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망자의 날과 우리나라 제사풍습의 비교"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중국인의 민간풍속
1.1. 중국인의 혼인
1.1.1. 고대의 결혼 풍속
1.1.2. 중국사회의 전통적 혼인풍습
1.1.3. 현대의 결혼 풍습
1.2. 중국인의 장례
1.2.1. 중국의 전통장례
1.2.2. 현대의 장례
1.2.3. 제례
1.3. 중국인의 명절
1.3.1. 원단 (元旦)
1.3.2. 춘절 (春節)
1.3.3. 원소절 (元宵節)
1.3.4. 청명절 (淸明節)
1.3.5. 단오절 (端午節)
1.3.6. 칠석 (七夕)
1.3.7. 중추절 (仲秋節)
1.3.8. 중양절 (重陽節)
1.4. 중국의 국경일
1.4.1. 국제 기념일
1.4.2. 국경일
2. 기후와 문화
2.1. 우리나라
2.1.1. 우리나라 기후와 장례
2.1.2. 우리나라 기후와 혼례
2.2. 열대기후
2.2.1. 베트남 기후 특징
2.2.2. 베트남 혼례와 장례
2.3. 건조기후
2.3.1. 베드윈족과 사하라사막 지역
2.3.2. 베드윈족의 혼례와 장례
2.4. 고산기후
2.4.1. 티베트 고산 지역의 장례
2.5. 냉대기후
2.5.1. 코략족의 혼례와 장례
3.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중국인의 민간풍속
1.1. 중국인의 혼인
1.1.1. 고대의 결혼 풍속
고대의 결혼 풍속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형매혼(兄妹婚)이 있었는데, 이는 남매간의 결혼을 말하는 것으로 중국의 신화(神話)와 복희(伏羲)와 여와(女媧) 남매의 신화를 통해 이러한 형태의 결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혈연혼이 존재했다는 것을 반영한다.
둘째, 대우혼(對偶婚)이 있었는데, 이 또한 형매혼과 유사하게 중국 신화에 나오는 黃帝의 결혼 이야기가 그 예이다. 대우혼은 일부 일처제로 향하는 과도기적 단계로 볼 수 있다. 여성은 성년이 되면 다른 씨족의 배우자가 될 수 있었으며 교접할 수도 있었다.
셋째, 전방제(轉房制)가 있었다. 이는 지아비가 죽으면 아내는 죽은 자의 형제나 당형제 등 그 피붙이에게 시집가는 형식이다.
넷째, 영첩제(迎妾制)가 있었는데, 이는 한 여자가 출가할 때 같은 성을 가진 여자 동생과 노비가 함께 시집가는 형태이다. 영첩은 정부인과 첩의 중간의 위치에 해당한다.
다섯째, 겁탈혼이 있었는데, 이는 남자가 무력으로 여자를 겁탈하여 강제로 결혼하는 것을 말한다.
여섯째, 매매혼이 있었는데, 이는 겁탈혼 이후 나타난 결혼 형태로 남자 쪽에서 많은 양의 재물을 지불하고 여자쪽의 부녀자를 취하는 교역 방식을 특징으로 한다.
마지막으로, 중매혼이 있었는데, 이는 매매혼 이후에 나타난 형태로 중매자가 있어 혼례 절차를 이행하여 남녀의 결혼을 성사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대 중국에는 다양한 결혼 풍속이 존재했으며, 이는 중국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점차 변화해 왔다고 볼 수 있다.
1.1.2. 중국사회의 전통적 혼인풍습
중국사회의 전통적 혼인풍습은 다음과 같다.
봉건사회에서 중국의 혼인은 부모의 독단에 의해 엄격하게 육예(六禮)에 따라 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분 차별이 엄격하여 두 집안이 비슷한 환경을 강조하였다. 다시 말해 지위가 높은 집안은 지위가 높은 집안을 찾아야 하고 지위가 낮은 집안은 지위가 낮은 집안을 찾아야 하며, 부유한 집안은 부유한 집안을 찾아야 하고, 가난한 집안은 가난한 집안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두 집안이 서로 맞지 않아 어울리지 못한다. 이로 인하여 많은 청춘남녀들이 비록 진실하게 서로 사랑할지라도 가정환경의 차이로 가장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좋은 인연을 맺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생의 비극을 낳게 되어 봉건 혼인제도의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이외에도 과거 불평등한 사회구조 속에서는 남녀간의 지위 역시 불평등하였고 특히 여성의 지위가 매우 낮아 겁탈혼, 매매혼, 납첩, 강제결혼 등의 현상이 존재하였다. 권세와 지위가 있고 재산이 많은 남자는 마음대로 일반 여성을 차지할 수 있었으며, 여러명의 아내를 둘 수 있어 첩이 많았다. 봉건 제왕은 더욱이 3궁(三宮), 육원(六院), 72빈비(七十二嬪妃)를 소유하였다. 그렇지만 여자는 어떠했는가? 자유롭게 남편을 선택할 권리도 없었고 재혼할 권리도 없었다. 일단 남편이 죽거나 남편에게 버림받으면 반드시 죽을 때까지 과부로 수절해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갈 수 없었다.
