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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우리나라는 한 민족이 이념, 사상으로 분단된 유일한 분단국가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남한과 북한이 다른 이념과 가치관, 역사관을 가지고 있어 이러한 갈등이 더욱 심각한 상태이다. 남한은 자유민주주의, 북한은 공산주의라는 체제의 차이도 존재하는 만큼 더욱 통일이 어렵다는 문제도 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우리나라의 통일정책은 국가의 주요 정책 목표로 자리잡아 왔으며, 이는 단순히 정책적 측면 뿐 아니라 외교적 측면과 국가안보의 측면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남한과 북한의 통일정책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왔고, 시대적 흐름이나 남한 및 북한의 상황 등으로 인하여 화합과 대립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현재는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통해 세계 다른 국가들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통일정책이 한반도 뿐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2. 남한의 통일정책
2.1. 1970년대 이전
제1공화국 시기에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의 정부를 괴뢰정부로 규정하고 북한지역까지 통일정보를 수립하는 북진통일론을 주장하였다. 이는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이후 1953년 휴전이 선언되면서 제네바 정치회담에서 유엔을 통해 남북한 총선거가 제안되었으나, 북한은 전조선위원회를 구성함으로써 남북총선거를 실시하자고 주장하며 협상이 결렬되었다. 결국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통일정책은 남한과 북한의 통일정부 수립에 실패하고, 북진통일정책으로 변화하게 된다.
1960년대 제2공화국 시기에는 보다 활발한 통일정책이 논의되었다. 당시 장면 정부는 유엔의 감시하에서 남북한 지역의 완전한 자유선거를 실시하자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한국전쟁 이전의 통일정책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다만 기존의 통일정책과 달리 남한과 북한의 화합과 협력을 주장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정책은 소극적이고 충분한 추진배경이 없었다는 점에서 실질적 성과를 낼 수 없었고, 군사 쿠데타로 박정희 정부가 정권을 잡으면서 통일정책이 빠르게 변화하게 된다.
2.2. 1970년대
1970년대에 박정희 정부는 통일정책에 보다 적극적인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을 통하여 남북이 대화를 통해 평화로운 통일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남한의 경제개발이 충분한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남한과 달리 북한은 1961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7개년 계획이 목표연도에 달성되지 못하고 연장되었으며, 충분한 경제성장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 결과 남한과 북한의 경제 및 국방 수준이 역전되었으며, 남한이 북한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정책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972년 박정희 정권이 대북관계를 이유로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유신체제를 시행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에서 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하여 선출하도록 했고, 이는 통일정책을 정권유지를 위한 도구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독재정치로 인하여 남북관계는 다시 단절되었으며, 오히려 기존보다 갈등 및 대립이 심화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2.3. 1980년대
1980년대에는 남북 간 대화와 협력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전두환 정부는 1981년 국정연설을 통해 남북한 최고책임자의 상호방문을 제의하였고, 이후 통일헌법을 수립하고 이를 통해 총선거와 통일국회, 통일정부를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84년에는 남북한 교육과 경제협력 교류를 제안하는 등 본격적으로 통일정책을 계획 및 이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러한 제의를 거부하며 반공정책의 포기와 미군철수를 선행하여야 대화에 응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는 상당히 호전되었다. 1984년에는 북한이 한국수재민에 대한 물자를 제공하였고, 남북한 경제회담이 개최되는 등 본격적인 대화와 협력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