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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야 문화의 특징
1.1. 가야의 역사
가야는 서기 300년 무렵에 변한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한 여러 세력집단으로, 가야, 가라, 가락, 임나 등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가야의 영역은 일정하지는 않으나 대체로 동으로는 황산강(낙동강 하류), 서남으로는 남해안, 서북으로는 지리산, 동북으로는 가야산의 남쪽을 경계로 하였다. "가야"라는 이름은 변한 때에 김해지역을 가리키던 구야국에서 유래하여 이 지역의 모든 세력을 일컫는 의미로 확대되었다.
가야는 때에 따라 5가야, 6가야, 7가야국, 포상(浦上)8국, 임나(任那)10국 등의 형태로 모였으나 하나의 통일된 집권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562년에 대가야(大加耶)를 마지막으로 모두 신라에 병합되고 말았다. 가야의 역사는 대체로 기원전후, 3~4세기, 5~6세기를 기점으로 크게 달라지고 있다.
기원전,후의 변한시기에는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각 지역에서 새로운 정치체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삼국지"에서는 "00국"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소국에는 정치적인 지배자로서 세력의 크기에 따라 신지(臣智), 험측(險側), 읍차(邑借)등으로 달리 부르고 있었다. 변한의 후반기인 3세기경에는 소국들이 모이는 정치체인 포상8국이나 진한(秦韓)8국 등으로 발전한다. 이들을 기반으로 4세기를 전후하여 가야의 여러 나라들이 성립하여 발전하게 된다.
이들은 낙동강 하구의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금관가야, 낙동강 서안의 고령을 중심으로 하는 대가야, 낙동강 서안의 함안을 중심으로 하는 아라가야, 남해안의 고성을 중심으로 하는 소가야 등으로 나누어진다. 그외에도 낙동강의 서안에는 작은 규모의 집단들이 나누어져 있었다. 이러한 가야의 여러 나라에서는 정치지배자를 "한기(旱岐)"라고 불렀다. 이 말은 높은 사람을 가리키는 칸(KHAN)이라는 뜻으로, 신라에서는 "간지(干支)"라고 불렀다.
이들은 6세기경에 한기, 차한기(次旱岐), 하한기(下旱岐) 등으로 분화의 과정을 걷기도 한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가야지역을 묶는 정치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시기와 성격에 따라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가야는 4세기에 김해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가야는 5-6세기에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이 2개 가야에서의 정치지배자는 "왕(王)"이라고 불리었는데, 소국의 한기들을 통합하는 존재였다.
이러한 가야의 여러나라 중에서 금관가야는 532년에 구형왕이 스스로 신라에 투항하였고, 대가야도 562년에 주변 강대국이었던 신라와 백제의 전쟁 속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낙동강을 장악한 신라에 의해 멸망되었다.
1.2. 가야 토기의 발전과정
가야 토기는 4세기를 기준으로 1~3세기의 전기단계와 4~6세기의 후기단계로 나누어 변천하고 있다. 전기는 웅천조개무지의 토기가 중심이 되어 웅천기라고도 하며, 적갈색의 연질토기가 많이 만들어진 것이 특색이다. 이것이 4세기대에 이르면 종래의 연질 또는 와질계 토기가 쇠퇴하여 회갈색의 경질토기로 대체되며, 굽다리접시각종 항아리류 등 여러 기종의 토기가 만들어진다. 일반적으로 가야토기라 하면 바로 4세기 이후에 새로운 제도술에 의해 1,000 ℃ 이상의 온도에서 구워낸 단단한 질의 도질토기를 말한다.
이 당시 김해 부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타지역과 다른 독특한 토기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즉 지역권이나 시간성을 가장 잘 반영하는 굽다리접시 등의 경우, 소위 부산 김해식의 토기와 이들 지역을 제외한 다른 영남지역의 토기가 서로 다른 양식을 보이고 있었다. 이처럼 4세기대에 있어서 영남지역의 토기는 2대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항아리[壺]나 그릇받침[器臺] 등은 와질토기로도 계속 만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4세기 말~5세기 초가 되면 종래 가야식 토기와 신라양식 토기로 부르던 토기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이후 이들 토기는 당시의 정세변화에 따라 크게 낙동강을 경계로 그 동쪽 지역은 신라양식의 토기(낙동강 동안양식)가, 서쪽 지역은 가야양식의 토기(낙동강 서안양식)가 널리 사용된다.
1.3. 가야토기와 신라토기의 차이점
가야토기와 신라토기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가야토기는 대체로 회청색의 경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