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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근현대 유적지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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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부산 근현대 유적지 여행"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강화도 역사 유적지 답사
1.1. 성공회강화성당
1.2. 정족산성
1.3. 병인양요와 외규장각 문제
1.4. 갑곶돈대와 민간인 학살 사건

2. 문화 여행
2.1. 축제 여행
2.1.1. 문화 축제 여행
2.1.2. 스포츠 여행
2.1.3. 엑스포 여행
2.2. 건축물 여행
2.3. 음식 여행
2.4. 예술 여행

3. 도시와 촌락 여행
3.1. 도시와 촌락의 특징
3.2. 세계 도시
3.3. 촌락 여행

4. 우리나라의 문화 여행
4.1. 축제 여행
4.2. 세계 유산 여행
4.3. 음식 여행
4.4. 전통 시장

5. 인류의 성찰과 공존을 위한 여행
5.1. 산업 유산 여행
5.2. 봉사 여행
5.3. 미래지향적인 지역 여행

6.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강화도 역사 유적지 답사
1.1. 성공회강화성당

성공회 강화성당은 1890년 9월 29일 영국인 선교사 찰스 존 코프와 동역자들이 인천항에 도착하여 서울, 경기도, 충청도 등지에서 전도활동을 시작하면서 설립되었다. 이들은 1896년 6월 13일 강화도에서 한국인에게 최초로 세례를 베풀었고, 이를 계기로 1900년(광무 4년)에 강화도에 제일 먼저 성당을 건립하게 되었다.

성당의 외관은 전통 건축양식을 따랐지만 내부는 서양의 바실리카 양식을 따랐다. 1층은 정면 4칸, 측면 15칸이며 2층은 정면 2칸, 측면 13칸인 한식 중층건물이다. 성당정면의 다섯 개 기둥에는 한자로 쓰여 있는 성경문구가 드리워져 있다.

1943년 일본은 태평양 전쟁 중 강화성당 정문 계단의 난간과 내삼문에 있는 종을 전쟁물자로 공출해 갔다. 현재의 종은 1989년에 다시 만들었으며, 2010년 11월 14일에는 정문계단의 난간이 일본 성공회 성도들의 성금으로 복원되었다.

성공회는 1534년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분리되어나간 영국 국교회의 전통과 교리를 따르는 교회로, 전 세계에 약 1억 명의 신자가 있다. 대한성공회의 역사는 1889년 11월 1일 조선교구 설립을 목적으로 찰스 존 코프가 주교 서품을 받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신교육 보급을 위해 각지에 신명학교를 세웠고, 인천·여주·진천 등지에 병원, 수원과 안중에 보육원을 개설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또한 한국문화에 깊이 뿌리내리고자 토착화에 힘썼으며, 이에 따라 강화읍·강화도 온수리·진천·청주 등지에 한국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성당들이 남아있다.

현재 대한성공회는 서울, 대전, 부산 3개 교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국에 100여 개의 교회와 약 5만 명의 신자가 있다. 선교교육원을 통한 선교교육, 나눔의 집을 통한 사회선교, 샬롬의 집을 통한 이주노동자 사역 등에 힘쓰고 있다.


1.2. 정족산성

정족산성은 강화도의 핵심적인 역사 유적지 중 하나이다.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던 강화도에 자리 잡은 정족산성은 고구려, 신라, 고려, 조선 시대를 거치며 계속해서 보수 및 보강되어 왔다.

정족산의 능선을 따라 만들어진 정족산성은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어 "삼랑성"이라고도 불린다. 이는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그 전설은 다음과 같다. 단군은 한강 입구에 자리 잡은 강화도를 주목하고 있었는데, 다른 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강화도에 산성을 쌓기로 결심하였다. 하지만 이를 혼자서 어려워하던 중 단군의 세 아들이 나서서 자신들이 성을 쌓겠다고 나섰고, 결국 세 아들이 각각 한 봉우리씩 맡아 성을 쌓아 완성했다는 것이 그 전설의 내용이다.

실제로 정족산성을 쌓은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그 축조 기법으로 볼 때 삼국시대의 석성으로 추정된다. 성벽은 석재를 잘라서 맞추는 "할석" 공법으로 견고하게 쌓았고, 성벽의 곡선이나 치성(雉城) 등의 구조로 볼 때 당시의 산성 축조 기술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이후 고려와 조선 시대에도 계속해서 보수 및 보강되어 왔다.

정족산성은 특히 병인양요 당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점령하자 조선군 장수 양헌수는 정족산성에 549명의 군대를 은밀히 매복시켰다. 이후 프랑스 군대가 정족산성을 공격하자 조선군이 포격을 가하며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프랑스군은 60~70명의 사상자를 내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프랑스 함대는 결국 원정을 포기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로 인해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구 제국주의 세력을 격퇴한 중요한 의의를 지니게 되었다.

이처럼 정족산성은 강화도의 역사와 함께 해 온 대표적인 역사 유적지로, 그 자체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병인양요 당시의 전투 현장이라는 점에서 더욱 큰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1.3. 병인양요와 외규장각 문제

병인양요는 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이다. 양헌수의 정족산성 전투가 프랑스 함대를 후퇴시켜 병인양요를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1866년 초에 대원군은 프랑스신부와 조선인 천주교신자 수 천 명을 학살하였다. 이 박해 때 프랑스선교사는 리델이 중국으로 탈출해 주중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에게 박해 소식을 알리었다. 이에 로즈가 대 함대를 이끌고 내침, 한불간의 군사적 충돌이 야기되었다. 로즈는 1차 원정과 2차 원정을 통해 강화부를 점령하였고, 강경한 응징 보복의지를 보였다.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10월 26일에 문수산성 전투에서 조선군을 압도하였고 프랑스군의 총포 화력을 당해낼 수 없어 강화도의 관리·군인·백성이 모두 피난했기 때문에 강화도는 프랑스군의 독무대가 되었다. 이때 양헌수는 화력 면에서 절대 열세인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제압하려면 기병작전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어융방략'으로써 강화도를 수복할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는 대군을 이끌고 덕포에서 비밀리에 심야 잠도 작전을 전개, 강화해협을 건너 정족산성을 점거하였다. 프랑스군대가 눈치 채지 못한 가운데 549명의 군대가 정족산성에 들어가 매복을 하였다. 조선군이 강화해협을 건너가 정족산성에 농성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로즈는 정족산성 공격을 명하였다.

