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머리말
김부식은 『삼국사기』표문에서 「고려시대 지식인들이 중국 진·한 역대의 역사는 자세하게 알면서 삼국의 역사는 잘 모른다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김부식은 우리의 고대에 삼국만이 존재함이 아니라는 것을 간과한 듯하다. 흔히 알고 있듯이 고대 국가로서의 삼국이 성립한 시기는 대략 3세기 이후일 것이다. 이러한 3세기 이후의 역사 속에서『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고구려·백제·신라만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성장하고 발전한 또 하나의 왕국 가야를 간과하고만 것이다. 가야는 다른 삼국과는 달리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하였고 그 성립에서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전해줄 연대기적 자료를 전혀 남기지 못하였다. 다만 한국·중국·일본의 여러 사료 속에서 산발적이고 단편적으로 그 실체를 전하고 있을 뿐이다. 현재 가장 가야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 사료로는 『삼국사기』·『삼국유사』·『일본서기』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사료 속에 전하는 단편적인 기록들조차 해당 국가의 주관적인 입장에서 기록된 것이기에 가야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주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문헌자료의 단편성은 가야 연구의 왜곡적인 문제까지 야기 시켰다. 대표적인 사례는 일제시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던 임나일본부설이다. 그들은 왜가 한반도 남부 지역을 지배하였다는 점을 강조하며, 왜가 가야를 어떻게 지배하였는가를 밝히려는 데 연구의 초점을 맞추었다. 해방 이후의 연구 경향 역시 가야사를 주체로 하기보다는 백제사나 신라사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가야사를 언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광개토대왕비와 임나일본부설과 같은 민감한 사항 속에서 가야사는 부수적인 연구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가야 각 지역에서 고고학 발굴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이를 통한 다양한 유물의 출토와 유적의 발견은 가야사 전반에 대한 관심을 크게 고조시키게 되었다. 이후 현재까지 많은 연구자와 연구 실적의 축적으로 문헌사나 고고학 계통을 불문하고 많은 성과들이 도출되고 있다. 이런 가야사에 대한 연구 성과들은 이제 가야가 삼국사에 부속된 모습이 아닌 그들과 함께 상호 경쟁과 교류를 통해 발전한 우리 고대사의 한 큰 축이었음을 인지케 해 주었다.
2. 가야의 역사와 문화
2.1. 가야의 건국 신화
가야의 건국 신화는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잘 나타나 있다. 개벽 후 이 지역에는 나라 이름과 군신의 칭호가 없었고,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9간이 추장이 되어 각기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구지봉(龜旨峰)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촌인들이 모였는데, 형상은 보이지 않고 "여기 사람이 있느냐"라는 소리만 들렸다. 촌인들이 "우리들이 여기 있습니다"라고 답하자 "여기가 어디냐?"라고 물었고, 촌인들은 "구지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어서 "황천께서 나를 명하기를 이곳에 와서 나라를 새롭게 하고 임금이 되라 하였으니 너희들은 마땅히 봉상에서 흙을 파면서 노래하기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 하고 무도하면 대왕을 맞이하여 환희용약 할 것이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9간들은 구지가(龜旨歌)를 불렀고, 자색 무지개 끝에 붉은 폭에 싸인 금함이 내려왔다. 그 안에 6개의 황금알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화하여 수로라는 동자가 되었다. 10일 후 수로의 신장이 구척이나 되었고, 그의 나라 이름을 대가락(가야)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가야의 건국 신화는 지역의 토착 세력과 수로 집단이 연합하여 금관가야를 건국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특히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알에서 태어난 수로왕의 등장은 수로왕 출신 세력이 이 지역에 새로운 정치체제를 수립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전에 존재하던 9간의 추장들이 구지가를 통해 수로왕을 추대하는 모습은 토착 세력과의 연합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가야의 건국 신화는 토착 세력과 수로 집단의 연합을 통해 새로운 정치체제가 탄생한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2.2. 가야 연맹의 형성
가야 연맹의 형성은 변한 소국들이 발전하면서 점차 가야로 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