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고려 거란 대외 관계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고려의 대외관계와 고려-거란 전쟁
1.1. 10세기 동북아시아 정세
1.1.1. 거란의 등장과 발해 정벌
1.1.2. 고려와 거란의 외교관계 시작
1.2. 고려-거란 전쟁의 전개
1.2.1. 1차전쟁과 서희의 외교담판
1.2.2. 2차전쟁과 고려의 승리
1.2.3. 3차전쟁과 귀주대첩
1.3. 전쟁 종결 이후 동북아시아 정세 변화
1.4. 참고문헌
2. 한국사의 이해
2.1.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생활상 비교
2.2. 삼국 사회의 신분제와 농민 생활
2.3. 신라 하대의 정치·사회·사상 변동
2.4. 10~12세기의 다원적 국제질서와 고려의 '외왕내제'
2.5. 고려 후기 역사 서술과 역사 인식
3. 고려전기 다원적 국제관계에 대한 소식의 반고려 텍스트 분석
3.1. 소식의 반고려 텍스트 내용 분석
3.2. 소식의 고려관과 전반적 대외관
3.3. 고려와의 접점과 해상 교류
3.4. 고려와 거란의 관계
3.5. 서적의 중요성과 고려의 대외정책
4.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고려의 대외관계와 고려-거란 전쟁
1.1. 10세기 동북아시아 정세
1.1.1. 거란의 등장과 발해 정벌
북 중국에서는 거란의 추장 야율아보기가 916년에 만주 일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거란을 세웠다. 거란 태조는 서방 경략을 일단락 지은 후 발해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발해는 요주를 공격하여 자사를 살해하고 주민을 빼앗아감으로써 거란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이에 거란 태조는 서방 경략에 나선 군대를 회군시킨 925년 12월에 발해 정벌의 조서를 내렸다. 거란군은 발해의 부여성을 함락, 수도 홀한성을 포위하자 발해가 항복하여 926년에 멸망하였다. 이후 거란 태종은 후당의 토벌을 천명하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종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후당의 군대를 격파하고 석경당을 후진의 황제로 추대하였다. 석경당은 그 대가로 지금의 하북성과 산서성 일대인 연운 16주를 거란에 할양하였다. 이로써 거란은 중원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였고 후진에 우월한 입장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1.1.2. 고려와 거란의 외교관계 시작
고려와 거란의 외교관계 시작은 922년 2월 거란이 먼저 사신을 고려에 보내면서부터이다. 당시 초기 고려와 거란의 외교관계는 우호적이었으며 일정 주기의 사신 교환이 이루어졌다.
발해가 멸망한 후에도 거란은 계속해서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거란이 발해와 화목하게 지내겠다는 굳은 약속을 어기고 발해를 멸망시켰으니 신뢰할 수 없다"는 항의를 표시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와 거란의 외교관계는 단절되었다.
이후 고려는 송과의 사대외교를 펼치면서 중국과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당시 송과 거란은 서로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가 거란과의 외교를 단절하고 송과 친선 관계를 유지한 것은 외교적 현명함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2. 고려-거란 전쟁의 전개
1.2.1. 1차전쟁과 서희의 외교담판
993년 10월 경, 거란과 고려가 최초로 충돌하였다. 귀주에 인접한 봉산군은 귀주에서 정주에 이르는 교통로와 귀주에서 태주·박주에 이르는 교통로를 동시에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봉산성 밖에 당도한 거란군은 요지에 병력을 배치한 후 사자를 파견하여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선봉군사 윤서안과 고려 군민들은 결사항전을 결의하고 거란군의 항복권유를 거부하는 의사를 전달하였다. 이후 고려군은 선전 분투하였으나 병력과 장비의 열세로 지휘관인 윤서안이 적에게 포로가 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소식을 중군을 지휘하고 있던 서희에게 전해졌고, 서희는 휘하 군대를 이끌고 봉산군 10리 전방까지 전진하게 하였다. 봉산군에 도착한 서희는 그곳에서 소손녕에게 고려 침략 명분을 전해 들었다. "거란이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는데, 이제 너희 나라가 거란의 경계를 침범했으므로 이를 토벌하러 온 것이다. 거란이 온 천하를 통일했는데 아직까지 항복해 오지 않는 나라는 기필코 소탕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조속히 항복하라."
