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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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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생성일 2024.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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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소개글

"서구근대"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필독!!

2.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2.1.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2.2. 비텐베르크 성 교회
2.3. 루터의 참나무와 집
2.4. 얀 후스와 프라하 대학

3. 루터와 만인의 제사장
3.1. 마르틴 루터와 비텐부르크 교회
3.2. 보름스 제국회의와 루터의 파문
3.3. 루터와 독일 농민운동
3.4. 루터의 만인 제사장 교리

4.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4.1. 16세기 시대정신과 코페르니쿠스
4.2. 브루노와 갈릴레이

5. 엘리자베스 1세
5.1.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 격퇴
5.2. 엘리자베스 1세의 종교정책
5.3. 영국 국교회 수립

6. 서구 근대 런던의 극장과 문화정책 중산계급의 확장

7. 청교도 정신
7.1. 영국의 종교정책 변화
7.2. 청교도들의 소박한 생활방식
7.3. 찰스 1세와 영국 의회의 갈등

8. 영국의 시민혁명
8.1. 올리버 크롬웰과 왕의 처형
8.2. 찰스 2세의 왕정복고

9. 달란트와 밀턴의 청교도주의
9.1. 마태복음 달란트 비유
9.2. 시인 밀턴의 청교도 정신

10. 신의 장엄함
10.1. 제러드 맨리 홉킨스 소개
10.2. 홉킨스의 시작품 분석

11. 16세기 스페인의 종교정책
11.1. 펠리페 2세의 무적함대
11.2. 알바공의 종교 탄압

12. 네덜란드 독립전쟁
12.1. 네덜란드 공화국의 탄생
12.2. 칼빈주의와 교역의 발달

13. 네덜란드의 부와 번영
13.1. 플류트 선박의 특징
13.2. 암스테르담, 교역과 무역의 중심지

14. 중세의 고딕성당
14.1.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상
14.2. 스콜라 철학과 고딕 양식

15. 인쇄술의 발명
15.1. 구텐베르크와 금속 활자 인쇄술
15.2. 루터 종교개혁과 인쇄술

16. 이성과 계몽주의 -유럽 근대의 마녀사냥과 인쇄술
16.1. 마녀재판과 근대, 계몽주의
16.2. 가마와 구텐베르크의 역할

17. 인터넷과 인공지능, 인류의 미래
17.1. 팀 버너스 리와 월드와이드웹
17.2. 스티븐 호킹의 AI 경고

18. 대항해시대 -포르투갈의 탐험과 도전정신
18.1. 엔리케 왕자와 보자도르 정복
18.2.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해

19. 바스쿠 다 가마와 마젤란
19.1. 마젤란의 세계일주
19.2. 향료의 섬 말루쿠

20. 이성과 계몽주의
20.1. 미국 혁명의 전개
20.2. 벤자민 프랭클린과 토마스 제퍼슨

21.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필독!!

이 자료는 동서대학교 교양 "서구 근대의 초상: 이성과 신앙"을 들으며 직접 작성한 자료입니다. "서구 근대의 초상: 이성과 신앙"은 PPT로 수업하시지만 자료를 올려주시지 않으셔서 PPT 내용을 그대로 작성했습니다. 오타 있을 수 있습니다. 사진 없습니다. 첫 번째 영상은 OT이므로 두 번째 영상 내용부터 작성하였습니다. 2~26까지이며, 2~14는 중간고사 범위, 15~26은 기말고사 범위입니다.


2.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2.1.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 교회의 정문에 게시한 것으로, 당시 로마 교황청의 부패한 관행인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며 교회 개혁을 주장한 것이다. 루터는 면죄부 판매가 신앙인들을 착취하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그는 면죄부 구매로 죄가 면제되는 것이 아니라 회개와 신앙심만이 구원을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로마 교황청과 세속 권력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당시 교회가 면죄부 판매를 통해 막대한 수익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루터의 비판과 개혁 요구는 교회의 이해관계에 정면으로 반대되었다. 루터는 성경이 유일한 신앙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며, 교황보다는 개인의 신앙심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95개조 반박문의 내용이 퍼져나가면서 당시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이 크게 확산되었다. 인쇄술의 발달로 루터의 저술들이 신속하게 보급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사상이 널리 퍼질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루터의 개혁 운동은 중세 가톨릭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서유럽의 근대화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2. 비텐베르크 성 교회

비텐베르크 성 교회는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의 시작과 전개 과정을 보여주는 "정신적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마르틴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이 교회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임으로써 종교개혁의 기폭제가 되었다. 비텐베르크 성 교회는 신앙과 믿음, 개혁을 낳은 중심지였다.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붙였던 비텐베르크 성 교회는 독일 동부 작센안할트 주에 있는 도시 비텐베르크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루터의 도시"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연간 약 20만 명의 순례객이 찾는 관광지이다. 1524년에는 성당이 루터교회로 전환되었고, 루터의 논제가 동판문에 각인되어 영구히 남아 있다.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는 면죄부를 팔고 있었으며 라틴어만 고집하였다. 이에 루터는 제후의 비호를 받아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신하며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이를 통해 종교개혁의 고삐를 당기게 된다. 이처럼 비텐베르크 성 교회는 루터의 개혁이 시작되고 전개되었던 중요한 장소였다.


