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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1.1.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삶과 신학사상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제국에 속해 있던 북아프리카의 작은 도시 타가스테에서 태어났다(354년). 그의 어머니는 성 모니카이다. 라틴어 문법과 「말 잘하는 기술」(修辭學)에 뛰어났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열 여섯의 나이에 북아프리카의 수도 카르타고로 유학을 갔다(370년). 그곳에서 한 여인과 동거에 들어간 아우구스티누스는 얼마 있지 않아 아들 아데오다투스를 얻었다(370/1년경). 떳떳하지 않은 동거 생활은 14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370~384년).
열 여덟 살 나던 무렵 아우구스티누스는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Hortensius)를 읽고서 「지혜에 대한 사랑」[철학]에 빠졌다(372/373년). 이제 세상 것들에 대한 애정은 시들해지고, 진리를 향한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그러나 철학적 관심으로 성서도 읽어보았지만, 그 문체나 내용이 유치하게 느껴졌기에 금세 덮어 버리고 말았다.
생활비를 손수 벌어야 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유학 생활을 중단하고 고향 타가스테로 돌아와 수사학 학교를 차렸다(373년). 그 이듬해에는 카르타고로 가서 9년 동안 수사학을 가르쳤다(374~383년). 그 아홉 해 동안 마니교 이단에 기웃거렸지만, 결국 마니교의 어설픈 교리 체계와 지도자들에게 실망하고 만다. 낙심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카르타고를 떠나 로마로 건너가서 수사학을 가르쳤다(383년). 한동안 아카데미아 학파의 회의주의(懷疑主義)에 빠지기도 했던 그는,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밀라노 황실학교의 수사학 교수로 초빙되었다(384년).
그러던 어느 날,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떻게 하면 황제에게 바치는 축사를 멋지게 꾸밀 수 있을까 고심하며 밀라노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때마침 싱글벙글 환하게 웃고 있는 거지가 눈에 띄었다. 바로 그 순간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고달프게 추구하고 있는 인생의 거짓 행복이, 거지가 이미 맛보고 있는 작은 행복보다도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 밀라노에 있는 그 유명한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설교를 듣면서 성서의 참뜻과 그리스도교 진리를 조금씩 깨우쳐 갔다.
그리고 황실의 높은 벼슬아치 폰티치아누스가 들려준 수도승 안토니우스에 얽힌 이야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마음을 세차게 뒤흔들어 놓았다. 복음의 권고대로 자기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주님을 따라나선 수도승들의 삶에 비해, 아직도 엉거주춤 망설이고 있는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387년 부활 성야(4월 24일 밤)에 밀라노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고향 타가스테에 돌아온 아우구스티누스는 지니고 있던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었다(388년). 그리고는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고향집에 작은 수도 공동체를 세웠다. 그들은 밤낮으로 주님의 법을 묵상하면서 단식과 기도와 선행에 전념했다(388~391년). 이미 아우구스티누스의 명성이 널리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온전히 수도생활에만 매달리고 싶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혹시라도 교회의 공직을 맡게 될까봐 늘 두려워했다. 한 번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북아프리카 제 2의 도시 히포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곳에는 연로한 발레리우스가 주교로 있었다. 어느 주일날이었다. 발레리우스 주교는 자기를 도와줄 사제가 당장 필요하다고 강론 중에 하소연하였다. 때마침 그 자리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있었다. 성전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알아본 신자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몰려들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발레리우스 주교 앞에 억지로 데려간 그들은 사제품을 달라고 간청하였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삶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이라 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