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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성황후에 대한 이해
1.1. 명성황후의 성장과 집권 배경
명성황후는 1851년(철종 2) 경기도 여주에서 영의정에 추증된 여흥 민씨(閔氏) 치록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8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살았으나 어려서부터 총명한 모습을 보여 주변에 알려졌다. 16세에 흥선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고종 비(妃)에 간택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궁인 이씨로부터 완화군을 얻고 비를 돌보지 않았으나, 명성황후는 예의범절이 밝아 칭송을 받았다. 완화군이 태어나자 대원군은 이를 기뻐하였고 명성황후는 이에 분개하여 불만을 가지게 되었으며, 대원군과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후에 원자가 태어났으나 5일 만에 요절하자 그 원인을 가지고 대원군과 더욱 대립하게 되었다. 명성황후는 대원군의 반대파인 민승호, 대원군의 형 이최응, 그 아들 재면, 조대비의 조카 조성하, 대원군의 반대 세력인 김병국, 조두순, 이유원 등을 규합하여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다. 마침 1873년 일본에서 대두된 정한론(征韓論)으로 내외정세가 불안해지고, 경복궁 중건으로 민생고가 가중되는 등의 이유로 대원군에 대한 민심이 나빠지자 이를 이용하여 유림의 거두 최익현을 동부승지로 발탁하고, 대원군의 실정과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여 결국 10년간의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1.2. 명성황후의 집권과 대외정책
명성황후는 대원군 실각 후 민씨 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약)을 맺었다. 그녀는 개화사상가인 박규수를 우의정에 등용하고, 개화를 위해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다. 아울러 삼군부를 폐지하고,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일본과 청에 파견하여 신식무기·공업 등을 학습하도록 하는 개화정책을 시행하였다.
특히 1881년 김윤식이 영선사로 청에 갈 때 밀명을 내려 청에 한미수교를 주선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개화승 이동인을 일본에 보내어 주일청국공사 하여장에게 대미수교의 주선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명성황후는 대원군 실각 이후 친청사대로 기울었는데, 이는 개화파의 급진적인 움직임에 제약을 가하기 위함이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의 집에 피신하여 고종과 비밀리에 연락하는 한편, 청에 군대를 요청하여 임오군란 후 집권했던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하게 한 뒤 정국을 다시 장악했다. 이때부터 그녀를 비롯한 민씨 척족은 친청사대로 기울었다.
1884년 김옥균·박영효 등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자, 다시 청의 도움으로 이들을 제거하였다. 1885년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한 영국이 거문도사건을 일으키자, 묄렌도르프를 통해 영국과 교섭하는 한편 러시아와도 접촉하였다. 이에 청과 일본은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대원군의 환국을 주선하여 민씨척족 세력과 정권다툼을 벌이도록 유도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그 여세를 몰아 조선 정계에 압력을 가해오자 명성황후는 친러시아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대해 일본은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와 그 척족세력을 제거할 목적으로 미우라 고로 등에 의해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1.3. 명성황후의 죽음
명성황후의 죽음은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알려진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1895년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일본의 조선 병합에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던 명성황후와 그의 척족세력을 제거할 목적으로 김홍집 내각의 일부 세력과 대원군 세력, 그리고 해산하기로 예정된 훈련대와 일본 정치낭인들을 동원하여 황궁을 습격하고 명성황후를 학살하게 하였다.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옥호루에서 살해된 뒤 황궁 밖의 송림에서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녀는 곧이어 친일정권에 의해 폐비되었으나 곧 복위되었고, 국체가 대한제국으로 바뀐 뒤 명성황후로 추책되었다. 그녀의 죽음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위한 음모였으며, 명성황후를 제거함으로써 일본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명성황후의 죽음은 조선의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