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도덕철학
1.1. 덕의 통일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주장
소크라테스는 모든 덕들이 지혜의 일부이거나 한 종류라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어떻게 지식이 각각의 개별적인 덕의 필요조건이 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현명하지 않으면, 즉 이성을 사용하여 우리의 욕구를 억제하지 않으면 절제의 덕을 지닐 수 없고, 현명하지 않으면 용기의 덕을 지닐 수 없다. 왜냐하면 무엇이 두려운 것이며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분명히 인식하는 것은 일종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용기 있는 사람은 어리석을 수 없다는(=지혜가 부족할 수 없다는) 점, 정의로운 사람은 어리석을 수 없다는 점이 도출되며, 이는 다른 모든 덕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현명한 사람은 어느 누구나 다른 모든 덕들을 동시에 지니게 된다. 이렇듯 다양한 덕들은 동일한 영역에 속하는 것이며, 그들 중 하나가 어떤 사람에게서 발견된다면 나머지 모두도 발견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덕은 곧 하나이다.
1.2. 소크라테스의 타산적 역설과 부정의 행위의 비자발성
우리가 정의와 부정의가 무엇인지를 안다면(어떤 행위가 정의로운지 아니면 부정의한지를 안다면) 그리고 만일 우리가 덕 있는 행위가 항상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결코 알면서 그리고 의도적으로 부정의한 것을 행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부정의한 것을 행하는 것"은 "우리가 심사숙고하여 자신에게 해가 되고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포함하는데, 이는 곧 "우리는 결코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을 추구하지는 않는다"는 타산적 역설이 주장하는 바와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정의한 행위는 자신에게 진정으로 이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못 생각하는 것, 즉 무지의 결과이며 이러한 행위는 비자발적인 행위이다. 즉, 결코 자발적으로 해로운 결과를 추구한 것이 아니므로.
1.3. 그릇된 행위의 비자발성과 무지의 문제
그릇된 행위의 비자발성과 무지의 문제는 소크라테스의 타산적 역설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가 정의와 부정의가 무엇인지를 안다면, 그리고 우리가 덕 있는 행위가 항상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결코 알면서 의도적으로 부정의한 것을 행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정의한 것을 행하는 것"은 "우리가 자신에게 해가 되고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포함하는데, 이는 곧 "우리는 결코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타산적 역설이 주장하는 바와 반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정의한 행위는 자신에게 진정으로 이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못 생각하는 것, 즉 무지의 결과이며 이러한 행위는 비자발적인 행위이다. 결코 자발적으로 해로운 결과를 추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 정의로운 국가의 모습
2.1. 이상적인 국가의 구조와 특징
이상적인 국가의 구조와 특징은 다음과 같다.
이 국가는 인간의 본성에 기초하여 구성된 국가이며, 인간에 본성에 기초한 사실들을 인정하고 인간의 본성이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키는 것으로부터 생겨난 이성적 원리들을 받아들이는 인간들이 구성한 유기체이다. 이러한 국가에서 시민들은 각각이 자신의 몫을 행함으로써 또한 자신의 몫을 얻게 된다. 또한 이러한 국가는 정의의 덕을 구체화한 것인데, 정의란 국가 전체의 덕으로 국가를 구성하는 각 부분이 자신들의 특별한 역할에 알맞은 덕을 드러낼 경우 실현된다.
사람들이 각각 타고난 성향에 따라 맡은 바 일에 참여하는, 즉 각 계층이 각각 타고난 성향에 따라 구분되어 각자의 역할을 잘 수행함으로써 덕을 소유하고, 나아가 전체적인 일에 각각 나름대로 기여하는 정의로운 국가. 이는 곧 다른 계층의 일을 넘보지 않으며 한마음으로 하나 된 국가이자, 지혜를 가진 통치자에 의해 다스려지는 이성적인 국가이다.""
2.2.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차이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소크라테스는 덕이 곧 지식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무엇이 선인지 아는 것이 곧 그 선을 추구하도록 만든다고 주장하였다. 즉, 지식만이 모든 시민들을 정의롭고 선하게 만들어 부정과 악을 피할 수 있게 해준다고 보았다. 이는 소크라테스의 "지덕일치", "지행합일", "주지주의" 사상으로 나타난다. 반면 플라톤은 우리의 이성의 명령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는 감정적으로 올바른 마음의 상태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즉, 순수한 이성과 진리의 파악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적절한 감성이 없다면 설령 선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추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플라톤의 "온건한 주지주의"로 나타난다.
둘째, 소크라테스는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비자발적이며 무지의 결과라는 역설적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를 거부하였는데, 왜냐하면 선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악을 혐오하여야만 하며 참된 지식을 사랑하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감수성을 가르치는 것이 적절한 교육의 역할이라고 보았다.
3.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3.1. 최고선으로서의 행복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eudaimonia)을 인간의 최고선으로 간주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최고선의 조건을 충족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행복은 우리 모두가 목표로 삼는 최종 목적이다. 우리는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 행복을 의욕하지 않는다.
둘째, 행복은 그 자체로서만 가치를 지니며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수단이어서는 안 된다.
셋째, 행복은 자기 충족적이어야 한다. 즉 행복은 그 자체만으로도 삶을 더욱 바람직하게 만들며 그 외에 더 필요한 것이 없어야 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위의 세 가지 조건 모두를 만족시킨다고 주장한다. 행복은 우리 모두가 목표로 삼는 목적이며, 또한 우리는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 행복을 의욕하지 않는다. 또한 행복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하여 다른 어떤 것을 더할 필요도 없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인간의 최상의 선 또는 최고선으로 받아들인다.""
3.2. 이성과 욕구의 역할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이성적인 부분과 비이성적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성적인 부분은 추론과 사고를 담당하는데, 이성적 부분이 원활하게 작용한다면 인간은 지적인 덕을 얻게 된다.""
한편 비이성적인 부분에는 영양을 담당하는 부분과 욕구를 담당하는 부분이 있다.""
욕구를 담당하는 부분은 이성과 무관한 부분이지만, 이성의 명령을 받아들일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이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첫째는 추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성에 따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두 가지 이성적 능력이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보았다.""
또한 그는 인간의 최고선이자 행복은 이성적인 덕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이성과 욕구가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이성이 욕구를 인도하고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인간의 완성된 모습은 이성과 욕구가 균형을 이루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3.3. 본성의 덕과 중용의 이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본성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