이처럼 봉건사회 중국에서 혼인은 매우 엄격한 신분제도와 남녀차별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여성의 권리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결국 부모와 사회의 이익에 의해 이루어진 혼인은 청춘남녀의 자유와 행복을 크게 제한하였다고 볼 수 있다.
1.1.3. 현대의 결혼 풍습
현대의 결혼 풍습은 신 중국 성립 이후, 1950년 4월 13일 인민정부가 혼인법을 공포하면서 큰 변화를 겪었다. 이 혼인법을 통해 독단적이고 강제적이며 남존여비하고 자녀의 이익을 경시하는 봉건주의 혼인제도가 폐기되고, 남녀 혼인자유, 일부일처제, 남녀 권리평등의 부녀와 자녀의 합법적인 이익을 보호하는 신민주주의 혼인제도가 실행되었다. 1980년 9월에는 새로운 혼인법이 공포되어 원래의 규정을 강화하고 수정·보완하였으며 결혼 연령은 남자 20세, 여자 18세에서 남자 22세, 여자 20세로 개정되었다. 그러나 인구 억제 정책의 일환으로 만혼(晩婚)이 장려되어 실제로는 남녀의 결혼 연령이 합쳐서 50세 이상이 되어야 결혼이 허가되는 등 엄격한 제한이 가해지고 있다. 결혼 형식은 법률혼이며 전통 사회의 의례(儀禮)혼과는 달리 법률 수속을 이행하면 된다. 또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재산 관리, 이혼 시 양육권 문제, 가사 분담 등의 세부 사항을 계약서로 작성하는 '계약 결혼'이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결혼은 개인주의적이고 물질적인 면모가 두드러져 이혼율 증가 등의 부작용을 낳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결혼관이 지극히 서구화되어 가는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전통 혼례식 문화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신랑과 신부가 한복을 입고 전통 의식을 거행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1.2. 중국인의 장례
1.2.1. 중국의 전통장례
중국의 전통장례는 유교문화와 불교, 도교 등의 영향 아래 발전해왔으며, 죽음을 단순한 생의 종말이 아닌 또 다른 삶의 시작으로 여기는 관념이 담겨있다. 죽은 사람의 시신을 처리하는 방법은 크게 토장(土葬), 화장(火葬), 수장(水葬), 천장(天葬), 향료보존장(香料保存葬) 등으로 나뉜다. 이는 중국 내 다양한 민족이 공존하면서 지역과 민족에 따라 상이한 장례 방식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중국의 장례 절차는 주대(周代)에 형성되었으며, 이후 불교, 도교 등의 영향으로 보다 종합적인 형식으로 변천되었다. 일반적으로 죽은 이의 신분, 혼인 여부, 자손 유무 등에 따라 상례의 정도가 결정되는데, 대체로 명을 다하고 자손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 성대한 장례를 치르는 것이 전통이다.
중국인들은 "초상을 치르는 것은 산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라며, 장례를 통해 신분 높고 결혼했으며 자손이 많은 것이 좋다는 교육적 효과를 얻고자 했다. 따라서 전통적인 중국의 장례 절차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도두(倒頭)와 소렴(小殮)이다. 임종 직전 문짝을 떼어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돌아가신 분을 누인 뒤 전복인(全福人)을 불러 몸을 깨끗이 닦고 수의를 갈아입힌다. 시신의 입 안에는 진주, 돈, 찻잎 등을 넣어 저승길을 잘 갈 수 있도록 한다.
둘째, 보상(報喪)과 적상(吊喪)이다. 죽음을 주변에 알리고 친지들이 와서 조문하며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다. 조문객들은 남자는 관 옆에서, 여자는 문 밖에서 곡을 하며 애도한다.
