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강주"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신라의 지방통치체제 정비
1.1. 영일냉수리신라비와 지증왕
1.2. 지증왕 대의 주군제
1.3. 신라, 통일 이전 지방체제
1.4. 신라, 통일 이후 지방체제
2. 고려와 후백제의 공산전투
2.1. 초기 고려와 후백제의 관계
2.2. 공산전투의 발발 배경
2.3. 공산전투의 결과
2.4. 왕건의 목숨을 구한 신하
2.5. 공산전투의 흔적
3. 후삼국시대의 시작, 견훤의 생애와 업적
3.1. 개요
3.2. 견훤 출생과 생애
3.3. 후백제의 건국
3.4. 고려와 천하를 두고 다투다
3.5. 고려 망명과 최후
3.6. 견훤에 대한 평가
4.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신라의 지방통치체제 정비
1.1. 영일냉수리신라비와 지증왕
「영일냉수리신라비」에는 "?須, 道使"라는 내용이 나와있다. 이 중 탐수는 지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이어서 나오는 도사(道使)는 지방관의 명칭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영일냉수리신라비」를 통해 촌주와 도사 등의 지방관직명이 확인되어 신라의 지방 통치 조직을 엿볼 수 있다.
신라는 503년 지증마립간(王) 때 공식적으로 왕호를 칭하게 되었고, 505년에는 지방 행정구역을 정비하게 된다. 이에 따라 단계적인 행정체계를 갖추게 되었으며, 왕경에서 파견된 지방관이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이로써 중앙 집권적인 국가체제가 정비되는 데 기반이 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지증왕 6년에 주(州), 군(郡), 현(縣)을 정비하고 실직주를 설치하여 이사부를 군주로 파견하였다. 이는 중고기 신라 지방통치의 효시로 평가된다. 즉 이 시기부터 왕명을 대행하는 지방관이 처음 파견되어 직접 지배하는 형태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영일냉수리신라비」와 지증왕 6년의 지방 행정구역 정비를 통해 신라의 지방통치체제가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영일냉수리신라비」는 지방관직명이 확인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
1.2. 지증왕 대의 주군제
지증왕 대의 주군제는 신라 지방통치체제의 발전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계라 할 수 있다. 주는 관할한 영역이 바로 최상급의 지방행정 단위로, 아직 군사와 행정이 완전히 이원화되지 않아 군주는 군사이면서 동시에 일정 영역을 총관하는 지방관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지방행정 단위로서의 주와 군관적 성격의 군주가 결합하여 하나의 완성된 구조를 갖추고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주는 일반적으로 인식되어 온 지방행정 구획으로서의 주가 아니라 군단의 소재지였다. 군주는 원래 왕경에 주둔하면서 6부를 통솔하던 좌우군주였는데, 지증왕 6년 지방에 상주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한편 군과 현은 주의 하부 행정 기관으로, 행정촌이 곳곳에 설치되고 그 확대나 몇 개의 행정촌을 묶은 중간 수준의 행정구역으로 군이 설정되었다. 따라서 지증왕 대의 주군제는 신라 지방통치체제의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1.3. 신라, 통일 이전 지방체제
신라의 통일 이전 지방체제는 5주와 2소경 체제로 구성되었다. 지증왕 6년(505년)에 지방행정구역을 처음 정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5주는 실직주(삼척), 신주(경기 광주 부근), 사벌주(상주), 비사벌주(창녕), 비열홀주(안변)로 구성되었다. 이 5개 주에는 지방관인 군주가 파견되었다.
2소경은 중원경(충주)과 동원경(강릉)으로, 지방행정의 중심지이자 군사적 요충지의 역할을 담당했다. 소경에는 왕족이나 귀족이 파견되어 관리되었다.
이처럼 신라는 통일 이전부터 지방 행정체제를 갖추고 있었으나, 아직 군사와 행정이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군주는 지방행정의 총괄자이면서 동시에 군사력의 실질적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
1.4. 신라, 통일 이후 지방체제
통일신라 이후 신라의 지방체제는 더욱 강화되어 9주제 체제가 완성되었다. 지증왕이 지방을 주, 군, 현으로 정비한 것을 바탕으로 통일신라 후 지방의 5주에서 9주로 늘어났다. 지방관으로는 도독(都독공주의 도독)이 파견되었는데, 통일 이후 행정이 보다 집중되면서 지방관의 성격도 변화를 보였다.
통일신라의 옛 영토였던 상주·양주·강주와 백제의 옛 땅 웅주·전주·무주, 그리고 고구려의 옛 땅 한주·삭주·명주 등 총 9주를 설치한다고 선언하였다. 이는 삼국을 하나로 통일했다는 "삼한일통의식"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고구려 영토의 한주, 삭주, 명주는 이미 6세기부터 신라 영토로 편입되어 있었다.
신문왕 5년과 6년에 걸쳐 9주제가 완비되었으며, 경덕왕 16년에는 9주의 명칭을 중국식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혜공왕 12년에 다시 이전 명칭으로 수정하는 과정을 거쳤다.
통일 이전에 비해 행정구역이 확대되면서 더 많은 지방관이 파견되었고, 이를 통해 중앙권력이 촌락 사회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곧 신라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적 국가로 발돋움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하부단위인 군·현에도 지방관이 파견되었는데, 군태수, 소수, 현령 등이 임명되어 관련 업무를 담당하였다. 한편 촌은 여전히 토착세력인 촌주가 다스렸으나, 통일기에 들어 촌주의 자치력과 권한이 점차 약화되었다.
또한 수도가 동남쪽에 치우쳐 있어 통치의 어려움이 있었...
참고 자료
「영일냉수리신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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