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한국사 뿌리깊은 기말"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한국사 뿌리깊은 기말
1.1. 후삼국시대의 영웅들
1.1.1. 궁예
1.1.2. 견훤
1.2. 후백제와 고려의 대결
1.3. 고려 태조 왕건
1.4. 고려의 호족과 문벌귀족
1.5. 고려의 무신정권
1.6. 조선의 건국
1.7. 조선의 양반 사회
1.8. 조선 후기 정치와 사회 변화
2.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한국사 뿌리깊은 기말
1.1. 후삼국시대의 영웅들
1.1.1. 궁예
궁예는 신라 출신으로 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신라의 제47대 헌안왕으로 알려져 있다. 궁예는 자신의 출생에 대한 비밀을 알고 10여 세에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 궁예는 진성왕 5년(891)에 절을 나와 초적세력들에게 의탁하였고, 죽주의 기훤과 북원의 양길에게 투신하였다. 궁예는 양길의 군사를 얻어 북쪽 지역을 평정하게 된다. 궁예는 송악을 근거로 자립하여 후고구려를 건국하였고, 이는 신라 효공왕 5년(901)의 일이다. 궁예는 고구려 부흥을 구호로 내걸고 북쪽 지역의 민심을 얻고자 하였다. 궁예는 다시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고쳤고, 도읍을 철원으로 옮겼다. 궁예는 마진 시대에 미륵불을 자처하며 많은 정적들을 숙청하였다. 이후 궁예는 다시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개칭하였다. 궁예는 부하들에 의해 축출되었고, 왕건이 새로운 왕으로 추대되었다.
1.1.2. 견훤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 아버지는 농민 아자개이다. 견훤의 성은 이(李)씨였으나 후에 견(甄)으로 바꾸었다. 견훤의 어린 시절 호랑이 젖을 먹고 자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는 어렸을 때부터 범상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견훤은 군대에서 공을 세워 비장(裨將)이 되어 무진주(현재 광주)로 와서 자신이 이끌고 온 군대를 배경으로 이 지역을 장악하여 후백제를 건국하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견훤은 신라 하대의 대표적인 군진세력으로 볼 수 있다.
견훤은 지방의 호족들과 혼인을 통하여 자신의 지배권과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삼국유사』에는 소위 '구인교혼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사위인 박영규와 지훤(池萱)이 모두 호족 출신이었다는 기록 등을 통해 견훤이 호족세력과 혼인정책을 펼쳤음을 알 수 있다. 견훤은 10여 명의 호족 출신 여성들과 결혼하였다고 한다.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의 정치적 변동은 대외관계의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후백제의 정치적 변동은 크게 네 개의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892년부터 899년까지 견훤이 무진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한 시기로, 이 때 견훤은 '스스로 왕 노릇을 하였으나 감히 공공연하게 왕이라 칭하지는 못하였다'. 두 번째 시기는 900년부터 924년까지 무진주에서 완산(전주)으로 세력의 근거지를 옮긴 시기로, 이 때 견훤은 '입도어완산, 자칭후백제왕, 설관분직' 등을 하며 본격적인 국가체제를 갖추어 갔다. 세 번째 시기는 925년부터 930년까지 고려의 왕건과 본격적으로 대립하며 투쟁을 벌였던 시기이다. ...
참고 자료
만들어진 한국사, 이문영, 파란미디어, 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