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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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유물"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화폐 비교
1.1. 고려시대의 화폐
1.2. 조선시대의 화폐
1.3.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화폐의 공통점
1.4.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화폐의 의의
1.5. 국립중앙박물관 방문후기

2. 고려시대 창원의 역사
2.1. 고려의 건국과 지방행정조직
2.2. 사회제도와 창원의 발전
2.3. 고려후기의 사회변화와 창원

3. 고려시대 유물
3.1. 봉림사지 삼층석탑
3.2. 봉림동 석조마애보살입상
3.3. 성주사 삼층석탑
3.4. 성주사 용화전 마애 관음보살입상
3.5. 불모산동 석불좌상
3.6. 용화전 석조여래좌상

4. 한국 고대사
4.1. 한국인의 기원
4.2. 인류의 출현과 구석기시대
4.3.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 문화
4.4. 단군과 고조선

5. 고구려 문화
5.1. 고분벽화의 의미와 표현기법
5.2. 고분벽화의 구조와 주제
5.3. 고분벽화에 나타난 신
5.4. 고구려가 대제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

6. 신라의 역사
6.1. 신라 상대
6.2. 신라 중대
6.3. 신라 하대

7. 북방문화의 한반도 유입
7.1. 고려와 북방
7.2. 북방문화의 침투
7.3. 거란 문화
7.4. 금나라의 침입
7.5. 고려와 원
7.6. 상호 문화 충돌과 교류

8.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화폐 비교
1.1. 고려시대의 화폐

고려시대의 화폐는 철전, 동전, 은병 등이 있었다. 고려왕조는 건국 이후 광종 때부터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정비, 강화하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성종은 화폐제도의 도입을 중요한 국가경제정책으로 삼았다. 성종은 996년(성종 15) 중국의 엽전을 모방한 건원중보를 주조하여 법화로 유통시키려 했다. 건원중보는 철전으로서 중국 화폐와 다른 우리나라에서 주조한 것임을 드러내기 위해 '동국'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이후 고려왕조는 해동통보, 동국통보, 동국중보, 삼한통보 등 다양한 동전을 주조, 유통시키려 했으나 실용가치가 전제된 쌀, 베 등 물품화폐에 구축되어 화폐로서의 구실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려왕조는 은병을 법화로 주조, 유통시키기 시작했는데, 이는 고려시대 화폐정책의 전환점을 이루었다. 고려에서는 이처럼 비금속 화폐인 철전과 동전의 한계를 보완하고자 귀금속 화폐인 은병을 발행했으나, 위조 은병이 나타나 그 가치가 떨어지자 순도 높은 소은병을 주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결국 화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결국, 고려왕조의 화폐정책은 법화제 도입을 통해 물물교환 체제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실용가치 있는 화폐 발행에는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1.2. 조선시대의 화폐

조선시대 초기에는 쌀과 무명을 주고 물건을 사는 것이 관례였다. 나라에서는 재정의 편리를 위해 조선 초기부터 닥나무로 만든 지폐인 저화(楮貨)와 세종 시대에 구리돈인 조선통보를 발행했으나, 도시를 제외한 시골에서는 실물 가치가 있는 무명을 실질적인 화폐로 사용하였다. '포화(무명화폐)'라는 표현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후에 전쟁이 발발하면 화살촉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화폐로 사용할 수 있는 유엽전을 만들어 유통하려 했으나, 그것이 통용되기에는 사회적, 경제적 여건이 미미하여 보급되지 못했다. 또 관리에게 봉급인 쌀과 포 그리고 저화를 지급하는 규정이 '경국대전'에 있었지만, 저화는 화폐로 널리 통용되지 못했다.

임진왜란, 그리고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사회적, 경제적 변화는 조선인들로 하여금 화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한다. 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들이 모색된다. 대동법, 양역변통론, 화폐 주조론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농업이 주를 이루던 사회가 점차 상공업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17세기 화폐의 주조와 유통에 깊은 관심을 가진 인물들은 김신국, 김기종, 김육 등의 관료학자들과 유형원과 같은 실학자였다. 화폐 유통은 전란과 재난의 위기를 극복하고 국부를 증대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 농업경제의 한계에서 벗어나 상공업적인 방법으로 국부(國府)와 민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었다.

17세기 후반 숙종대에 이르러 사회경제적인 변화상을 반영하면서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했다. 그 폐단에 대한 지적도 있었지만 화폐의 유통은 시대적 대세였다. 상평통보가 주조되면서 조선사회는 본격적인 화폐 유통의 시대를 맞이했다. 조선시대의 화폐 최소 단위인 1문은 1푼이라고도 했으며, 10푼이 1전, 10전이 1냥이 되었다. 상평통보가 도입된 초기에는 백성들이 '조그만 동전으로 쌀이나 옷을 과연 살 수 있을까?'라는 걱정에 그것을 사용하는데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 이에 나라에서 동전을 가져오면 바로 현물로 바꿔주기도 하고 주점과 음식점의 설치로 화폐유통의 편리함을 홍보하기도 했다. 또 세금을 화폐로 받으며 유통을 촉진시켜 나갔다.

