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향촌과 주택"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조선시대 생활문화
1.1. 조선 후기 오일장과 보부상
1.1.1. 조선 후기 오일장의 출현과정
1.1.2. 보부상 조직과 특징
1.2. 사대부의 주택과 향촌의 민가
1.2.1. 사대부 주택의 구조와 특성
1.2.2. 향촌 민가의 형태와 생활 방식
1.3. 조선시대 과거제도와 학교교육
1.3.1. 과거제도: 문과, 무과, 잡과
1.3.2. 학교교육: 성균관, 향교, 서원
2.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조선시대 생활문화
1.1. 조선 후기 오일장과 보부상
1.1.1. 조선 후기 오일장의 출현과정
조선 후기 오일장의 출현과정은 다음과 같다.
조선 왕조는 농업을 국가의 기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상업을 이익을 추구하는 천박한 행위로 여기고 이를 말업(末業)으로 낮게 평가하였다. 하지만 각 지역에서 생산되는 물품이 다를 수밖에 없었고, 특히 소금과 같은 생존에 필수적인 물품의 거래는 불가피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재분배를 통해 국가가 물자의 유통을 직접 통제하고 감독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 임진왜란 이전까지 상업은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생산력이 증대하고 각 지역의 특화가 이루어지면서 국가 주도의 재분배는 한계에 다다르게 되었다. 대동법의 도입은 결국 상업을 통해 물자를 유통하는 방향으로의 정책 전환을 의미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난전(亂廛)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해안가나 강가의 포구에서는 멀리까지 상품을 유통하는 도매상업이 발달하였으며, 이러한 상품들은 농촌의 장시(場市)를 통해 널리 퍼져 나갔다.
기록에 따르면, 장시는 처음에 '장문'이라는 이름으로 전라도 지방에서 시작되었으며, 기근을 극복하기 위해 서로 물품을 교환하던 형태로 한 달에 한두 번 열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주기는 점점 짧아졌고,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대부분의 장시는 5일에 한 번씩 열리게 되었다. '오일장'이라는 명칭도 이러한 배경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장시가 5일에 한 번씩 열리는 것은 아니었다. 5일에 두 번 열리는 장시는 '스무 장'이라 불렸고, 성문 안팎에서 번갈아 5일마다 열리는 '안팎장'도 존재했다. 또한, 포구와 같이 특정 상품이 대규모로 들어올 때만 비정기적으로 열리는 포구장도 있었다.
장시가 농촌으로 확장되면서 농민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이 시도되었다. 그중 하나가 '난장(亂場)'이라 불리는 행사였다. 장시를 처음 열 때 홍보를 위해 개최하거나, 농번기가 끝난 후 일꾼들을 대상으로 며칠간 열리기도 했다. 특히 여름철 두레패의 논매기가 끝나는 시기인 칠석이나 백중에 열리는 난장은 '백중장' 또는 '백중난장'으로 불리며, 경기도 이남 지역에서 주로 행해졌다. 때로는 농촌에서 인기 있던 민속놀이를 장터로 끌어들여 크게 행사를 열기도 했다. 현재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기지시줄다리기도 원래는 '줄 난장'으로 불렸던 장터의 민속놀이였다.
이러한 과정을 ...
참고 자료
송찬섭 외(2020), 전통사회와 생활문화,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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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구, 2015, 조선후기 양반신분이동에 관한 탐구.
정석종, 2012, 조선후기 사회신분의 붕괴, 성대대동문화연구원
최영희, 2011, 조선후기에 있어서의 사회변동, 신분제도, 사학연구.
송찬섭 외(2020), 전통사회와 생활문화,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