조선군이 동문과 남문으로 쳐들어오는 프랑스군에게 일제히 포격을 가하면서 일대 격전이 벌어졌고 접전 결과, 프랑스군은 전사자 6명을 포함하여 60~70명의 사상자를 내었으나 조선군의 피해는 전사자 1명, 부상자 4명뿐이었다. 화력 면에서 열세인 조선군이 연전연패를 하다가 양헌수의 뛰어난 전략에 의해 근대식 병기로 장비한 프랑스군을 격퇴하였으며 또한 정족산성 패전을 계기로 로즈함대는 원정을 포기하고 강화도를 철수하였다.

이 때 프랑스 함대에 의해 궁전과 외규장각 도서 중 의궤류와 고문서들을 약탈해갔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구 제국주의 침략세력을 격퇴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지만 대원군의 쇄국 정책이 병인양요로 인해 정당화되어 개화가 그만큼 늦어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점과 프랑스 역시 조선원정의 지상 목표가 선교사 학살에 대한 응징 보복인데, 보복은커녕 오히려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와 쇄국정책을 강화시켜 수교 관계가 없는 조선으로 가서 조선 개항을 위한 입약협상조차 벌이지 못한 채 오히려 한불관계를 악화시켰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는 외규장각을 불태우고 많은 도서들을 훔쳐갔다. 그로 인해 생긴 외규장각 도서 반환 문제는 1991년부터 지금까지 장기간을 끌어왔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도 하나의 역사이다. 약탈과 방화는 응징으로서 불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전쟁의 과정에서 이와 같은 일을 저지른 프랑스 군의 행위는 어떠한 정당성도 얻기 어렵다. 또한 인류의 문화유산 가운데 일반 예술품과 달리 도서유물을 그것이 생산된 나라, 그 문화를 계승하고 있는 사회를 떠나서는 그 가치를 제대로 발휘하기 어렵고 다른 나라 사람이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의궤도서들처럼 조선왕조의 국가적 상징성을 지닌 것들이라면 매매나 교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당연히 외규장각의 도서를 반환받아야 하는 것이 맞다.


1.4. 갑곶돈대와 민간인 학살 사건

갑곶돈대는 사적 306호로 고려시대부터 강화도 방위의 핵심이 되는 장소였다. 이곳에서 많은 외적의 침입을 막으며 버텨왔지만, 한편으로 현대사가 낳은 아픔이 존재하고 있다. 바로 "강화 향토방위 특공대"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던 것이다.

1950년 9·28 서울 수복 후 강화도에서는 민간 청년 반공 단체인 '치안대원'과 '대한 정의단 단원'들이 인공시절 가볍게 부역한 사람들이나 월북한 사람들의 가족들을 끌고 가 고문하고 취조하면서 괴롭혔다. 이들은 잠시 해산하였다가 1950년 12월 18일 '향토방위 특공대'를 결성하였다. 특공대원들은 부역한 사람들이나 월북한 사람들의 가족들을 연행해 갔고, 1·4후퇴를 겪으면서 이들을 양조장에 가두었다가 옥계 갯벌에서 약 10여 명씩 3일 간 학살하였다. 그 결과 남자 약 45명, 여자 약 15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피해자의 유족들은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후 강화도에 민간 방공대가 만들어져 인공시절 부역에 참가했던 인원들을 연행해 신문을 하다가 195...


참고 자료

문화재청(http://www.cha.go.kr/)
대한성공회(http://www.skh.or.kr/)
성공회강화성당 탐방1·2(http://blog.naver.com/sbaedal)
전등사 홈페이지(http://www.jeondeungsa.org/)
강화학살대책위(http://cafe.daum.net/genocide21)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r)
기사 “오마이뉴스 : 이명박 정권 믿지 못해 소송 참여 못한 사람 많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94480)
임석재, 「한권으로 읽는 서양건축사」, 북하우스, 201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대한성공회출판부, 1980
김정신, 「초기 한국성당건축의 토착화에 관한 연구」, 1983
김유리, 「성공회강화성당 건축에 관한 연구: 건립배경과 건축요소 분석을 중심으로」,1989
병인양요와 외규장각 도서문제 연구, 유광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기사 “조선일보 : 정부가 역사를 왜곡하니 대한민국이 포격당하는 것”

요즘 20대들의 여가생활, 송채연 기자, 소비자 평가, 2020.09.21.
http://www.iconsumer.or.kr/news/articleView.html?idxno=13040
여가 생활... 젊을 땐 오락, 휴식, 나이 들면 ‘이것’? 김지윤 기자, 레이디경향, 2022.05.17.
https://lady.khan.co.kr/issue/article/202205170941001?ref=naver
골프, 호캉스로 ‘플렉스’하는 MZ세대... 패션, 여가업계 ‘타깃’되다, 에너지경제신문, 2021.07.04.
https://www.ekn.kr/web/view.php?key=2021070101000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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