2.3. 루터의 참나무와 집

루터의 참나무와 집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중요한 장소이다. 비텐베르크 성 교회에서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 루터는 이후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당했으나,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보호를 받아 바르트부르크 성에 피신하여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루터가 소속되었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은 해체되어 지금은 루터 관련 유물을 전시하는 '루터하우스' 박물관이 되었다. 또한 교회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루터의 참나무"는 1520년 교황청으로부터 받은 파문장을 불태운 후 심었던 나무이다. 성직자의 독신 수도를 반대한 루터는 수녀였던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하여 이 집에서 살았는데, 건물 앞 '루터 정원'에는 아내 카타리나의 등신대 동상이 세워져있다.

이처럼 루터의 참나무와 집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전개한 주요 거점이었으며, 그의 삶과 고민이 녹아있는 장소라 할 수 있다. 루터의 행적과 그가 남긴 유산을 통해 근대 역사상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던 종교개혁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2.4. 얀 후스와 프라하 대학

중세 유럽의 종교 개혁을 예고한 사건은 체코 출신 종교 개혁가 얀 후스(Jan Hus, 1369-1415)가 주도한 개혁 운동이었다. 후스는 프라하 대학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 활동하며 면죄부 판매 중단을 주장하다 교회로부터 박해받아 화형에 처해졌다.

당시 체코는 신성로마제국의 일부로 독일 출신의 고위 성직자들이 체코 국민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후스는 이러한 체코의 민족적 상황에 주목하여 민족적 자각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체코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찬송가를 작곡하여 가난하고 무지한 민중들에게 개혁적인 사상을 전파하였다.

후스는 특히 면죄부 판매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카톨릭 교회의 타락상을 폭로하였다. 이는 로마 교황청에 맞서 체코의 민족적 요구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후스의 개혁적 메시지는 프라하 대학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프라하는 체코 민족주의와 종교 개혁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스의 주장은 결국 로마 교황청의 강력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후스는 이단으로 정죄받아 화형에 처해졌다. 이는 중세 유럽에 큰 충격을 주었고, 100년 뒤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을 예고하는 사건이 되었다.

후스의 사후에도 그의 제자들이 체코에서 "후스파"라는 개혁 운동을 지속하였다. 후스 사상의 영향은 중세 유럽 종교 개혁의 물결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3. 루터와 만인의 제사장
3.1. 마르틴 루터와 비텐부르크 교회

마르틴 루터와 비텐부르크 교회는 종교개혁의 중심에 있었다. 마르틴 루터는 63년의 생애 중 후반 35년을 비텐부르크에서 보냈는데, 이곳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성서학을 가르쳤다. 그는 1517년 10월 31일에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에 '95개 논제'를 붙임으로써 공개 논쟁을 요구하며 종교개혁의 서막을 열었다.

이 '95개 논제'는 면죄부 판매와 가톨릭 교회의 부패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출판업이 급속히 발달하고 있었기에, 출판업자들은 이를 독일어로 번역해 유럽 전역에 퍼트렸다. 이로써 루터의 주장은 매우 빠르게 전파될 수 있었다.

비텐베르크 성 교회는 종교개혁의 시작과 전개 과정을 보여주는 "정신적 문화재"라 할 수 있다. 루터는 이곳에서 '95개 반박문'을 게시했고,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며 종교개혁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또한 이 교회에서 처음으로 '양형 영성체'를 시행하여 만인 제사장 교리를 실천했다.

비텐베르크는 루터가 활동한 도시로, 그의 이름이 붙어 "루터의 도시"라고 불린다. 비텐베르크 성 교회가 있는 이 도시는 연간 20만 명 이상의 순례객이 찾는 역사적 장소이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곳이자, 그의 삶과 업적을 간직한 곳이라 할 수 있다.


3.2. 보름스 제국회의와 루터의 파문

1521년 1월 27일부터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루터의 국외추방령을 선포하려 했다. 그러나 루터에게 호의적이었던 프리드리히3세 선제후가 루터의 파문을 의회에서 한 번 더 심사하도록 요청했고, 이 요청이 수용되었다.

카를 5세는 1519년 19살의 나이에 독일 황제로 취임하여 보름스 제국회의를 소집했다. 카톨릭 신자였던 카를 5세는 루터 문제에 대해 로마교황청과 마찰하고 싶지 않았다.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는 루터에게 해명할 기회를 주자고 제의했다.