18세기에는 화폐를 사용하지 않고 집에만 보관하는 것이 유행하면서 화폐 품귀 현상이 발생하였으며, 이에 따라 화폐의 유통량이 부족해지면서 화폐의 가치가 상승하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양반관료나 지주, 상인이 화폐를 고리대의 수단으로 활용하거나 모아두었기 때문이다.

흥선대원군 집권시기에 경복궁 중건을 위하여 화폐를 발행하는데, 이것이 바로 당백전이다. 당백전은 모양과 중량은 당시 통용되던 상평통보의 5·6배에 지나지 않았으나, 상평통보보다 100배의 명목 가치로 통용시키기 위해 주조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 유통 경제에 혼란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유통되면서, 조선시대에서의 화폐 통용이 널리 이루어진다.


1.3.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화폐의 공통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화폐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지닌다.

첫째, 대부분의 화폐가 동전 위주의 금속화폐였다. 고려시대에는 주로 철전, 동전 등 금속화폐가 유통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상평통보와 당백전 등의 동전이 주된 화폐였다. 이는 당시 종이 생산기술의 한계로 지폐 발행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종이의 품질이 좋지 않아 위조의 위험이 크고, 기후나 습도에 따라 변형될 수 있는 동전이 더욱 안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화폐의 도입 및 유통에 있어 백성들의 반대와 저항이 있었다. 고려시대에 철전이 도입되었을 때 백성들은 의구심을 표했고, 조선시대 초기에 저화와 상평통보가 도입되었을 때에도 현물 거래에 익숙한 백성들이 화폐 사용에 소극적이었다. 이는 농경 중심의 경제에서 화폐 경제로의 전환이 쉽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셋째, 화폐의 발행과 유통이 정부 주도로 이루어졌다. 고려 성종 때 철전을 법화로 주조했듯이, 조선에서도 저화와 상평통보 등을 정부가 발행하여 유통시켰다. 즉, 화폐가 백성들의 필요에 의해 자발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정부의 정책적 필요에 따라 도입되었다.

이처럼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화폐는 동전 중심의 금속화폐라는 공통점을 지니며, 화폐 도입 과정에서 백성들의 반대와 정부의 주도성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1.4.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화폐의 의의

고려왕조는 각종 동전, 즉 명목화폐를 법화로 주조하여 그것을 상거래의 매개수단으로서, 또는 관료나 군인의 녹봉으로 지급하는 등의 방법으로 화폐유통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금속화폐인 철전과 동전이 물품화폐인 쌀과 베에 구축되어 화폐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또한 은병이나 쇄은 등의 귀금속화폐도 품질이 나빠지고 소액거래가 불편하여 일반 유통계에서 널리 통용되지 못하고 대외무역거래에서나 일부 부유층의 부의 축적수단으로 사용되는 데 그쳤다. 이렇게 고려왕조가 물물교환이나 물품화폐 유통체제를 극복하고 명목화폐제도의 도입을 목적으로 추진한 금속화폐의 유통정책이 좌절되자, 또다시 일반 유통계는 쌀이나 베 등의 물품화폐의 유통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와 달리 조선시대에는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유통되면서 본격적인 화폐경제 시대를 열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물물교환에서 화폐경제로 전환되었으며, 화폐유통이 국가 경제발전의 핵심이 되었다. 상평통보는 조선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농업경제의 한계를 넘어 상공업적인 경제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여 근대자본주의 발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또한 화폐의 유통은 전란과 재난을 극복하고 국부를 증대시키기 위한 방안이기도 했다.

이처럼 고려시대에는 화폐유통의 실패로 물품화폐 중심 경제가 지속된 반면, 조선시대에는 화폐유통이 활발해지면서 근대적 경제체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이는 고려와 조선 두 왕조가 화폐 정책에 있어 큰 차이를 보였음을 의미하며, 화폐가 각 시대 사회경제에 끼친 영향이 달랐음을 보여준다.


1.5. 국립중앙박물관 방문후기

이번 박물관 방문은 바쁘게 살면서 잊고 있었던 지난 날의 '나'뿐만 아니라 잊고 지냈던 우리 역사를 되돌아 보게 하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특히 침략과 관련한 영상을 보며 마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가슴이 아프고 속상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화폐의 변천 과정을 살펴볼 수 있었고, 유물 곳곳에서 북방문화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고려와 조선 시대 한국사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고대로부터 이어온 우리 역사와 문화의 깊이와 가치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던 뜻 깊은 시간이었다.


