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연암 박지원의 업적, 장점과 단점, 그에 대한 일반적 평가와 해석 정리, 자신의 관점에서 새로운 해석과 재평가 시도 (1)재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그 이유를 설명 (2) 인물의 업적, 그에 대한 일반적 해석과 평가를 정리 (3) (2)에 대한 문제 제기, 자신의 관점에서 새로운 해석과 재평가시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서론
2. 연암 박지원 재평가
2.1. 인물 선정 이유
2.2. 박지원의 업적 및 일반적 해석과 평가
2.2.1. 박지원의 출생 및 생애
2.2.2. 업적 - 열하일기
2.2.3. 업적 - 과농소초
2.2.4. 연암 박지원에 대한 평가
2.3. 새로운 해석과 재평가
2.3.1. 정치적 관점
2.3.2. 문학적 관점
3. 결론
4.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서론
우리 시대에는 역사 속 인물들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역사가들의 관점과 해석에 따라 과거에 부정적으로 평가받던 인물들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란 과거로부터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역사가의 관점과 해석이 더해져 구성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본 보고서에서는 한국사 속 인물 중 연암 박지원을 선정하여 그의 업적과 일반적 평가, 그리고 새로운 해석과 재평가를 시도하고자 한다. 특히 그의 정치적 및 문학적 측면에서의 재조명을 통해 역사 속 인물에 대한 입체적 이해를 도모할 것이다.
2. 연암 박지원 재평가
2.1. 인물 선정 이유
이번에 한국사 속 인물들 중에서 재평가되어야 하는 인물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어떤 인물을 선택할지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내가 지금까지 관심을 갖지 않아 미처 몰랐던 훌륭한 위인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대다수가 대한민국 역사의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이지만, 어떠한 계기를 통해 자세히 알게 된 '연암 박지원'이라는 사람을 소개하고 싶다. 지난 학기에 모교로 교생실습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마지막 주에 모든 실습생이 연구수업을 해야 하는데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수록된 '상기'라는 고전 수필을 맡아 수업을 하게 되었다. 그때 담당 교과 선생님께서 단순히 작품을 설명하는 것보다 작가에 대한 정보를 제시하고 수업을 하면 학생들의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조언해주셔서 연암 박지원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수 있었다. 박지원의 대표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양반전'이나 '허생전' 같은 작품들은 문학 공부를 하면서 쉽게 접할 수 있었지만, 박지원이라는 인물이 정확히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몰랐던 나는 수업을 하기에 앞서 작가에 대한 조사를 한 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단순하게 훌륭한 문장가와 실학자가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한계 속에서 자신만의 개혁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광범위한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자료 조사를 하면서 느꼈던 점은 박지원은 시대를 앞서가는 선구자였지만, 조선 후기의 역동적이고 복합적인 사회 분위기에 막혀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이에 한국사에서 재평가되어야 하는 인물로 연암 박지원을 선정하여 새로운 관점에서 재조명하고자 한다.
2.2. 박지원의 업적 및 일반적 해석과 평가
2.2.1. 박지원의 출생 및 생애
연암 박지원(朴趾源)은 영조 13년인 1737년에 서울의 서소문 밖 반송방(盤松防) 야동(冶洞)에서 아버지 박사유(朴師愈)와 어머니 이창원(李昌遠)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 없던 선비였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할아버지 박필균(朴弼均)의 밑에서 외롭게 자란 박지원은 16세가 되어 전주 이씨(全州李氏)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혼인을 하고 맹자(孟子)를 중심으로 학문에 정진하게 되었다. 이후 이보천의 아우인 이양천(李亮天)에게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비롯하여 다양한 역사 서적을 통해 문장 쓰는 법을 익히고 수년간의 학업에서 문장에 대한 이치를 터득하여, 추후 서술할 열하일기를 비롯한 수많은 저서들의 기반을 마련했다. 워낙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이기에 일찍이 벼슬길에 올랐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반대로 연암 박지원은 꽤 오랜 기간 동안 관직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1760년에 할아버지 박필균이 세상을 떠나자 더욱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된 박지원은 학문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1765년 처음 과거에서 낙방한 후에 벼슬과 관직에 뜻을 멀리하게 된다. 당시 조선 후기는 역동적인 변화를 맞이하여 대내외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구성해야 하는 시기였지만, 명분론적 질서만을 강요하는 당시의 지...
참고 자료
박환. (2002). 김좌진장군의 항일독립운동 성격과 역할 -투쟁노선과 정치이념을 중심으로-. 군사, 46,
민황기 and 손세제. (2016). 백야 김좌진의 민족의식과 국권회복운동. 유학연구, 37, 151-185.
황선익. (2009). 초등학교 교과서의 한국독립운동 서술과 수정방안. 한국학논총, 32, 7-26.
주성하,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 역사에 묻다-너는 과연 정직하냐고, 2009.6.1. Available at: https://archive.md/1wwfn
홍주일보, 백야 김좌진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항일투쟁의 길, 2022.10.8.
연개소문의 후계구도 정립과 사망, 박용철, 대구사학회, 2018
‘고구려 연개소문 정권의 한계성’, 김기흥, 1992년
연개소문, 나무위키, 2022