셋째, 대렴(大殮)이다. 시체를 관에 넣는 의식으로, 장자나 장손자가 머리 부분을 들고 나머지 자손들이 팔과 다리 부분을 들어 천천히 관 속으로 옮긴다. 관 속에는 망자가 평소 좋아하던 물건을 넣는다.
넷째, 송장(送葬)이다. 망자의 가족과 친지들이 관을 따라 묘지로 가서 안장하는 의식이다. 안장은 3일에서 49일 사이에 이루어지며, 경제 형편과 신분에 따라 절차와 규모가 달랐다.
이와 같이 중국 전통의 장례 풍속은 유교문화와 불교, 도교 등의 다양한 종교·사상적 영향 아래 발전해왔으며, 죽음에 대한 중국인의 독특한 관념을 잘 보여주고 있다.
1.2.2. 현대의 장례
중국정부는 1956년 화장을 법으로 정하고 시신을 관에 넣어 매장하는 토장 제도를 금지시키면서 중국의 장례 문화는 큰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이후 40년이 지난 현재 중국은 전국 어디에서나 봉분을 한 무덤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북경시를 비롯한 많은 도시에서는 시신을 화장한 뒤 그 유골을 바다에 뿌리는 운동이 한창이다.
북경시의 경우 1994년부터 빈장관리처와 빈장협회가 공동으로 이 운동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6차례에 걸쳐 모두 246명의 유골을 바다에 뿌린 실적을 보이고 있다. 북경시 당국자에 따르면 이 운동은 지식인과 간부들이 많이 참여하는 등 각계에서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어 머지않아 정착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한다. 실제로 1979년 사망한 주은래 전 국무원 총리와 1989년 사망한 호요방 공산당 총서기도 유언에 따라 화장되었으며, 그 유골이 각각 전국과 강서성 개척지에 뿌려졌다고 한다.
이처럼 중국 정부는 화장을 적극 권장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전국적으로 화장장이 늘어나고 있다. 북경시의 경우 팔보산빈장관이라는 화장장이 대표적인데, 여기서는 연간 2만여 명의 시신을 화장 처리할 수 있다. 팔보산빈장관에서 화장된 유골은 모두 노산골회당으로 옮겨져 안치되며, 안치 기간은 3년이다. 그 후에는 각자 가족이 유골을 회수해 집에서 모시거나 공묘에 평장할 수 있다.
한편 화장을 거부하고 전통적인 토장을 고집하는 소수민족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 회족을 들 수 있는데, 심양시 동부 외곽에 위치한 '단우구릉'이라는 회족 전용 공동묘지가 있다. 이곳의 묘지는 회족의 전통 풍습에 따라 봉분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정부 관리자에 따르면 최근 회족 사회에서도 반드시 시신을 관에 넣어 토장해야 한다는...
참고 자료
"중국 중국인 그리고 중국문화", 공상철외 지음, 다락원, 2001.6 출간
"한권으로 잃는 중국문화", 서성 지음, 넥서스CHINESS, 2005.3 출간
"중국의 어제와 오늘", 왕순홍 지음, 정차근 옮김, 평민사, 1998.6 출간
김정명, 문형진, 김후련, 2006: 세계의 장례문화, 138-139pp.
김재현, 2011: 베트남 전통혼인과 그 특징에 대한 고찰: 내재된 전통 관념을 중심으로. 東南亞硏究, vol.21, 90pp.
심혁주, 2008: 티베트 천장, 하늘로 가는 길. 서울: 책세상, 219-243pp.
이은규, 2008: 장례문화 변화에 대한 고찰. 역리학과 공주대학교원 석사학위 청구논문, 12pp.
진립명, 조효연, 2003: 西藏民俗文化. 北京 : 中國藏學, 378pp.
한국지리정보연구회, 2004: 자연지리학사전. 한울아카데미, 856pp.
부씬투이, 배양수 역, 2002: 베트남 베트남 사람들. 대원사, 109-112pp.
조지 케넌, 정재겸 역, 2011: 시베리아 탐험기. 우리역사연구재단, 230-235, 249-253 pp.
Marguerite van Geldermalsen, 2008: Married to a BEDOUIN. TrafalgarSquare, 279pp.
Pham, C. S. 1999: Gia le xua va nay, 41pp.
이정일, 『전통 관혼상제』, 2019
김성익, 『장례예식 표준총서』,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