이러한 소손녕의 항복 요구에 대해 서희는 거란군이 전투보다는 강화를 원하고 있다고 간파하고 성종에게 알렸다. 성종은 서희의 말을 따라 강화사 이몽전을 거란 진영으로 보냈다. 그러나 이몽전이 거란군 진영에 도착하기 전에 거란군은 군대가 당도했으니 항복하라는 내용의 글을 보냈다.
소손녕은 이몽전에게 "너희 나라가 백성을 구휼하지 않으므로 하늘을 대신해 벌을 내리는 것이다. 만약 강화를 구하려거든 빨리 와서 항복해야만 한다."고 하였다. 소손녕은 항복에 대한 답변이 지연되자 다시 군사 행동을 개시하여 안융진을 공격하였다.
안융진은 귀주 일대에서 태주와 박주를 경유하지 않고 단 한번의 도하로 청천강 남안으로 진입할 수 있는 지역으로, 안북부를 측면에서 위협할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곳이다. 고려는 청천강 방어선 구축의 일환으로 개활지와 도하 지역을 통제할 수 있도록 안융진에 성을 구축해 놓았다. 그러나 거란군이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하자 고려군이 이를 격퇴함으로써 고려는 청천강 선을 지킬 수 있었다.
이후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론과 할지론으로 나뉘었다. 항복론은 소손녕의 항복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었고, 할지론은 항복 대신에 서경 이북의 땅을 내주자는 것이었다. 성종이 할지론을 택하여 서경의 창고를 방출하고 남는 것은 강물에 던져 거란의 식량이 되지 않도록 하였다.
이에 거란 장수 소손녕은 무력으로 고려와 강화교섭을 타결 지을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소손녕은 자신의 부당한 주장을 철회하고 고려의 영토에서 군사를 철수할 것과 거란 황제 성종의 추인을 받는 대로 강동 6주에 대한 고려의 영유권을 인정한다는 조건으로 강화교섭을 결말 지었다.
1.2.2. 2차전쟁과 고려의 승리
고려는 사대 관계에서 새 국왕의 즉위는 반드시 통보하여 허락을 받아야 했는데, 강조가 목종을 폐위, 시해하고 현종을 옹립하는 정변을 일으켰다. 이것이 거란 침입의 구실이 되었다.
거란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고려에 침입하였으나, 흥화진을 방어하던 도순검사 양규, 진사 정성, 부사 이수화가 성을 굳게 지켜냈다. 거란군은 수차례에 걸쳐 공격했으나 성을 함락하는 데에 실패하였다. 흥화진을 탈환하지 못하고 우회해야 했던 거란군은 배후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총 병력의 절반인 20만 명을 잔류 시켜 원정 병력을 분산시켰다. 이에 반해 고려군은 흥화진을 고수함으로써 제성들이 방비를 강화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통주전투는 삼수채전투와 통주성전투로 구분된다. 당시 통주에는 행영도통사 강조가 군사 30만명을 거느리고 거란에 대비하고 있었다. 강조 휘하의 고려군은 통주성을 나와 청강의 3개 지류가 합쳐지는 삼수채 지역에서 거란군을 만나 초반에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강조가 전장에서 장기를 두는 등 지휘를 소홀히 하자 거란군이 삼수채를 기습 공격하여 강조를 생포하고 3만여 명을 죽였다. 하지만 중랑장 최질과 홍숙, 방어사 이원귀 등이 통주성을 굳게 지켜 결국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거란군은 통주성을 우회하여 곽주성을 공략하였다. 곽주에서는...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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