2. 고려시대 창원의 역사
2.1. 고려의 건국과 지방행정조직

고려왕조는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마련하고 국가의 기반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지방제도의 정비에 주력하였다. 특히 성종 대에 들어 본격적인 지방행정조직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성종은 원년(982)에 유학자인 최승로가 올린 시무28조를 채택하여 실행함으로써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았다. 그는 당제를 채용하여 내외의 정치제도를 정비하고 국가기반의 정립을 이룩하였다. 그는 중앙관제를 제정하여 3성 6부를 설치하고 정치 실행에 필요한 기구를 마련하였다. 다음해에는 전국에 12목을 설치하여 호족을 통제하였다. 이때 설치된 고려의 12목 중 창원은 진주목에 소속되어 있었다.

고려의 지방제도는 군현제도를 근간으로 하여 중앙에서 외관을 파견하는 중앙집권적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건국 초기에는 호족들의 자치에 맡겼다가 성종 2년(983)에 이르러서야 12목이 설치되고 처음으로 지방관이 파견되었으며, 몇 차례 조정을 거듭한 뒤, 성종 14년에 이르면 더 한층 지방제도의 정비에 박차가 가해져 전국을 10도로 나누는 한편 종전의 12목을 12州 節度使로 고쳤으며 4都護府를 설치하고 한편 중요한 州, 郡에는 都團練使, 團練使, 刺使 등의 관원을 임명하게 된다.

이러한 고려의 지방제도가 완전히 확립되는 것은 현종 때 와서다. 현종 초기에는 전국에 5도호부와 75도 안무사가 설치되지만 현종 9년(1018)에 4도호부 · 8목 · 56知州郡使 · 28鎭將 · 20縣令의 외관조직으로 개편되면서 지방행정체계가 일단락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전국에 약 500개의 군, 현이 존재하였지만 모든 군, 현에 관리가 파견된 것은 아니었다. 《고려사(高麗史)》地理志에 의하면 고려 전기에 수령이 파견된 곳이 130여 곳이었고 수령이 파견되지 못한 屬縣이 373곳이나 되었다. 그러나 점차 속현에 대한 외관의 증파로 주현의 수가 증가되자 군, 현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중간 기구로서 5道 兩界를 설치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왕조는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마련하고자 지방제도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 과정에서 12목 체제부터 10도 체제로의 변화,...


참고 자료

역사의 향기 : 조선시대 화폐 이야기-신병주
대한지방행정공제회, <지방행정> 59권687호 (2011), pp.68-69
원유한, 「한국 화폐사(고대부터 대한제국까지)」, 동국대학교 , 2006, 11쪽
중량을 재서 그 교환 가치를 헤아려 쓰던 화폐, 네이버 백과사전 참고
원유한, 「한국 화폐사(고대부터 대한제국까지)」, 동국대학교 , 2006, 13쪽
원유한, 「한국 화폐사(고대부터 대한제국까지)」, 동국대학교 , 2006, 31~35쪽
국립중앙박물관 방문하여 찍은 자료에서 인용
고려 시대에, 곡식을 저장하여 두었다가 흉년이나 비상 때에 가난한 백성들에게 대여하던 기관. 성종 5년(986)에 처음으로 만듬. 네이버 백과사전 참고
고려ㆍ조선 시대에, 물가가 내릴 때 생활필수품을 사들였다가 값이 오를 때 내어 물가를 조절하던 기관 , 네이버 백과사전 참고
고려 시대에 둔, 화폐 주조 기관. 해동통보를 만들었다. 네이버 백과사전 참고
국립중앙박물관 방문하여 찍은 자료에서 인용
고려 시대에, 주전도감에 속하여 돈을 주조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아치, 네이버 백과사전 참고
국립중앙박물관 방문하여 찍은 자료에서 인용
원유한, 「한국 화폐사(고대부터 대한제국까지)」, 동국대학교 , 2006, 42~45쪽
고려 말기ㆍ조선 전기에, 닥나무 껍질로 만들어 쓰던 종이돈. 고려 공양왕 4년(1392)에 발행하였지만 본격적인 유통은 안 되었으며, 조선 태종 원년(1401)에 사섬서를 설치하고 이듬해 저화 2,000장을 발행하였다. 발행 초기에는 한 장이 쌀 두 말의 값어치를 가졌으나 그 뒤 돈의 가치가 계속 떨어져 겨우 쌀 한 되의 값어치를 가지게 되었으며, 중종 7년(1512)경에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네이버 백과사전 참고
원유한, 「한국 화폐사(고대부터 대한제국까지)」, 동국대학교 , 2006, 58쪽
역사의 향기 : 조선시대 화폐 이야기-신병주 대한지방행정공제회, <지방행정> 59권687호 (2011), pp.68-69
역사의 향기 : 조선시대 화폐 이야기-신병주 대한지방행정공제회, <지방행정> 59권687호 (2011), pp.68-69
[네이버 지식백과] 당백전 [當百錢]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 <창원시사> 창원시사편찬위원회,1997
2. <창원시 문화유적 정밀지표조사서> 창원대학교박물관, 창원시,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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