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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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6•10 만세운동"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6·10 만세 운동 개요
1.1. 6·10 만세 운동의 개념
1.2. 6·10 만세 운동의 시대적 배경
1.3. 6·10 만세 운동의 준비 과정
1.3.1. 투쟁지도부의 결성과 시위투쟁 방침
1.3.2. 공산주의자들의 전선통일 시도와 반제민족통일전선 모색
1.3.3. 지방조직망 구축과 학생조직화 사업
1.4. 6·10 만세 운동의 전개
1.5. 6·10 만세 운동의 영향
1.6. 6·10 만세 운동의 한계와 역사적 의의
1.7. 주요 인물 소개
1.7.1. 권오설
1.7.2. 김단야

2.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6·10 만세 운동 개요
1.1. 6·10 만세 운동의 개념

6·10 만세 운동의 개념은 1926년 6월 10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李拓)의 국장일을 기하여 일어난 독립운동이다. 이는 병인만세사건(丙寅萬歲事件)이라고도 불린다.

순종이 사망하자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조선 민중들의 반일감정이 급격히 고양되었다. 1920년대 중반 들어 조선인들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 통치와 경제적 수탈에 맞서 광범위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순종의 국장일을 계기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등 사회주의 계열의 조직들이 주도하여 전국적 규모의 반일시위운동을 계획한 것이 6·10 만세 운동의 핵심 개념이다.

이 운동은 1919년 3·1운동 이후 새로운 사회계급적 변화 속에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특히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등 사회주의 계열의 조직들이 주도하여 준비하고 실천하려 했던 6·10 만세 운동은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의 결합을 통해 독립운동의 질적 성장을 이루고자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1.2. 6·10 만세 운동의 시대적 배경

6·10 만세 운동의 시대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일본제국주의는 1925년 5월 악명 높은 치안유지법을 제정하고 실시하여 식민지 통치를 한층 강화해 나갔다. 이와 함께 1920년대 들어 국내에 급속히 침투한 일본 독점 자본을 기반으로 경제적 수탈도 더욱 강화하였다. 그 결과 조선의 노동자와 농민을 비롯한 조선 민중의 민족적 계급적 처지가 날로 악화되어 갔으며, 민족 부르주아지의 몰락 과정도 급격히 촉진되었다.

그러나 6·10 만세시위투쟁 전야에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반대하는 조선 민중들의 반일진출은 더욱 적극화되었다. 생존의 권리조차 박탈당해온 조선 민중들은 사회경제적 처지를 개선해야 한다는 요구를 가지고 전국 각지에서 광범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 중반에 있었던 대표적인 투쟁으로는 1925년 경성전기회사 전차종업원들의 파업, 평양 인쇄직공과 양말공장 노동자들의 총파업, 1926년 목포제유공장 노동자들의 파업, 경성방직공장 노동자들의 파업 등을 들 수 있다. 학생들 또한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를 요구하며 전국 각지에서 동맹휴교를 벌였다. 전남 무안의 암태도 소작농민들도 고율의 소작료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반적인 상황 속에서 조선의 마지막 국왕 순종이 사망하자 조선 민중들은 급속히 반일감정을 표출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구왕조에 대한 애착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의 가혹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원한과 울분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상인들의 철시투쟁, 학생들의 동맹휴교 등으로 이러한 반일감정이 표출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일제는 경계를 더욱 강화하였다.

즉, 6·10 만세 운동이 전개된 배경에는 1920년대 일본제국주의의 가혹한 식민지 통치와 경제 수탈, 이에 저항하는 조선 민중들의 투쟁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3. 6·10 만세 운동의 준비 과정
1.3.1. 투쟁지도부의 결성과 시위투쟁 방침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중앙위원 권오설의 제의로 5월 2일 회의를 열고 순종의 장례일을 기하여 혁명적 대시위투쟁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즉시 '6.10 운동투쟁지도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총책임자로는 당 중앙 집행위원회 선전부 위원이면서 동시에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인 권오설이 임명되었다. 그는 고려공산청년회 간부들을 중심으로 투쟁지도부를 구성했다. 이때 지도부 성원으로는 권오설과 함께 고려공산청년회 비서부의 박민영과 선전부의 이지탁 등 3인이 선정되었다. 박민영은 조선공산당 중앙기구 혁명후원회 위원이며, 이지탁은 조선공산당 경성부 간부 산하 제 1구 제2세포 조직원이었다.

한편 지도부 구성을 전후하여 6.10 투쟁 총책임자인 권오설은 조선공산당 상해 해외부 간부인 김찬, 김단야와 6.10 투쟁계획과 방법, 운동자금, 격문인쇄 문제 등을 상의하기 위해 여러 번 서신을 주고 받았다. 이 과정에서 상해에서 격문을 일부 인쇄하고 운동자금을 보내주기로 약속이 이루어졌으며, 6.10 만세투쟁 준비과정에서 상해 해외부는 일정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투쟁지도부가 구성된 다음, 조선공산당 및 투쟁지도부는...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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