의회로부터 출두령을 받은 루터는 1521년 4월 16일 보름스에 도착해 다음날 황제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루터는 4월 19일 의회에서 변론하였는데, 성서에 의거해서 자신의 주장을 취소할 수 없다고 말했다.

보름스 칙령은 루터의 사제직 파문에 이은 두 번째 사형성고였다. 의회 결정에 따라 황제 카를 5세는 1521년 5월 8일 칙서(보름스 칙령)에 서명하고 25일 공표했다. 보름스 칙령은 루터를 이단자로 정죄하고 그의 책들을 모두 불살라 없애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처럼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루터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당당히 맞섰지만, 결국 황제 카를 5세에 의해 이단자로 선포되어 국외추방 판결을 받게 되었다. 이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루터는 은신처인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등 종교개혁 운동을 더욱 심화시켜 나갔다.


3.3. 루터와 독일 농민운동

루터의 종교개혁은 중세로부터 근세로 가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지만, 과정에서 많은 갈등과 유혈사태가 발생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524년 독일 남서부 지방에서 발생한 독일 농민반란이다.

중세 봉건사회에서 농민들은 세속귀족과 성직자들에 의해 오랫동안 착취와 수탈을 당해왔다. 마르틴 루터가 자신의 신학 사상을 전파하면서 사회 개혁의 불씨가 되자, 생활고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농민들은 루터의 사상에 공감하며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내세워 봉기를 일으켰다. 그들은 납세 감면, 농노제 폐지, 용역 노동 단축 등을 주장하며 폭력적인 방식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농민반란은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규모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루터는 곧바로 보수 귀족들의 편에 서서 농민들의 봉기를 강력히 탄압할 것을 주장하였다. 루터는 성경적 근거를 들어 권위에 복종할 것을 강조하며, 농민들의 요구를 "악마의 교란"이라고 비난하였다.

결국 보수 귀족들이 파견한 군대에 의해 농민 반란은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약 10만 명에 달하는 농민들이 죽임을 당했고,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로써 루터의 종교개혁은 계급 간 대립으로 이어지며 또 다른 사회적 갈등을 야기했다.

루터의 태도 변화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초기에는 농민들의 정당한 요구에 동조했던 루터였지만, 점차 보수화되어 귀족들의 편에 서게 된 것이다. 이는 루터가 지닌 한계이자 모순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종교개혁은 근대 사회로의 진입이라는 측면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3.4. 루터의 만인 제사장 교리

루터의 만인 제사장 교리는 그의 종교개혁 사상의 핵심이었다. 루터는 성직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적 권리와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기존의 가톨릭 교회가 주장했던 성직자 중심의 신앙관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개념이었다.

루터가 생각하기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직접 접근하여 자신의 신앙을 형성할 수 있으며, 성직자의 중재 없이도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만인 제사장권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 통해 루터는 성직자 계급과 평신도 계급 간의 차별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또한 평신도들도 자신의 신앙을 주체적으로 형성할 수 있게 되면서 교회의 지배구조에 대한 도전이 가능해졌다.

만인 제사장 사상은 루터가 작성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책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책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어느 누구에게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인이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는 평신도들도 자신의 능력과 지위를 바탕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만인 제사장 사상은 중세 가톨릭 교회의 엄격한 위계질서에 도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루터의 종교개혁에 있어 매우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를 통해 평신도들이 자신의 신앙을 주체적으로 형성할 수 있게 되었고, 교회 개혁의 동력이 되었다. 결국 만인 제사장 사상은 루터가 주도한 종교개혁의 핵심 원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4.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4.1. 16세기 시대정신과 코페르니쿠스

1543년, 폴란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 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한다는 새로운 지동설을 주장했다. 이는 당시 지배적이었던 중세의 천동설을 뒤엎는 혁명적인 주장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등장은 유럽 사회가 중세에서 근대로 전환되는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15세기 중반,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 인쇄술의 발명은 지식과 정보의 대량 생산과 확산을 가능하게 했다. 이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종교개혁을 통해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처럼 16세기는 전통과 권위에 대한 도전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이러한 시대정신과 맥을 같이 했다. 그의 주장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중세의 기독교적 세계관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는 태양을 우주의 중심에 두고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성경에 기록된 지구 중심설을 부정했다. 이는 곧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당시 학자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브루노는 코페르니쿠스의 모형에 동의하며 지동설을 더욱 발전시켰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를 ...


참고 자료

Why? 세계사 일본 전재운 글 | 최병국 그림 | 예림당 | 2019.05.15
유럽 중세교회의 향연 1 (11세기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개혁을 중심으로) 이영재 저 | 혜안 | 2020.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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