 부분에서 중심이 교회임을 인정하게 되자, 교회는 이생에서도 실질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니케아 공의회는 이중적인 유산을 남겼다.
1.3. 기독론, 말씀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기틀이 마련되다
451년 5월 23일 동로마 황제 마르시안은 감독들의 전 교회적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 공의회가 논쟁을 종식시키고 더 분명하고 영원히 지속될 진정한 신앙을 세울 것으로 기대했다. 이 회의에는 약 520명을 감독들이 참석했는데 네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로마제국 동부에서 왔다.
공의회는 열다섯 차례 회의 끝에 하나의 신조를 구성하는데 성공했다. 이 공의회를 통해 '두 본성'과 '위격'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었다. 칼케돈공의회는 교회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며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정통 기독론을 설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명백성에 도달하는 방법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교회의 혹독한 투쟁환경과 교회 자체의 문화적 차이라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신학적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아폴리나리우스는 아리우스주의를 정복하려고 분투하면서 예수의 신성을 철저하게 옹호했다. 이 과정에서 예수를 신적인 영과 인간 몸의 결합으로 묘사하면서 하나의 본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 대해 시리아 연안의 안디옥 관구에서 반대의견이 제출된다. 데오도르는 아폴리나리우스에 반대하여 '두 본성'을 주장한다. 이 논박은 5세기 전반에 커다란 논쟁을 일으켰다.
데오도르의 입장을 고수하던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가 인간 예수를 낳았으며, 예수의 인성이 하나님의 로고스와 연합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 배후에는 당시 가톨릭 안에서 점증하고 있던 마리아 숭배와 연관이 있었다. 네스토리우스의 의도는 바로 이런 점에 있었지만 알렉산드리아의 시릴은 즉각적으로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이 '정신 분열증적인 예수'를 제시하고 있다고 보았고, 굉장한 반격을 가했다.
이러한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의 세밀한 기독논쟁에 로마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따라서 로마의 결정은 이 신학적인 논쟁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이런 논쟁은 동방과 서방의 기질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서방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며 법률적인 반면, 동방의 사고구조는 추상적이고 정열적이며 사색적인 경향이 있었다.
이런 논쟁 가운데 서방의 사상을 도입해서 기독론의 문제를 푼 인물이 바로 로마의 레오 1세이다. 레오 1세는 기독론 논쟁 뿐 아니라 로마의 교황이 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