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한국의 대"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한국전쟁과 한국군의 역할
1.1. 한국전쟁의 배경과 전개과정
1.2.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의 전력 및 활약
1.3. 한국전쟁 이후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
2. 한국사의 주요 전환점
2.1. 1862년 농민봉기의 의의
2.2. 광무개혁의 내용과 한계
2.3. 일제 통치 방식의 변화
2.4. 모스크바 3상회의와 국내 정치 세력의 대응
3. 백범 김구 선생과 그의 역할
4. 대테러리즘에 대한 한국 정부와 군의 대응
4.1. 정부의 대테러리즘 법적 근거와 수행체계
4.2. 군의 대테러리즘 수행체계
4.3. 향후 발전 방향
5.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한국전쟁과 한국군의 역할
1.1. 한국전쟁의 배경과 전개과정
한국전쟁의 배경과 전개과정은 다음과 같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당시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상황은 영국, 프랑스, 네델란드 등의 제국주의 승전국들이 기존의 식민지를 되찾으려는 움직임을 보여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이로 인한 무력 충돌이 냉전 주변부에서 발발하고 있었다. 열강들이 동아시아에서 관심을 보이는 나라는 일본과 중국이었으며, 한반도는 부차적으로 밀려 있었다. 1950년 애치슨선언을 보면 유사시 방어해야할 미국의 관심지역에 한반도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을 치른 대표적인 분쟁지역이었다. 강대국이 서로의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여 결국 한국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그러나 전쟁으로는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전쟁 당사자인 한반도는 물론이며 미국과 소련의 부담이 커졌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소련과 중공군의 지원을 받은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시작된다. 남침은 스탈린의 재가와 지원 아래 이루어졌다. 이후 북한은 중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군사적 우세로 파죽지세로 남쪽으로 침범해 내려온다. 남한에서는 미국의 지원으로 이에 대응하게 된다.
한국전쟁은 크게 4단계를 거쳐 전개되었다. 첫째, 북한군 남침기(1950년 6월 25일~9월 15일)로 82일간 북한군이 38선을 돌파하여 낙동강까지 이르렀던 시기이다. 둘째, 유엔의 북진 반격기(1950년 9월 15일~11월 25일)로 역시 82일간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과 낙동강 전선에서의 총반격작전을 단행하였다. 셋째, 중공군의 침공 및 유엔군 재반격기(1950년 11월 25일~1951년 6월 23일)로 210일 동안 38선을 두고 엎치락뒤치락하던 시기였다. 넷째, 휴전협상과 교착전기(1951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로 휴전회담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로 끝이 났다.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2.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의 전력 및 활약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의 전력 및 활약은 다음과 같다.
북한은 소련의 체계적 지원을 받으면서 현대적 전쟁을 치를 수 있는 군사력을 갖추었다. 1948년 10월 소련군이 철수할 때 즈음부터 북한군은 장비와 무기를 갖춘 보병에 소련제 전차와 자주포 기갑부대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전쟁 당시 북한군은 제일선에 13만 5천 명의 병력을 후방에 10만 명의 예비 병력을 배치할 수 있었다. 또한 1949년 3월 18일 중국과 맺은 상호방위조약으로 실전 경험을 갖춘 중국 공산군 소속 조선출신 병사 2만 5천 명이 북한 인민군에 편입된 것도 큰 전력이었다. 이들은 122밀리미터 포와 76밀리미터 포 각각 150대의 전차와 항공기 등 강력한 중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반면, 남한 측의 국군은 1947년 8월 정부수립과 함께 미군정 산하에서 창설되었지만, 실전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무기와 장비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국군 무기체계의 특징은 지상군 무기의 대부분이 개인화기 내지 휴대용 화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북한의 주력전차 T-34형을 파괴할 수 있는 대전차 화기가 거의 없었다. 이는 미국이 남한 측에 원조를 제공하면서도 국군에게는 경비대 수준의 무기와 장비만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기의 열세를 메운 것은 학도의용군, 여군, 소년지원병, 노무부대 등 민간인의 참전이었다. 특히 학도의용군은 교복을 입고 자발적으로 참전한 학생의용군으로, 전쟁 당시 총 30만 명이 참가해 그중 5만여 명이 전투에 참가하고 20여만 명이 후방선무활동을 하다 7천여 명이 장렬히 전사하였다. 여군들도 간호장교로 활동하며 전투에 참여하였고, 14세에서 17세 사이의 소년지원병 2,464명 중 82%가 전사할 정도로 열악한 조건에서도 최전선에 투입되어 고귀한 희생을 치렀다. 노무자들은 전선부대에 탄약과 연료, 군자재, 식량, 식수 등을 운반하고 진지공사와 부상자 후송 등을 담당하여 큰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북한군의 압도적인 전력에 비해 초기 남한 군대의 열세를 민간인...
참고 자료
남정옥, 6·25 전쟁 이것만은 알아야 한다, 삼우사, 2010
역사문제연구소, 한국전쟁에 대한 11가지 시선, 역사비평사, 2010
이희진, 『한국전쟁사』, 살림, 2014.
박태균, 『한국전쟁』, 책과함께, 2005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 요약, 1986
한국사의이해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