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인간과사회 대중매체 효과 분석"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서론
1.1. 궁궐의 의미와 역할
1.2. 시기별 궁궐 의례공간의 변화
2. 안학궁과 당나라 궁궐제도
2.1. 안학궁 귀면와와 치미의 특징
2.2. 안학궁 조경기법과 당나라의 영향
3. 고려시대 별궁
3.1. 남경 별궁
3.2. 수창궁
3.3. 연경궁
4. 조선시대 왕의 침전
4.1. 행궁의 공간구성과 특징
4.2. 침전 공간의 연장과 발전
5. 경복궁 건축
5.1. 교태전의 건축적 특징
5.2. 경복궁 4대 궁성문
6. 왕녀의 신분과 지위
6.1. 공주, 옹주, 군주, 현주의 차이
6.2. 의빈의 품계와 신분 차이
7. 경운궁(덕수궁)의 변화
7.1. 경운궁의 정문 '대한문'
7.2. 대한제국 선포와 경운궁의 공간
7.3. 서양식 근대 건축물 - 양이재
7.4. 중명전과 을사조약 체결
8.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서론
1.1. 궁궐의 의미와 역할
궁궐은 국왕이 주체가 되어 의례를 시행하는 대표적인 행례 공간이다. 궁궐을 가리켜 "나라의 정사를 듣고 존엄을 보이는 곳"이라고 정의하는 까닭은 궁궐 공간이 단순히 생활과 정무의 편의만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 아니라, 존엄을 드러내기 위한 의례 시행 공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궁궐은 유교적 국가의례가 시행되는 중심공간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궁궐 내외부의 의례공간은 시기에 따라 변화를 거듭해왔는데, 숙종대 이후 특히 주목할 만한 변화가 나타났다. 첫째, 대명의리의 상징공간인 대보단이 설치되었다. 둘째, 선왕의 어진에 제사를 지내는 선원전이 새로운 제향공간으로 등장했다. 셋째, 현왕의 어진을 봉안한 전각이 등장했다. 이처럼 궁궐은 단순한 생활과 정무의 공간을 넘어, 국왕의 존엄성을 드러내기 위한 의례 시행의 중심이자, 왕조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1.2. 시기별 궁궐 의례공간의 변화
시기별 궁궐 의례공간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
숙종대 이후 궁궐 의례공간에는 주목할 만한 변화가 나타났다. 첫째, 궁궐 내 명 황제를 제향하기 위한 길례 공간인 대보단이 설치되었다. 성리학적 의식이 강화되면서 대명의리의 상징공간으로 설치된 대보단은 조선의 국왕이 천자인 명나라 황제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기존의 천자국-제후국이라는 유교질서에 균열을 가하는 공간이었다.
둘째, 선왕의 어진에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선원전이 건립되었다. 숙종대 이전의 선원전은 선왕의 어진을 봉안하는 공간이었을 뿐 제향공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숙종이 자신의 어진에 제향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면서 선원전은 궁궐 내 새로운 제향공간이 되었다. 영정의 제사는 신주에 영혼이 깃든다는 정통 유교식 관념에 부합하지 않았지만, 국왕은 이를 통해 자신의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셋째, 현왕의 어진을 봉안한 전각이 등장했다. 숙종대 강화부에 장녕전이 건립된 후 영조와 정조는 자신의 어진을 봉안하게 하였다. 이는 성리학적 의례에 부합하는 공간이 아니었으며, 현왕의 위상을 높이고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처럼 숙종대 이후 궁궐 내에서는 성리학적 의례공간 외에도 국왕의 권위와 위상을 드러내기 위한 새로운 공간들이 만들어졌다. 이는 유교적 국가의례 시행이라는 궁궐의 본래 기능과 함께 국왕의 정치적 권력과 상징적 정통성을 드러내는 공간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2. 안학궁과 당나라 궁궐제도
2.1. 안학궁 귀면와와 치미의 특징
안학궁 귀면와와 치미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안학궁 귀면와 5종은 사래 부재 끝에 고정하였으며, 그 중 4종은 인면의 요소가 두드러지며 볼 부분을 둥근 양감의 반구형 문양으로 표현하였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귀면와는 고구려와 통일신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우나, 고려시대 유적들에서 이러한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나머지 1종은 통일신라 유적에서 주로 확인되는 "용면와" 형상과 유사하나, 정교함이 다소 떨어져 통일신라 말기 또는 고려 초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안학궁 귀면와는 고려 초기의 특징을 보이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안학궁에서 출토된 치미는 2종으로, 종대에 시문된 연주문과 몸통의 비늘 문양이 주요 특징이다. 연주문은 주로 통일신라와 발해 치미에서 확인되며, 고려시대까지 이어지는 문양이다. 비늘 문양 또한 일부 통일신라 출토품과 고려 유적에서 발견되는 특징으로, 고려 시대 치미가 어룡형의 치문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 양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안학궁 치미 역시 남북국 시대의 영향이 남아있는 고려 초기의 산물로 판단된다.
2.2. 안학궁 조경기법과 당나라의 영향
직선 위주의 방형 원지가 주류를 이루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신라 통일 이후 곡선 디자인 개념이 나타나는 것은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를 받아들였다는 것으로는 설명이 어렵다. 현재로서는 중국 당나라의 영향으로 볼 수밖에 없을 듯하다. 당나라 장안성의 대명궁 태액지, 낙양성의 상양궁 원지·구주지를 보면 월지와 유사한 점이 확인된다. 자연형 곡선 호안과 신선도를 상징하는 인공섬, 정원석, 가산 등과 함께 호안을 따라 수 경관 감상용으로 건립된 회랑식 건물들은 월지에서 보여지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즉, 당나라의 영향과 함께 고구려, 백제의 기법이 더해진 문화융합의 결과물이 통일신라 조경기법에서 나타난 것이다.
3. 고려시대 별궁
3.1. 남경 별궁
남경 별궁은 원래 백제의 영토로 수도 위례성(慰禮城)의 근처였고 한산성(漢山城) 혹은 북한성(北漢城)이라 불렸으며, 비류왕의 동생인 우복이 이 지역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사가 있다. 근초고...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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